2014넌 11월 13일, 한국의 파브르 석주명이 태어난 날
석주명 (1908~1950)
석주명(石宙明, 1908년 11월 13일 ~ 1950년 10월 6일)은 대한민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생물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 언어학자, 박물학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 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는데,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독립 운동을 지원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석주명이 민족 문제와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 비둘기같은 동물을 좋아해 집에서 길렀으며, 1921년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세운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며, 다시 경상북도 대구고등농림학교로 전학한 후 1927년에 졸업했다.
송도고보 학생 시절에 석주명은 집에서 떠나서 공부했는데, 한때 음악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 하기도 했다. 집에서 많은 생활비를 보내 주는 데다가, 공부를 감독할 부모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낙제 과목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학 동안 공부에 힘썼다.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 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敎)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석주명은 중화민국의 타이완에서 곤충 채집 여행 때 비를 맞지 않으려고 나무에 모인 하루살이들을 채집할 만큼 끈기가 있는 학생이었다.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졸업 후에는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는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재학시 지도 교수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할 즈음의 석주명에게 교수는 장래를 물었는데, 석주명은 차별 때문에 학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수는 "한 분야에 10년간 집중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며 한반도에 사는 나비 연구를 권했고, 석주명은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비를 연구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도중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국립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타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석주명 자신도 1950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죽었다. 제자들에 의해 거적에 싸인 시체로 발견되었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았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는데, 그 결과 무늬가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비는 같은 종류라고 할지라도 성, 계절등에 따라 몸의 크기와 무늬가 다르다. 그런데도 성급하게 무늬와 색상만으로 다른 종류라고 잘못 생각하던 일본 학자들의 관행을 바로 잡은 것이다. 나비의 분류에 관한 80편이 넘는 논문을 남겼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붙여준 나비이름으로는 신부나비(천주교 신부들의 예복을 연상한 이름), 도시처녀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부전나비(부전은 어린이들의 장식용 노리개를 말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부전나비는 몸집이 작아서 귀엽고, 날개색상이 화려해서 예쁜 나비이다.), 깊은산부전나비 등 다양하며, 학명에 그의 성(Seok)을 붙였다. (일본어로 된 나비학명등을 바로잡고 한국어로 바꾸셨다고 합니다)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그의 저서는현재 사이트 영국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Improvement of Natural Knowledge)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되는 세계나비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나비를 채집하여 분류하고 연구했다. 또 그 성과를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했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1947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했다. 누이동생 석주선이 한국 전쟁 피난 시절 배낭에 넣고 다니며 보존했다가 1973년에 발간한 『한국산 접류 분포도(The Distribution Maps of Butterflies in Korea)』는,대한민국 나비 250종이 분포하는 지역을 종마다 각각 한국 지도와 세계 지도 한 장씩에 붉은 점으로 표시한 지도 500장으로 편집되어 있다. 석주명의 유품 및 관련 사료 50여점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죽기 직전에 석주명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위키백과
고운 나비, 고운 이름
30대 초반에 이미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인정받으면서 석주명의 연구열은 더해 갔고 그는 연구시간을 벌기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년 정도 서울에서 연구하던 그는 1943년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 파견을 자원했다. 그때까지 제주도는 채집여행이 쉽지 않아 그의 연구에서 취약지구였다. 그는 이 기회에 제주도 지역의 나비연구를 완성하기로 하고 모두가 꺼리는 벽지 근무를 자원했던 것이다.
제주도에 머무는 2년여 동안 그는 나비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연구에 힘을 쏟았다. 나비학자로서 언어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외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의 방언연구는 나비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제주 방언이 다른 지역 방언과 어떤 친연관계를 보이는가 하는 연구는 나비의 지역적 분포와 친연관계를 밝히는 것과 방법론상으로 똑 같았고 나비의 분포는 방언의 분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훗날 아름다운 우리말 나비이름을 짓는데 큰 힘이 됐다.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에 대한 연구는 제주도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었고, 1949년부터'제주도 총서' 여섯 권으로 정리돼 나왔다. 오늘날 제주도의 생활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서 사투리를 완벽하게 채집하기란 불가능하다.
석주명의 방언연구는 제주도가 아직 육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제주도 사투리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고어, 동남아지역의 언어와의 관련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지금 쓰이고 있는 나비 이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재치있고 풍부한 감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봄처녀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외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등 우리말의 정감을 한껏 살린 고운 이름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출처:http://tip.daum.net/question/52824436
첫댓글 와 이런 위인이 계셨는줄 지금 처음알았네요.. 멋지신 분이네요.
몰랐던 내용이네요. 글 감사합니다~
석주명.... 예전에 위인전으로 보셨던 분인거 같은데 한국의 파브르와 같은 분이시죠.
한국은 나비군요. 미국은 첫 혜성 착륙 때문에 로고에 필레가 있는데.
말년이 너무 슬프네요. 대단하신 분이 아깝게 돌아가셔서 가슴 아픕니다.
몰랐는데 고등학교 선배님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