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입당송)
요즘 산책때 수확이 끝난 텅빈 밭의 흙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에 젖습니다. 흙은 제 영원한 스승입니다. 흙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며칠전 써놨던 글입니다.
“흙의 침묵
흙의 겸손
흙의 사랑
우람한
무우 자식들
초연히 다 떠나 보내고
늘 깨어
묵묵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어머니 흙, 흙같은 어머니”<2024.11.13.>
흙(humus)을 닮아 겸손(humilitas)한 사람(homo)입니다. 겸손도 사람도 흙에 어원을 둡니다. 수도원내에서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보며 흙길을 산책하지만 수도원정문을 나서면 온통 포장으로 어머니 흙을 보기가, 흙길을 걷기가 참 힘든 사막한 현실입니다. 더불어 며칠전 나눴던 ‘소망’이란 글도 다시 나눕니다. 청정과 온유의 마음 역시 마리아 어머니의 마음처럼 생각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1997.12.2.>
요즘 만추의 위령성월이 청정한 날의 연속입니다. 청정에 온유를 겸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미국에 있는 미네소타주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노수도사제와의 우정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추웠던 날 노수도사제에 악수를 청하니 손이 차다며 사양할 때 드린 짧은 덕담과 더불어 시작된 우정입니다.
“Your hands are cold, but your heart is warm!”
(네 손은 차나 네 마음은 따뜻하다!)
날씨는 차가워도 마음은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마리아 성모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이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음에는 저마다의 알맞은 자리가 있다. 감정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다산>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은 평온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질서에 맞게 감정을 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중용>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살 때, 마음과 감정의 순화로 평온하고 질서에 맞는 마음에 감정일 것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마음과 감정이 이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오늘이 영명축일이라며 각별한 기도를 청하던 신심깊은 마리아 자매도 생각이 납니다.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오늘 똑같이 축일을 지냅니다만 동방정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이라 부릅니다.
이 축일은 신약성경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200년경에 쓰여진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근거합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걱정중 하늘로부터 한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계시를 받고 딸 마리아를 갖게 되었고, 3세 정도 나이에 성전에 봉헌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성전에 있는 동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종교교육을 받습니다.
콥트교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의 부친 요아킴은 그녀가 6세때, 모친 안나는 8세 되던 해에 사망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전설이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유년시절부터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토대로 마리아의 자헌 축일이 생기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이나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근처에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 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동방에서 오랫동안 기념되었던 이 축일은 9세기쯤 이탈리아 남부 수도원들에서 기념이 시작되었고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에 있는 교황 전용 경당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기념합니다.
그후 1472년 로마 미사 경본에 처음으로 기재되었다가 사라졌지만, 1585 교황 식스트 5세는 이 축일을 다시 허용했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2등급 축일로 지정했으며, 마침내 1969년 로마 전례력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오늘 11월21일 ‘복되신 동정마리아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시온의 딸은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집단인격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물론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요, 예언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도 실현되고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에서도 실현되어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참가족이, 한가족이 되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밖에서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신후,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당신 공동체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르시니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요약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 예수님은 혈연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참가족이자 한가족임을 천명하십니다. 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가 언제 어디에 살든 모두 당신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둔 우리들은 모두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한가족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인 마리아 성모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평생 그 누구보다 한결같이 아드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온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봉헌 삶의 영원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을 이뤄주시며, 더욱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첫댓글 아멘!~~~"참 가족"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