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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을 찾아(1)...홍제사,지족암
태백산 도솔암,홍제사...수행을 도와주는 것이 참된 불자.
그동안 순례나 답사랍시고 크고 작은 절집을 부산스럽게 찾아다니며, 내 식견과 경험의 부족함을 어설픈 사진과 얕은 알음알
이로 치장하고 감추며 사찰기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부지기수다. 사정이 이럼에도 욕계(慾界)의 4(天)인 도솔천(兜率天)의
참된 의미를 표방하고 추구하는 이 땅의 암자(도솔암:兜率庵)들을 찾아나선 것은, 그런 허물을 더 크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앞둔 어느날, 마음 속 심연(深淵)에서 맴돌기만 하던 '발심(發心)" 하나를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새순이 돋아난 따스한 봄날에 태백산 도솔암을 찾는 일이었다.
세간에 알려지거나 알음알음으로 알게된 몇 군데의 도솔암은 이미 다녀왔지만, 현대에 이르러 뛰어난 선승들의 치열한 구도
의 얼이 서린 태백산 도솔암(兜率庵)을 찾는 일이야말로 비로소 이 답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홍제사 입구
태백산 도솔암은 워낙 오지 중의 오지에 자리한 까닭에 태백산을 손바닥보듯하는 약초꾼이나, 앞서 암자에 계셨던 스님의 안
내 없이는 찾기가 어렵다는 말을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고로, 인터넷을 통하여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촬영된 사진들을 눈에 익히면서,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어 오매불망 그려오
던 일이 낭패를 보지않도록 나름대로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쓰러질듯한 한 칸 누옥 태백산 도솔암이 나같은 범부의 관심까지도 끌게된 연유는, 치열하고도 가혹한 선승들의 수행생활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자비의 현신이라 불리는 동곡당 일타 스님과 그의 상좌 혜국 스님을 두고 이름이다.
1954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000배씩 용맹정진 하던 26세의 일타 스님은, 생명을 다 바치더라도 반드시 깨우쳐 모든
번뇌를 여의리라 다짐하며 오른손 열두 마디를 촛불에 태워 부처님 전에 올리는, 인간의 인내로서는 불가사의한 연지공양(燃
指供養)을 했다.
그리고는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6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라는 3가지 수
행원칙을 세우고 목숨을 건 정진으로 일관했다.
15년이 지난 1969년 어느날 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매일 5,000배씩 두 번의 삼칠일(21일)에 걸쳐 기도를 드린 일타 스님의 상좌 혜국 스님은 스승이 그러했듯 그의 오른손가락 3
개를 불태우고 있었다. 새벽 1시에 연비를 마치고 장경각을 나서 홍류동계곡을 지날 즈음, 일타 스님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도
참았던 고통의 눈물인지 하늘을 울린 감동의 눈물인지 모를 비가 맑은 하늘에서 내렸다.
연비 소식을 접한 일타 스님은 제자가 겪었을 극심한 고통을 알기에 한동안 아무 음식도 들지 못했다.
타다 남은 손가락뼈를 대강 잘라내고 허물어진 살점을 꿰매고 붕대를 감은 채로 혜국 스님은 스승이 먼저 간 길 태백산 도솔
암을 찾았다.
도대체 이 세상에 어떤 힘이 그들의 한계를 알 수 없는 극한의 능력을 존재할 수 있도록 했을까...
그것은 오로지 부처가 가르친 깨달음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믿음 하나로 정진해온 그들의 지극한 불심이라밖에 더 설명할 길
이 없을 것 같다.
혜국 스님의 연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솔암은 혜국 스님의 상좌인 인묵 스님의 수행처였다.
3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의 치열한 구도의 열정은 변하지 않는 화석이 되어 송진처럼 맑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홍제사 법당내부
홍제사는 도솔암의 초입에 해당하는 경북 봉화군 소천면의 오지에 자리하고 있다. 소천면은 전국 최대의 메밀 생산지로 가을
이면 하얀 메밀꽃이 장관을 이루어 메밀꽃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도솔암 가는 길은 봉화 늦재에서 청옥산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도중에 내려서는 길과, 홍제사를 거쳐서 가는 길이 있다는 사전
지식을 습득한 터라 먼저 홍제사를 찾아 법당에 들러 예를 올렸다.
홍제사는 서암,지유,석주,일타 큰스님을 비롯한 한국 불교계의 큰스승들과 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전국비구니회 초대총
재를 지낸 원허당 인홍 스님, 성철 스님의 속가의 따님이신 불필 스님을 비롯한 성우,인성,현각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
한 유명한 수행처이다.
홍제사는 허름한 작은 인법당 한 채가 전부였으나 근래에 들어 요사체와 부속건물을 신축하였다.
도솔암에 기거하는 스님들의 수행을 돕기위해 큰집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그런데, 법당을 나와 도솔암 길을 찾으러 마당을 지나려는데 한 스님이 다급한 몸짓으로 함께 간 아내와 나를 불러세운다.
홍제사 주지라고 자신을 밝히신 도현 스님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가 도솔암임을 아시고는 방문을 극구 만류하신다.
심지어 조금 후에 나타난 공양주보살까지 가세하여 절대로 방문을 허용할 수 없다며 길을 가로 막는다.
먼 곳에서 새벽길을 달려왔느니,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니 이번 한 번만 허락해 달라며 통사정을 하였건만 요지부동이다.
그러기를 몇 차례, 너무도 완강한 태도에 나도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한다.
산불이나 상수원 오염방지 같은 출입을 금지시킬만한 공식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유지도 아닌 곳에 난 길을 따라
내 갈길 가겠다는데 왠 참견이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아내가 얼른 말을 뱉는다.
"스님, 죄송합니다.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바랍니다"하고는 내 팔을 잡아끌며 돌아가자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스님이 우리를 불러 세우시더니 "사실은 나도 먼 길 오신 처사님께 미안한 일인 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보고 욕을 하기도합니다. 도솔암이 근래에 인기를 끈 '하늘이 감춘 땅'이란 책에 소개된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분들의 왕래가 스님의 수행에 큰 방해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찾아온 사람들에게 도솔암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그분들은 참배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
랑삼아 책이나 인터넷으로 세상에 알립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외진 곳을 수행처로 삼아 공부해보겠다고 찾아온 스님의 수
행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참된 불교신자라면 스님의 수행을 도와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구구절절이 맞는 말에 대꾸할 말이 없다.
언젠가 빗장이 풀리는 그날까지 마음 속의 암자로 자리잡게하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태백산 도솔암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지족암...'꿈 깨라!'
태백산 도솔암(兜率庵)을 지척에 두고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아쉬움은 컸다.
태백산 도솔암은 일타 스님이 6년간 엄격한 수행원칙을 실천한 수행처로 알려지면서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곳이다.
일타 스님이 1976년 48세의 나이에 해인총림 율주로 돌아와 승속의 제자들을 제도하며 말년을 유유자적했던 지족암을 찾
기로 한 것은, 태백산 도솔암 참배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해인사 산내암자 안내석
승탑군(僧塔群)
지족암으로 가는 길 옆에는 세월을 두텁게 이고 선 승탑(僧塔)이 있다. 승탑에 새긴 글씨가 희미해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지족암 가는 길
왼쪽의 돌계단은 암자 입구로 가는 보행길이고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른쪽 시멘트포장도로는 차량의 통행로다.
요즈음은 왠만한 골짜기 암자에도 찻길이 나있어 예전에 비해 참배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세월의 흐름에 맞는 생활양식을 따르
는 일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절을 찾는 신도들이 편한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다보니 사찰측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땀과 수고가 결여된 열매는 그만큼 여물지 못하고 바라는 결과가 미흡해지기 쉬움을 간과해서도 안될 일이다.
지족암 입구
지족암은 신라말과 고려초에 걸쳐 살았던 희랑대사의 기도처로서 본디 이름은 도솔암이었다. 오래도록 터만 남아 있던 자리
에 조선시대 말엽에 이르러 철종 7년(1856)년에 추담대사가 창건하였는데, 뒤에 다시 고종 30년(1893)에 환운스님이 건물을
중건하면서 도솔(兜率)의 의역인 지족(知足)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년 이래, 일타 스님이 이곳에 주석하시면서 주변 건물을 정리하고, 법당을 새로 짓는 등 가람의 면모를 일신했다.
요사채
암자 앞으로 난 차량통행로를 따라 들어서니 최근에 새로 축조된 듯한 석축이 높게 자리하고 있다.
아직도 공사가 덜 끝난 건물은 스님들이 기거할 요사채라고 그곳에서 일하는 인부가 전한다.
높은 석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성벽처럼 높게 둘러처진 모습은 세상과 동떨어진 고집스런 느낌
도 주지만, 암자가 앉은 터가 좁은 급경사지대라 한 칸 넓이의 편평한 땅을 만드는데도 많은 수고가 따라야 함을 알 수 있다.
요사채의 두 석축사이에 가로 놓여진 검은 오석(烏石)의 비석은 독특한 필체의 글씨로 자기 존재를 나그네에게 알린다.
일타 스님의 친필,喫茶去來(끽다거래)
'끽다거래(喫茶去來)'다. 오른손 엄지 하나에 의지하여 쓴 일타 스님의 독특한 필체의 글씨다.
조주선사가 자신을 찾아온 선객들이 어떤 답을 하건 "차나 한 잔 마시게나(끽다거:喫茶去)"라고 하여 다선일매(茶禪一昧)의
경지를 표현한 글이다.
일타 스님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오른쪽 네 손가락 열 두마디를 소지하는 연비공양을 감행한 이후 6년간 태백산에서 홀로
치열한 결사를 마쳤음에도 언제나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더불어 경전공부와 책 읽기는 물론 차(茶)를 사랑하고 좋아하
는 마음은 조주의 끽다거를 ‘끽다거래’로 표현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갈 정도였다.
지족암 전경
세월은 모든 것을 바뀌게 한다. 산 속 외딴 암자라고해서 시류를 비껴갈 수는 없다. 그 세월만큼이나 지족암의 외형도 많이 바
뀌었다. 그것이 어디 지족암뿐이랴. 과정에 대한 평가는 늘 양면성을 갖게 마련이지만, 사찰의 대소불사가 유행처럼 번져 불과
서너해 전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사찰도 있다.
법당을 오르는 통로
원주실 옆으로 난 좁은 통로끝의 돌계단은 법당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다.
지족암의 전각들은 사진에서와 같이 전각 후면의 산쪽으로 바짝 붙여서 건물을
앉혔음에도 급경사지의 좁은 터라 마당은 좁고 석축은 높다.
대몽각전(大夢覺殿) 측면
통로계단을 오르면 먼저 만나는 것은 법당의 측면이다. 좁은 전면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된다.
법당현판인 ‘대몽각전’(大夢覺殿)은 일타 스님의 친필이다. ‘대몽각(大夢覺)’은 세상사 꿈인 것을 깨달아 소욕지족(小慾知足)
의 삶을 즐기는 수행자로 하루 빨리 거듭나라는 교훈이다.
다시말해 헛된 꿈을 깨라는 말이다. 중생들에게 보내는 소박하면서도 지엄한 삶의 메세지다.
대몽각전(大夢覺殿) 정면
대몽각전(大夢覺殿)의 주련(柱聯)은 금강경 사구게(金剛經 四句偈)를 발췌해 걸어 놓았다.
凡 所 有 相 皆 是 虛 妄(범 소 유 상 개 시 허 망)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만약 겉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만약 겉모양으로 부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온갖 모양으로 드러난 법은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같이 관할지니라
대몽각전 내부
대몽각전은 일타 스님이 1985년에 신축한 법당이다. 본래 산신각이 있던 자리에 20평 규모로 지은 것이라한다.
불상의 위치도 전각의 정면이 아닌 측면에 모셔져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왼쪽에 반가사유상의 미륵보살이,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이 협시불로 있다.
진영각(眞影閣)
진영각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소박하면서 단청을 올리지 않은 말끔한 전각은 자비롭고 맑은 일타 스님을 연상케 한다.
네 기둥에 걸린 주련은 일타 스님의 열반송이다.
一天白日露眞心 (일천백일노진심)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萬里淸風彈古琴 (만리청풍탄고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구나
生死涅槃曾是夢 (생사열반증시몽) 생사열반 이 모두가 오히려 꿈이러니
山高海闊不相侵 (산고해활부상침)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침범하지 않네
진영각 내부
일타 스님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 내부는 단아하면서도 깔끔하여 군더더기가 없다. 일생을 오로지 구도의 열정으로 살다간
선승의 삶이 맑은 향기가 되어 머물러 있다.
진영각에서 바라본 요사채
지족암의 당우
대몽각전은 맞배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 진영각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진영각 난간에 서면 가까이에는 희랑대가 멀리로는 가야산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매화산의 남산제일봉이 왼쪽에 보인다.
희랑대(希郞臺)
지족암에서는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희랑대가 있다.
희랑대는 통일신라말기 희랑대사의 수도처로서 주변의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으로 유명한 곳이다.
저 담으로 무엇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바람을 막을 것인가 도둑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남의 시선을 막아 그것으로부터 자유
로워질 것인가. 지족(知足)하여 자족(自足)하면 막음이 아니라 통함이 되고 단절이 아니라 소통과 화합의 인연이 켜켜이 쌓여
질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족의 삶이고 그것이 곧 도솔천이라는 가르침을 배우고 암자를
떠난다.
동곡당(東谷堂 ) 일타(日陀) 스님의 사리탑과 비
해인사 일주문 가기 전 오른쪽에 있는 비림(碑林)의 성철 스님 사리탑 바로 아래에 일타 스님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일타 스님 사리탑은 석종형의 사리탑 양식의 조형물로 제작됐으며 사각형의 탑신은 전통적인 선을 현대적 감성으로 단순화하
면서도 세련미가 넘치고 비석은 꽃구름으로 장식돼 있다.
사리탑 내 사리장엄구에는 일타 스님의 사리 37과가 봉안됐고 사리탑과 비에는 '傳持祖印通達三藏廣化衆生東谷堂日陀大宗師'
(전지조인통달삼장광화중생동곡당일타대종사)라는 비명과 스님의 행장,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지은 비문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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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쓴 사람은 시서화에 능한 석도 유형재(兪衡在)다. 그는 일타 스님의 행장을 떠올리며 지극정성을 다해 비문을 썼다. 모두 3,637자의 비문을 한 글자 쓰고 세 번 절하는 일자삼배 (一字三拜)를 했으니 1만911배를 했다. 그렇게 쓰는데 스무아흐레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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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사진작가 주명덕의 '해인사의 네 큰스님'
대선지식이 함께 한 이런 모습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왼쪽부터 일타 스님, 현 종정이신 법전 스님, 성철 스님, 10대 종정을 지내신 혜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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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너머님~
태백산 도솔암에 대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3대에 걸친 선승들의 치열하고 가혹한 수도생활에 존경의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도솔암 방문하시면 꼭 다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익한 정보 함께 얻어갑니다,
송천님~늘 자주오셔서 좋은 글 주시어 고맙습니다()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것 같습니다.^^*
이심전심, 염화시중을 함께하는 글입니다()
태백산 도솔암에 수행하신 일타, 혜국, 인묵 큰스님으로 이어지는 한국 간화선의 맥이 이어지고 있네요,
지족암은 해인사를 들러 갔다왔습니다()
일타스님의 열반송~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구나'
넘 멋집니다()
해인사를 환하게 밝히신 4분의 고승대덕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세상너머님~마음 담긴 글과 사진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