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간단한 방법
장애가 심한 여성을 본 적이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육십년이 넘게 그런 몸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그녀를 목욕을 시키러 온 간병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 여성을 목욕시키고 돌아가면서 내가 깨닫는게 있어요. 내가 내 몸을 스스로 씻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는걸요. 가난하다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나 역시 중증의 장애를 가진 그 여성을 보면서 먹고 마시고 화장실을 가고 글을 쓰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았다. 장애를 앓는 그 여성은 존재자체 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로서 죄수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었다. 수십년 그 안에서 살던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도소 높은 콘크리트 담장 밑이라도 걷고 싶어요. 먼지 낀 잡초라도 보면서 산책하고 싶은 거죠.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이 감옥이죠.”
그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몇 년간 독방에 혼자 있으면 차라리 싸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요. 부부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참 행복할 거예요.”
그는 다시 어둡고 긴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교도소 철문의 마찰음을 들으면서 나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싱그러운 풀과 나무들 그리고 공원에 흐르는 맑은 물을 보고 걸으면서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자각하곤 했다.
금수저 출신의 승부욕이 강한 친구가 있었다. 뭐든지 최고이어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 같았다. 그에게 어떤 패배가 눈 앞에 다가왔다. 그는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한강 다리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다음에는 호텔 방에서 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빨리 발견되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그는 실려간 병원에서 사층 옥상으로 올라가 다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즉사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그가 있을 때 찾아갔었다. 나는 안타까웠다. 그는 왜 위만 쳐다보면서 승부욕에 불탔던 것일까. 져주면 안되는 것일까. 이류나 삼류로 살면 안되는 것일까. 진흙탕에 굴러도 죽음보다는 삶이 더 소중한 건 아닐까. 그는 분명 생각이 달라졌을 것 같았다.
“이제는 살고 싶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몇시간후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감사고 행복인 걸 알았다. 일등이나 일류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변호사를 하면서 느낀 게 있다. 누구나 위를 쳐다보면 부족하고 아래를 보면 넉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진리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서울대를 나오고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직급의 사다리 맨 위인 일급까지 간 친구가 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난 일급 밖에 못 했어”
장관과 비교해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서울대에서 자신이 원하던 과를 가지 못한 것도 상처로 남은 것 같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그의 정신은 학벌과 계급에 묶여 있었다.
몇몇 재벌 회장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부는 그냥 일상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구멍가게 수준이요. 십대 재벌에도 들지 못한걸”
부자라도 만족할 줄 모르면 돈과 재산의 노예를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주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고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해 보였다.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을 다 채우려는 탐욕 그 자체가 지옥이 아닐까.
나는 나름대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찾았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답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족할 줄 알면 항상 넉넉하고 즐겁고 평온할 것 같다.
[출처] 행복을 찾는 간단한 방법|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