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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성전은 돈까지 거룩하게 만드는 곳이다
금쪽같은 내새끼 186회에서는 엄마의 과도한 절약 습관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나왔습니다.
엄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이 잘사는 길이란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변기 물을 내리는 것도 금지합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도 공공장소에서 받아와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절약의 방법은 너무 엽기적이고 많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 엄마와 따로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이런 아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받지 못했던 유산을 많이 남겨주려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빚도 없고 자가 아파트도 있습니다.
남편은 1,000만 원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벌어오는 착실한 직장인입니다.
이 엄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일까요? 엄마 수중에 들어오는 돈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는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 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가 중요할까요, 돈이 중요할까요? 아이들도 이런 분위기 안에서 자기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래서 싸움이 많이 일어납니다.
엄마는 그 싸움이 아이들이나 돈을 적게 버는 남편 탓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엄마는 성전, 곧 무언가를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 아니고 그냥 무덤과 같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자신이 허물어져 가는 무덤이 이곳저곳을 땜질하는 데 씁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은 그 안에 들어오거나 그 위에 올라오는 것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들어오는 돈이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사 안에서도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로 들어오는 돈을 성당을 크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고, 그런 건축 과정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돈을 착복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들어오는 신자들이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지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오는 돈부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에게 은 촛대까지 준 주교님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어떻게 금과 은을 거룩하게 하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성당 안에 들어온 이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이 거룩해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금도 거룩해지고 사람도 거룩해집니다.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황제에게 가서는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라고 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감하게 그렇게 사용하는 돈의 액수가 너무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전 성심당을 본받읍시다.
그냥 빵집이지만, 실제로는 성당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오는 돈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돈들은 직원 복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냥 무덤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라난 잡목과 잡풀들로 마치 밀림처럼 변한 골짜기를 예초하다가 뜻밖의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예초기를 돌리던 어느 순간,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어여쁜 배롱나무 군락을 만난 것입니다.
비록 잡목들에 가려 크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족히 스무 그루가 넘는 진홍빛 꽃이 어여쁜 배롱나무들이 거기서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는 ‘이게 웬 횡재냐?’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십 수 년 전 그곳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린 묘목을 심었을 선배 회원의 노고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진귀한 보물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우리 선배들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의 씨앗도 우리 가까이에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허세로 따지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두 그룹,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그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위선자들!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 야단맞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치를 떨고 이를 갈 정도로 강한 질책입니다.
매사에 진실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이중적인 처신과 위선적인 삶을 그리도 강경하게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볼썽사나운 위선과 이중성이 잔뜩 들어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 또 성찰해야겠습니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여도 동고동락하는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깥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인정, 칭송과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 공동체 형제들에게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위선으로 가득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분명합니다.
이중성의 극복의 중요성에 대한 교부들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었다면, 바다와 세상의 모든 강물에서 몸을 씻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보실 때
더러움으로 시커멓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로 씻어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기도로 씻어야 하는 양심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강론>
(2024. 8. 26. 월)(마태 23,13-22)
<‘바로 내가’ 그들보다 더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3-22).”
1)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얼마나 심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위선자들’이었는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무슨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옛날 일에서 교훈을 얻는 정도의 의미는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2)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누군가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라는 함정에서(‘죄’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깨닫지 않는다면, 남이 어떻게 해 주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만 점점 더 크게 키우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내부의 박해를 겪은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부를,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비판을 할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고, 거의 항상 “너나 잘해라.”, 또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도 위선자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리고 남의 위선을 비판하는 일을 잘하는 그 사람이(바로 내가) 더 위선자인 경우가 많긴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선을 비판하고 꾸짖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겸손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4) ‘위선자들’과 ‘위선’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나의 위선’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부터 해야만 ‘남의 위선’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바오로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사도단의 대표이며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데도,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뉘우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먼저 위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판한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떤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칠삭둥이 같은 나,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위선’은 항상 ‘교만’과 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게, 진심으로 자기를 낮춘 바오로 사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맹세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꾸짖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맹세의 원칙’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4-37).”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