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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여기서 일을 오래 하려면 생활이 간소해야 한다."
2014년 내가 ‘민중의소리’에 입사하기로 했을 때, 당시 그 회사 간부였던 벗이 나에게 해 준 조언이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간소한 생활’이란 최대한 검약하는 생활을 뜻한다.
"나는 원래부터 꽤 검약한 편이었어"라는 대답에도 그의 조언은 흔들리지 않았다. “더 간소해야 해. 그래야 오래 이 생활을 할 수 있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나는 뭘 잘 모르면 친구의 조언을 따르는 편이어서 그때부터 그의 조언을 100% 받아들였다. 그전까지 철저한 맥주파였는데, 그때부터 선호 주종을 소주로 바꿨다(술을 끊을 생각은 왜 안 한 거지?) 술에 취하면 술김에 택시를 잡아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도 버렸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그의 조언이 100% 이해가 됐다. 그건 단지 “우리가 돈을 잘 못 벌기 때문에 절약해야 한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생각은 살아가는 현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걸 좀 유식한 말로 정치경제학에서는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한다. 칼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검약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면 의식 또한 민중의 그것에 더 가까워진다. 반면 생활 자체가 지배계급의 그것에 가까우면 아무리 입으로는 진보를 외쳐도 의식이 자연스레 지배계급의 그것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취미로 ‘민중의소리’ 기자를 하려는 게 아니라면, 생활 자체를 민중들과 가깝게 해야 의식 또한 그들의 삶에 더 가까워진다. 그래야 ‘민중의소리’ 기자다운 글이 나온다는 게 그 친구의 요지였다.
최고급 호텔에서 진보를 논하는 것
10년 전쯤 한 진보적 정치인이 책을 출간하는 일에 간여한 적이 있었다. 그 정치인은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출간에 필요한 저자 인터뷰를 강남 최고급 호텔에서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에는 호텔 커피숍이 조용하니 그곳에서 인터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고 호텔 룸을 잡고 그곳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용은 출판사의 몫이었다.
인터뷰 도중 야밤에 “와인을 사 오라”는 그 정치인의 지시에 출판사 노동자가 허겁지겁 와인을 구매하러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미안해하기는커녕 마치 받을 대접 받는다는 듯이 와인을 받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이후 나는 그의 또 다른 책 출판 과정에도 간여했는데, 기대를 접고 그를 대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만나자마자 반말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비서 부리듯 하는 태도가 거슬렸지만(비서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원래 저런 사람이다’ 생각하니 화도 별로 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나는 유권자의 한 명으로서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3년 전쯤인가? 정말 오랜만에 그로부터 연락이 두 번 정도 왔다. 두 번 모두 자기와 함께 방송에 출연해 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을 거절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다(물론 공손하게 거절했다) 애초부터 다른 방송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방송에 소질도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와 머리를 맞대고 진보 어쩌고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또한 생활의 간소화에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한다. 청년시절 그가 치열한 삶을 살았을 때 그는 분명 순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로 좀 유명해지고 정치적 영향력이 생겼다. 돈도 자연스럽게 좀 벌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와인을 마셔보니 맛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그 생활이 진심으로(!) 좋아지기 시작할 때 시작된다. 가끔 한두 번씩 기념할 만한 날에 그걸 즐기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생활을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들이 부럽고, ‘나는 왜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면 생활 자체가 바뀐다. 남이 대주는 호텔 비용, 남이 사주는 와인이 자연스러워진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의식은 진보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말에는 무게가 있다
“진보라면 검약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검약이 미덕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검약은 미덕이 아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소비해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
내가 하려는 말의 요지는 의식과 존재 조건을 끊임없이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식은 진보적인데 생활은 지배계급의 그것을 추종한다면, 아무리 의식이 뛰어나다 한들 결국 의식이 패배하기 마련이다.
강남 최고급 호텔에 묵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묵으면서 “니네들이 돈 내라”고 당당히 요구해서는 안 된다. 값비싼 와인도 당연히 마실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마시면서, 야밤에 “와인 사서 내 방에 가져와”라고 명령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남의 돈으로 그 짓을 하면서 몇 시간 동안 진보가 어쩌고 민중이 어쩌고 떠들어서는 안 된다. 야밤에 와인을 구해 허겁지겁 호텔 방에 제공했던 그 출판 노동자가 진보를 뭐라고 생각했겠나? 그 출판사 노동자들이 그가 책에 적은 “민중을 위해” 어쩌고 했던 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나?
나는 그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봤다. 좋은 대학교를 나와 뜻있는 활동을 하겠노라 다짐하며 사회에 진출한 이들, 그들 중 상당수가 보수화되는 이유는 생활을 간소화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진출할 때 그들 대부분은 큰소리를 친다. “그 어떤 경우도 진보의 신념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 그들 중 꽤 많은 이들이 변한다. 더이상 진보는 그들의 신념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여가 생활이다. 100%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의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명제는 실로 놀라운 통찰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벗의 조언을 더 무겁게 받아들인다. 특히 말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더욱 중요하다. 말에는 무게가 있다. 사회적 발언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말의 무게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말은 진보적으로 멋있게 했는데 정작 생활이 그와 동떨어져 있다면 사람들이 그 말에 신뢰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괴리는 진보에 득이 되지 않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우리가 왜 진보인가? 만인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 아닌가?그 행복할 권리에 조금도 다가가지 못해 신음하는 민중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 진보라면, 우리의 삶은 그들의 그것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