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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 바스켓의 주인공. NBA 3회 우승, 디비전 타이틀 11회, 컨퍼런스 타이틀 5회를 기록한 NBA 3대 명문 구단. 수많은 레전드가 거쳐간 역사적인 구단.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1939년에 창단되어 69년의 역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랜차이저 농구 "팀" 이다. 오늘은 필라델피아를 연고로 한 스포츠 팀 마지막 순서로 NBA의 명문구단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를 소개하려 한다.
① 최초의 농구 팀 시랴큐스 네셔널스.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現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의 전신구단이다. 뉴욕 시라큐스시에 연고를 두었던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1963년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기록했다.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1946년 NBL (National Basketball League)에 가입하기 전까지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NBL에 소속해 있던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3 시즌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NBL 마지막 해였던 1948-49년 시즌에서는 시즌 성적 40승 2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4강전에서 2년 연속 앤더슨 듀피 패커스에게 패배했다. 1949년 NBL의 7개 팀이 BAA (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 )와 합치면서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NBA에 소속하게 된다. 1948년시즌 돌프 쉐이즈를 영입한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매년 향상된 성적을 거두게 된다. NBA 첫 해인 1949-50년 시즌에는 51승 13패를 기록하며 디비전 우승및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뉴욕 닉커박커스를 제압하며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미니애나폴리스 레이커스에게 일격을 당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시라큐스는 1955년 우승하기 전까지 막대한 전력을 갖추게 된다. 1950년 준우승이후, 팀의 감독이자 선수였던 알 서비는 전술적인 부분을 보안하기 위해 코트에 나가 뛰는 것을 자제한다. 1953년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앨렉스 그로자와 랄프 비어드를 영입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우승에 대한 도전을 할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45-55년 시즌,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포트 웨인 피스톤즈를 결승전에서 누르고 창단 16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만끽하게 된다.
② 계속되는 시라큐스 네셔널스의 도전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조지 킹의 대 활약으로 1955 파이널에 우승한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1955-56시즌 부진한 성적을 빌미로 8동안 팀을 책임졌던 알 서비 감독을 경질하고 폴 쉐이모어를 새 감독으로 임명한다. 이 당시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이후 경제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스포츠 구단들이 파산했고 각 스포츠 종목을 대표하던 리그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농구리그 (NBL 및 NBA)같은 경우에는 경영위기에 놓인 대도시들의 제정상태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대도시 보다는 제정적으로 타격이 적은 중소도시를 선호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경기는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1956년 포트 웨인과 라체스터가 신시네티와 디트로이트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대부분의 NBA 구단들이 대도시로 연고지를 이전을 검토하게 된다. 시라큐스 네셔널스의 라이벌은 다름 아닌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와 "보스턴 셀틱스". 항상 이 두 팀은 시라큐스 네셔널스가 파이널로 가는 길목을 방해하던 팀 들이었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는 "윌트 챔벌린"이 보스턴 셀틱스에는 "빌 러셀"이 지키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워리워스는 시라큐스 네셔널스가 필라델피아로 이전되면서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다.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NBL에 소속해있던 3 시즌동안 85승 82패 (승률: .509)를 기록했으며 NBA에 소속해 있던 14 시즌동안 576승 437패 (승률: .569)를 기록했다.
③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새로운 우승을 향해...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1963년 이전까지 NBA 리그에서는 마지막으로 중소도시에 연고로 둔 구단이었다. 1963년 필라델피아로 연고지를 옮긴 시라큐스 네셔널스는 새 연고지와 함께 새로운 이름으로 재 탄생했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의 도시이자 미국 첫번째 수도인 필라델피아를 뜻하는 의미에서 구단 이름을 76ers로 정하게 된다. 필라델피아시는 네셔널스가 연고지를 정하기 전까지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시를 대표하는 프로 농구 팀이었다. 하지만 1962시즌을 마지막으로 워리어스는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기게 되었고, 시라큐스 네셔널스의 신임 사장인 코스로프는 마침내 필라델피아로 연고지 이전을 확정 짓는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연고 이전 이후 첫 4시즌동안 필라델피아 아레나, 시빅 센터 컨벤션 홀, 그리고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속해 있는 더 팔레스트라에서 경기를 가졌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1964년 "필라델피아의 영웅" 윌트 챔벌린을 워리어스에서 영입하게 된다. 윌트 챔벌린은 필라델피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LA 레이커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필라델피아에서만 뛰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윌트 챔벌린을 영입한 이후, 보스턴 셀틱스와 기나긴 악연을 지속하게 되었다. 1965년 동부 디비전 파이널에서 만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와 보스턴 셀틱스는 7차전까지 가는 명경기를 연출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7차전 마지막 경기에서 110-108로 리드 당한채 마지막 공격권을 가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레전드인 할 그레어는 패스를 하다 보스턴의 존 하블리섹에게 스틸을 당하며 통한의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 보스턴 셀틱스는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를 누르고 NBA 파이널에 진출, 빌 러셀을 막아야 할 엘진 배일러의 부상으로 전력에 차질을 맺었던 LA 레이커스를 격파하며 8번째 NBA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이 당시 NBA 리그는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의 윌트 챔벌린, 보스턴 셀틱스의 빌 러셀, 그리고 LA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④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의 두번째 우승 1967.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가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보스턴 셀틱스를 꼭 넘어서야 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에겐 LA 레이커스보다 더 무서웠던 존재가 보스턴 셀틱스였다. 명장 알렉스 핸넘 감독 지휘아래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보스턴 셀틱스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1966-67시즌, 종전 최고의 기록인 68승 13패를 기록하며 리그 1위를 차지한다. 이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라인업은 1982-83시즌 라인업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 드림팀중 드림팀이었다. 윌트 챔벌린을 비롯해 빌리 커닝햄, 할 그리어, 챗 워커, 루셔스 잭슨, 그리고 월리 존스가 버티는 식서스는 보스턴 셀틱스를 압도할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 2위였던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보스턴 셀틱스는 그 해 전설적인 아워바크 감독과 빌 러셀 중심으로 60승 21패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디비전 파이널에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에게 1-4로 발목을 잡히며 커리어에서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팬들은 "BOSTON IS DEAD"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만년 2위인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에게는 더욱이 잊지 못한 시즌이었다. 보스턴 셀틱스의 아워바크 감독은 식서스에게 패배한 후 감독직을 자진 사퇴해야만 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파이널에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를 4-2로 제압하며 창단 두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NBA 창설 35회를 맞았던 해에 "역대 최고의 구단" 투표에서 1966-67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가 선정되었을만큼 1967 멤버는 NBA 역사중 가장 기억에 남을 최고의 팀이었다.
⑤ 어이없는 챔벌린 트레이드 이후 기나긴 암흑기.
1967-68시즌 필라델피아는 전년도 챔피온답게 지구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를 물리치고 62승 20패를 기록하며 NBA 리그 전체 1위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동부 디비전 결승전까지 올라간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보스턴 셀틱스를 시리즈 3-1로 몰아 세웠다. 하지만 이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자만과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며 결국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보스턴 셀틱스는 이러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를 역으로 공격하며 결국 시리즈 4-3으로 역전하고 NBA 결승전에 진출한다. 필라델피아 감독이었던 알랙스 핸넘 감독은 그 당시 인터뷰에서, "우리는 결국 한번의 우승에 만족할만 인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듯이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의 오만함은 극을 넘어섰다. 보스턴 셀틱스는 식서스의 이러한 약점을 간파하고 NBA 10번째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1967년 식서스의 우승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향후 5년동안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가 리그를 지배할것이다"라고 전망했을만큼 식서스의 전력은 큰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1968년 시즌 팀 캐미스트리 붕괴이후,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팀의 기둥이었던 윌트 챔벌린 트레이드 감행하면서 최고의 구단에서 최악의 구단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길고 긴 암흑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윌트 챔벌린을 트레이드 하는 댓가로 LA 레이커스에게 3명의 롤 플레이어 (대럴 임호프, 제리 챔버스, 아치 클락) 를 받아왔는데, 이 트레이드는 역사상 최악의 불 공평한 트레이드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대럴 임호프는 윌트 챔벌린에게 한 경기 100점을 허용했던 선수인지라 더욱 어이가 없는 트레이드였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의 애널리스트인 필 재스너는 그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아마 구단주는 LA 팬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트레이드로 인해 LA는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우뚝 섰다"라고 밝혔다. 윌트 챔벌린 트레이드 이후 필라델피아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쳐가야만 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1972-73시즌 9승 73패를 기록하며 그 당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6년전 식서스가 NBA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던거에 비하면 윌트 챔벌린을 트레이드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의 경영진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잘 알수가 있다.
⑥ 줄리어스 어빙을 시작으로 식서스는 새로운 팀으로 거듭나고...
줄리어스 어빙의 영입을 시작으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새로운 강호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보스턴 셀틱스와 기나긴 악연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1976-77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뉴욕 넷츠에서 줄리어스 어빙을 영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시즌 MVP 였던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50승 32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및 애틀란틱 디비전 1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길고 긴 악연의 대상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와 8강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미래의 Sixer"인 모제스 말론이 버티는 휴스턴 로케츠를 시리즈 4-2로 제압한후 NBA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10년만에 진출한 파이널이었기에 필라델피아 팬들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자 최고의 순간이었다. NBA 파이널 상대는 빌 월튼이 버티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10년만에 우승 트로피를 거머쥘거라 예상했던 식서스는 내리 4연패를 당하며 결국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이듬해 1977-78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55승 27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워싱턴 뷸레츠에게 일격을 당해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했다. 필라델피아는 1978-80시즌 또다시 보스턴 셀틱스를 누르고 NBA Final에 진출했지만, NBA 특급 "매직 존슨"에게 막혀 LA 레이커스에게 시리즈 4-2로 패배했다. 특히 이 당시 식서스는 인사이드가 매우 취약해 카림 압둘자바가 버티는 레이커스를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웠다. 1981-82시즌에는 지구 라이벌인 보스턴에게 시리즈 3-1로 이기며 손쉽게 파이널에 진출할줄 알았지만 셀틱스에게 연달아 2번이나 일격을 당하며 시리즈 3-3으로 예전의 악목을 재현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식서스는 7차전에서 120-106 셀틱스를 제압했다. 4쿼터 2분여를 남기고 보스턴 가든에 운집해있던 셀틱스 팬들은 "BEAT LA"구호를 외치며 식서스의 파이널 진출을 축하해줬다. 길고긴 라이벌이자 오랫동안 친구였던 보스턴 셀틱스와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셀틱스 팬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때문에 우승을 못했던 식서스를 위해 우승을 기원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그들보다 인사이드가 견고한 LA 레이커스를 넘지못하고 3년 사이 2번이나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⑦ 정말 기다렸습니다. 1983년 우승.
1976년부터 82년까지 6년동안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NBA 파이널에 3번 진출해 3번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1982년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리그 최고의 리바운더이자 인사이더인 모제스 말론을 영입하게 된다. 1982-83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65승 17패를 기록하며 리그 전채 1위를 하게 된다. 그들은 짧게는 지난 7년동안, 길게는 지난 17년동안 서러웠던 No. 2자리의 한을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마음껏 풀어 헤친다. 1982-83년 식서스 멤버는 줄리어스 어빙을 비롯해 앤드류 토니, 모제스 말론, 바비 존스, 모리스 칙스등 역대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한 드림팀이었다. 모제스 말론은 그 해 시즌 MVP를 수상및 파이널 MVP까지 휩쓸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닉스를 스윕한후, 밀워키 벅스를 4-1로 이기며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리고 파이널에서 숙적 "LA 레이커스"와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시즌이 종료전 모제스 말론은 인터뷰를 통해, "Four Four Four"라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 뜻은 플레이오프 3 경기 모두 스윕하며 우승하겠다는 일종의 팬들과의 약속이었다. 비록 밀워키 벅스와 시리즈 4차전에서 아쉽게 패배하며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2승 1패를 기록했던 최강의 팀이었다. 2001년 LA 레이커스 (15승 1패) 에 의해 플레이오프 최고 승률은 깨졌지만, 역대 전무후무한 최강의 팀인 1983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그 당시 빌 러셀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 팀의 약점은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수비와 공격 모두 역대 최강입니다." 1983년 우승 이후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단 한 차례의 우승을 차지한적이 없다.
⑧ 늦게 맞춘 퍼즐.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스타 "찰스 버클리"
1983년의 우승으로 인해 식서스는 적어도 2~3년동안 다이너스티를 구축할줄 알았지만 줄리어스 어빙의 노쇄는 심각할정도로 빨리 진행되었다. 198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저지 넷츠에게 일격을 당하며 탈락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리고 1984년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찰스 버클리를 NBA 드래프트 전체 5순위로 지명하게 된다. 6-5의 작은 키로 포스트업이 가능했던 찰스 버클리는 줄리어스 어빙을 SG로 내리고 주전 SF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의 신장때문에 그의 기용면에서 많은 시도를 했었다. 버클리의 신장으로는 SG가 적합하지만 그의 플레이 성향등을 고려한다면 PF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결국 식서스가 찰스 버클리로 우승전력에 근접하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를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984-85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다시 한번 동부 컨퍼런스에 진출하지만, 래리 버드가 버티고 있는 보스턴 셀틱스에게 1-4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빌리 커닝햄 감독 대신 맷 구카스를 감독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노리는 식서스는 1986년 또 다시 최악의 트레이드를 감행하게 된다. 모제스 말론을 워싱턴 뷸리츠로 트레이드 시키며 새로운 롤 플레이어를 영입하게 된다. 찰스 버클리 중심의 팀으로 변화하기 위함이었으나 모제스 말론을 트레이드의 댓가로 얻어온 선수들 (로이 힌슨, 제프 루랜드, 클리프 로빈슨)이 식서스에서 3 시즌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1968년 윌트 챔벌린 트레이드 이후 최악의 트레이드로 남는 트레이드를 또 다시 식서스가 하게 된 것이다. 1987-88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36승 46패를 기록하며 1974-75시즌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 도중 구카스 감독은 경질당하고 코치였던 짐 라이넘이 감독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클리퍼스로부터 허쉬 허킨스를 영입하며 2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지만 뉴욕 닉스에게 1라운드에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1989-90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찰스 버클리가 MVP급 활약을 펼치며 애틀란틱 디비전 1위에 올랐지만 마이클 조던이 버티는 시카고 불스에게 2라운드에 패배했다. 계속되는 도전에 진저리가 났던 찰스 버클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일관하는 경영진에게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1992년 6월 17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그를 보내는 대신 제프 호네섹, 팀 페리, 앤드류 랭을 영입하게 된다.
⑨ 또 다시 찾아온 암흑기.
찰스 버클리를 트레이드하면서 1968년 이후 또 다시 기나긴 암흑기가 식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서스가 기대했던 제프 호네섹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2년만에 유타 재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1993-94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존 루카스를 감독겸 구단주로 올리게 된다. 식서스는 그의 열정적인 마인드를 높게 샀고 리빌딩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던 식서스 경영진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하지만 그는 2시즌동안 42승 122패를 기록하며 경질당하고 만다. 그리고 식서스는 리그내 최악의 구단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버리고 경영진이 기대했던거와 달리 암흑기는 너무나도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팀 전력 상승에 전혀 관계없는 스캇 윌리엄스, 찰스 스태클포드에게 거액을 주고 영입했으며, 또한 드레프트마다 뽑은 젊은 선수들이 뚜렷한 성장을 보이지 않아 결국엔 팀이 파산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1995-96년 컴캐스트 스펙테이터 사장이자 플라이어스 사장인 에드 스아니어가 세븐디식서스를 인수하게 되고 코어 스테이트 센터 (現 와코비아 센터)를 건립하게 된다. 그리고 팻 크로치를 사장으로 임명하며 5년 계획을 세우는데...
⑩ 앨렌 아이버슨 Era
1995년 NBA 드레프트 1라운드 3순위로 뽑은 제리 스택하우스가 제 2의 마이클 조던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공스런 시즌을 마감한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역시 새로운 회사에 매각되면서 1996년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고 있었다. 1996년 NBA Lottery에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운좋게 1라운드 1픽을 얻게 되고, 조지타운 대학교 출신 앨렌 아이버슨을 뽑는다. 앨렌 아이버슨과 제리 스택하우스 조화를 꿈꿔왔던 팻 크로치는 마지막 퍼즐인 래리 브라운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래리 브라운 집에 간다. 브라운은 필라델피아로 오는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경영진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에드 스나이더가 NHL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 하지만 팻 크로치는 래리 브라운 부인 생일날 깜짝 파티를 열어주면서 브라운 마음을 얻기 시작했다. 1996년 시즌 앨렌 아이버슨은 신인왕을 거머쥐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하지만 팻 크로치가 예상했던 앨렌 아이버슨 - 제리 스택하우스 환상의 조화는 조금씩 엇갈리고, 선수들은 롤과 관계없이 이기적인 플레이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1997년 래리 브라운은 식서스에 오자마자 제리 스택하우스를 트레이드 한다. 그리고 제리 스택하우스 대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애론 멕키, 티오 래틀리프를 얻어오고, 1998시즌에는 시애틀 수퍼소닉스에서 에릭 스노우를 영입하게 된다. 서서히 퍼즐을 맞추기 위해 래리 브라운은 스타급 선수를 처리하기 시작하고 앨렌 아이버슨의 원맨팀으로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팀에 비이기적인 선수들로 구성해야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1998-99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조지 린치와 맷 가이거를 영입하게 된다. 1998-99시즌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1991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센세이셔널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부 컨퍼런스 3위이자 앤퍼니 하더웨이가 버티는 올랜도 매직을 3-1로 물리치고 2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래리 브라운의 친정팀 인디애나 패이서스에게 4-0으로 스윕당하며 시즌을 마감해야만 했다.
⑪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2001
앨렌 아이버슨과 래리 브라운은 1999년과 2000년 오프시즌 두 차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앨렌 아이버슨은 99년 플레이오프를 통해 이미 NBA 수퍼스타 반열에 올라섰고, 그는 자신 스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종종 팀 연습 경기에 빠졌고, 감독및 코칭 스태프 의견은 무시했다. 래리 브라운은 이러한 앨렌 아이버슨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고, 구단에게 그를 트레이드 하겠다고 엄포를 했다.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 패이서스에게 4-2로 패하며 브라운의 불만은 결국 폭발했다. 앨렌 아이버슨과 그랜 힐간의 트레이드 설은 ESPN을 비롯해 미국 전 언론들의 해드라인을 장식했고, 아이버슨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결국 한동안 트레이드설로 위기에 내몰렸던 아이버슨은 2000년 오프시즌동안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한다. 그리고 2000-01시즌 시즌 개막과 함께 10연승을 기록한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2000-01시즌 56승 26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1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2년 연속 식서스의 발목을 잡았던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패이서스를 1라운드에서 3-1로 제압하며 2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2001년 플레이오프는 드라마틱한 경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빈스 카터의 토론토 랩터스를 만나 시리즈 4-3 힙겹게 승리했다. 특히 앨렌 아이버슨과 빈스 카터의 back to back 50점 기록은 마이클 조던 era 이후 최고의 흥행거리였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래이 앨런, 샘 카셀, 글렌 로빈슨이 버티는 밀워키 벅스를 만나 또 다시 7차전까지 접전을 치루게 된다. 결국 시리즈 4-3으로 물리치며 1983년 이후 처음으로 NBA 파이널 무대에 밟는다. 11승연승을 기록하는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는 레이커스를 만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앨렌 아이버슨의 엄청난 활약으로 1차전 승리를 기록한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이미 바닥이 난 식서스는 레이커스에게 4경기 연속으로 내줘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른다. 2000-01시즌 앨렌 아이버슨은 시즌 MVP를 거머쥐게 되고 또한 All-star MVP도 수상하게 된다. 또한 득점왕을 비롯해 1st team, 스틸왕을 기록하게 된다. 우승팀 레이커스보다 더욱 빛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하지만 그들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한 시즌만에 끝났다.
⑫ 계속되는 불화 그리고 결국 해체...
2001년 준우승 이후 식서스는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래리 브라운은 아이버슨에게 훈련을 통해 집중력및 점퍼실력 향상을 원했고 아이버슨은 래리 브라운의 그런 잔소리가 달갑지 않았다. 2003년을 끝으로 래리 브라운은 결국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2003년을 끝으로 식서스의 우승 재현은 결국 사라진다. 래리 브라운이 사임하면서 앨렌 아이버슨은 제 2의 공격옵션을 보강해 줄것을 구단에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글렌 로빈슨을 영입하게 된다. 최고의 미들 점퍼를 가지고 있던 글렌 로빈슨의 가세로 팀 공격이 좀 더 향상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2003-04시즌 식서스는 1999년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결국 글렌 로빈슨과 앨렌 아이버슨의 불화는 심각해졌고, 구단은 새로운 감독을 영입해 분위기 쇄신을 하려 노력했다. 필라델피아 출신인 짐 오브라이언을 감독으로 임명하며 8년간 수비적인 시스템을 공격적인 시스템으로 변환시킨 식서스는 2005년 2월 올스타 출신 파워 포워드 크리스 웨버를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영입하게 된다. 하지만 크리스 웨버의 영입은 앨렌 아이버슨의 트레이드 계기가 되었고, 필라델피아는 또 다시 리빌딩을 하게 된다. 결국 크리스 웨버마저 퇴출당하면서 식서스는 2006-07시즌 35승 47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그 다음시즌인 2006년 12월, 앨렌 아이버슨은 식서스 감독인 칙스에게 불만을 품었고, 결국 덴버로 트레이드 된다.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앨렌 아이버슨 트레이드 인해 언드레 밀러를 비롯해 조 스미스, 2장의 1라운드 픽을 덴버 너게츠로부터 얻었다.
⑬ 젊은 팀으로 거듭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10년간 팀의 기둥이었던 앨렌 아이버슨이 필라델피아를 떠나면서 그들을 응원했던 팬들 역시 세븐디식서스를 외면했다. 하지만 앨렌 아이버슨 대신 영입한 언드레 밀러는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며 2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2005년 1라운드 9픽으로 뽑은 언드레 이궈달라가 식서스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2007-08시즌이 시작하기 앞서 많은 전문가들은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가 NBA 전체 28위에서 30위 사이가 될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08년 2월 이후, 식서스는 언드레 밀러를 중심으로 새무얼 달렘베어, 언드레 이궈달라, 레지 에반스, 그리고 루이 윌리엄스의 대 활약으로 터프하며 열정적인 팀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40승 42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7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3년전에 만났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1라운드에 만난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창단 처음으로 디트로이트 홈 구장인 팰러스 오브 오번힐에서 첫 경기를 승리했으나 전력을 가다듬은 디트로이트에게 시리즈 2-4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2008년 오프시즌동안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는 앨렌 아이버슨 트레이드 이후 샐러리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치세 라인까지 대략 30밀정도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수퍼스타급 인사이더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NBA 최고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필라델피아 세븐디식서스. 1983년 이후 아직 우승 경험이 없지만, 필라델피아의 태양은 내일도 뜬다.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식서스. RUN WITH SIXERS 구호처럼 우리 모두 식서스와 함께 우승을 위해 달렸으면 한다. 저주가 우리의 길목을 막을지라도 우리의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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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야~ 재밌게 잘봤습니다..개인적으로 아직까지 이궈달라에게는 확실한 에이스보단 확실한 조력자에 모습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뭐 아직 성장중인 선수이니 지켜 봐야겠죠
돌프 셰이즈 -> 윌트 체임벌린 -> 줄리어스 어빙 -> 찰스 바클리 -> 앨런 아이버슨 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우승 3회라는 결실까지.... 글 잘 봤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정말 채임벌린의 트레이드가 왜 됏는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구잔주가 LA팬이였나보네요 정말 미친짓을 자주하네요 필리 구단주는 3대1 트레이드만 고집하는것 같네요 우스겟 소리입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체임벌린의 트레이드는 체임벌린과 구단주간의 오랜 갈등의 결과입니다. 식서스의 원구단주와 체임벌린은 거의 아버지-자식같은 관계로 더이상 친하기 힘든 사이었죠. 체임벌린은 원구단주가 자신에게 팀의 지분을 주겠다는 구두약속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원구단주가 죽고나서 다음 구단주는 어떤 문서로 된 증거도 없는 체임벌린의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체임벌린과 구단주 둘다 고집을 굽힐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둘의 사이는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했고 결국 체임벌린이 LA로 트레이드 요청을 했습니다.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체임벌린을 잃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구단주는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수 없이
트레이드를 한 것이죠. 이 때 상황이 체임벌린의 말을 들어주던가 그냥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체임벌린을 잃던가 둘중의 하나였거든요. 구단주라고 바보라서 그런 트레이드를 한 건 아닙니다.
체임벌린이 트레이드 된 이유는 식서스의 구단주가 LA의 팬이여서가 아니고, (1) 체임벌린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감독이었던 알렉스 해넘 씨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야만 했는데, 체임벌린은 그 감독이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썼었습니다. (2) 체임벌린은 호화롭고 화려한 생활을 원했습니다. 헐리우드만큼 그의 구미에 당기는 곳이 없었지요. (3) 체임벌린은 백인여성들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LA가 아니고서는 흑인이 마음놓고 백인과 즐길 수가 없었거든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체임벌린은 태업(?)까지 불사했고, 자신은 ABA 리그로 가겠다고까지 하며 으름짱을 놓았습니다. 식서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Timmy the Best님이 언급한 것처럼, 구단과의 불화가 컸습니다. 다시 말해서, 체임벌린의 레이커스로의 트레이드는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들에 의한 것이라는 거지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 정말 화려한 역사를 지닌 식서스네요. 개인적으로 닥터J 와 모제스말론이 함께 뛰던 시기를 가장 황금기라 부르고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 잘봤습니다. 필리팬으로써 몇번을 정독해도 부족함이 없는 글인듯 합니다. 거기에 주옥같은 답글들도 정말 좋네요.^^
좋은 글 잘봤습니다. 님의 제목처럼 76ers의 역사는 '찬란했지만' 그 찬란한 역사 사이사이로 긴 암흑기도 존재했군요. 몇번의 뻘짓 트레이드... 그리고 혹독한 시련 끝에 빛을 본 몇명의 프랜차이저와 NBA 타이틀... 항상 강한 팀이라 아니라서 그런지 더 정이가고 끌리네요
찰스바클리를..내준 필라델피아의 모습은 진짜..암흑기였다고 할수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