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성 세바스찬의 화살과 송이
일상의 순교자들
"화살 같았어요"
얼마전 20대 대학생 ‘송이(가명)’와의 미술심리상담을 잘 마무리했다. 그녀의 이슈는 우울이였다. 가족에게서 지속적으로 받아 온 언어적 상처는 그녀에게 ‘화살’ 이였다. 10여년전, 화살을 맞던 초등학생 송이는 화내는 것을 포기했다.
화를 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만큼 그녀는 영리했다. 슬픈 조숙함이였다. 오랫동안 억압된 분노는 어느날 그녀에게 깊은 우울을 선사했다.
‘화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미술사의 모델이 있다. 성 세바스찬(Saint Sebastian,255~288)이다. 로마시대 프랑스 출신의 기독교인이였던 그는 로마군에 들어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근위병으로 복무한다.
기독교 신자들을 도우며 중요 인물들을 개종시키다 발각된 그는 기둥에 묶여 말 그대로 ‘성게처럼’ 화살을 맞는다. 죽은 줄 안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다시 황제 앞에서 부당함을 꾸짖는다. 두번째 몽둥이의 태형에서 기적은 없었고, 순교자의 시신은 하수구에 처참히 버려진다.
성 세바스찬의 순교 (1480), 안드레아 만테냐, 루브르 박물관
추후 그는 용기와 헌신, 강인함의 성자, 궁수와 운동선수, 성스러운 죽음을 소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자 역병(페스트)을 막는 보호자의 상징으로, 다빈치부터 에곤쉴레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소재가 되었다.
유럽의 미술관에서 나체로 화살을 맞은 한 남성의 그림을 보았다면 그는 아마도 성 세바스찬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그의 외모는 점차 이상화되어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변하고 고통은 천국으로 향하는 환희와 중첩되어 또 다른 욕망이 깃든 섹슈얼한 표정으로 변주된다.
독일의 유명한 순례지 에버스베르크 Ebersberg 마을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는 오래전 은 장식과 함께 성배로 사용되었던 성 세바스찬의 두개골이 여전히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호러'로 보이지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신성시하는 것은 오랜 가톨릭의 전통으로, 많은 성당들이 성인들의 유해와 무덤과 함께 세워졌다.
한국에도 기꺼이 화살을 맞은 성인들이 있다.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김대건 신부(1821-1846)를 포함한 순교자 103인을 성인으로 선포했다. 가톨릭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울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가면 이 순교자들의 기록과 흔적을 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은 성 세바스찬과 같은 기적을 남기지 못한 채 잔혹하게 스러졌지만 다행히 역사에 남았고, 김대건 신부의 유해들도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람들에게 순교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신라시대의 이차돈(506-527)이 있다. 불교신자로 순교를 자청했던 그의 예언대로 참수된 목에선 흰색 피가 솟구쳐 오르며 하늘에선 꽃비가, 땅이 요동치는 등 이적이 일어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부족 연맹체로 국가 체제가 미비했던 신라의 법흥황은 이 일로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가 공인된 신라는 향후 삼국의 통일까지 이끌게 된다.
이차돈 순교비(818), 국립경주박물관
성 세바스찬은 스티븐 킹 원작의 미국 고전 호러영화 ‘캐리(Carrie)’(1976)에도 등장한다. 내성적이고 순수한 고등학생 캐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소녀다. 캐리의 집 다락방에는 조금은 기괴한 세바스찬 상이 있다.
비정상적인 광신도 어머니 밑에서 자란 캐리는 학교에서도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졸업 무도회에서 큰 굴욕을 당한다. 계획적으로 그녀를 무도회의 여왕으로 무대에 세운 뒤, 사람들 앞에서 돼지피를 뒤집어 씌운 ‘일진’들.
분노한 캐리는 참아 온 초능력을 폭발시켜 파티장을 광란의 살육장으로 만든다. 불덩이와 물줄기들은 개인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대중들까지 몰살시킨다.
집에 돌아온 캐리는 자신을 죽이려는 어머니도 실랑이 끝에 죽이게 되고, 마지막 초능력으로 집과 모든 것을 품은 채 스스로를 땅 속으로 매장한다. 캐리가 기도하던 조악한 성 세바스찬 상도 함께.
세상의 온갖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온 캐리는 그렇게 최후를 맞는다. 영화 속 성 세바스찬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고, 대다수 관객은 이 상을 예수상으로 착각한다. 캐리는 지옥으로 간 순교자였을까?
영화 (1976)의 한 장면
평범한 우리의 마음은 생존과 득실의 계산 속에 현란하게 요동치며 수없이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다. 그러다 어느 허무한 날, 문득 성인들을 기리고 위로받으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그 와중, 우리 주변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일상의 순교자들이 있다.
우린 살면서 종종 화살을 맞으며 상처받고, 억울해하고, 화를 낸다. 누구는 그 화살을 엄살이라고, 누구는 왜 거기서 그 화살을 맞았냐고 탓한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계속 화살을 맞으며 ‘화’라는 단어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화는 언젠가 자신과 타인에게 더 큰 화로 되돌아온다.
화살이란 단어로 표현되기 시작된 송이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은 미술로 난생 처음 마음껏, 그리고 안전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조심스럽고 따뜻한, 하지만 치밀한 상담사의 동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그녀의 분노는 마침내 종이 위에서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쳤고 세션이 끝날 무렵엔 동글동글한 찰흙 눈송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보니 참고 참았던 분노가 어느새 크기도 알 수 없는 큰 눈덩이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일상의 관계 속 순교자가 없기를. 평범한 우리가 주변에 두고픈 것은 건강한 성인(成人)이지, 거룩한 성인(聖人)이 아니다.
원치않는 희생의 반복은 분노와 억울함을 담보한다. 댓가없는 타인의 희생을 쉬이 칭찬하기 전에 희생자가 없도록 서로 챙기는게 낫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친구라는, 애인이라는 이름의 종교 아래 벌어지는 누군가의 순교는 우리 모두 거절해야한다.
“눈이 내리면 눈덩이가 커질수도 있고, 또 비가 오면 녹기도 하고 그런건데, 이제 나를 아끼고 지키며 살아야겠어요.”
마음이 한결 편해진 송이는 이제 화살을 맞으면 화가 나고, 그 화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 전에 화살에 맞지 않을 만큼 경계를 지키며 자신을 돌보는 것도 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직접 만든 예쁜 눈송이를 보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