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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레갑인을 배웁시다(렘35:1-11)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켜가며 살아가기가 정말 힘든 시대입니다. 시대가 악하다보니 세상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경건하게 신앙생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발광을 합니다. 주일날은 간신히 교회와서 죄악의 홍수로부터 잠깐동안 보호를 받는 것 같으나 불과 몇 시간이 지나면 세상의 더러운 죄악의 홍수 속에서 시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험한 이 세상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켜가며 믿음 생활하는 성도들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야김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을 배반함으로서 바벨론이 직접 쳐들어오지 않고 주변의 나라들을 보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유다에는 유목생활을 하던 레갑족속들이 있었는데 전쟁을 피해 예루살렘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척이나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갑인들의 경건한 생활은 현대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들의 믿음은 얼마나 싸구려 신앙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부끄러운 충격만 더 할 뿐입니다. 그래서 레갑인들의 경건한 모습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경건한 삶을 칭찬하셨습니다(18-1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대비하시어 경고하시는 반면교사로 레갑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모든 성도들도 레갑인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레갑인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임받는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유다백성들은 도리어 책망과 재앙을 선포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말도 잘 듣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레갑인의 신앙적인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레갑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레갑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입니다. 이들은 원래 겐 족속이라고도 합니다(대상 2:55). 겐 족속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따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찌꺼기들을 주워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이들은 가나안의 가장 척박한 땅 유다의 황무지에서 그 백성중에 거하게 되었습니다(삿1:16).
그러던 중 유다에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피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레갑인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이상한 주문을 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의 신실한 정신을 유다백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던 유목 족속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조상 요나답은 어떤 사람일까요? 요나답(왕하10:15-24)은 BC 9세기 이스라엘왕 예후와 함께 가나안의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 신을 제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만 섬기는게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된 풍습을 좇아 살지 말라고 자기 후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한 극단적인 처방이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사역하던 시기는 유다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죄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젖어 태만하게 신앙생활을 했으며 선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어쩔수 없이 레갑인들의 경건생활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불순종을 고발하시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의 반열에 들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앞에 신실했던 레갑 족속의 실례를 들어 유다 백성들의 죄악상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인을 초청하여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시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에도 없는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문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그들의 신앙적인 삶을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유대인들에게 자랑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감을 가지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포도주로 유혹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레갑인들을 통해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1)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6절)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레갑인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참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초청하여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이유는 자기들의 선조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자손손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포도주를 평생에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많은 성도들이 포도주 한 두잔 마시는 것이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합니다. 알기로는 노골적으로 마시는 성도들이 상상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변명합니다. 가끔씩은 그런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결코 그런 것들이 우리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가볍게 여길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을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못된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도 마음대로 뜯었다가 붙입니다. 성경에 더하고 빼기를 자기 멋대로 합니다. 그러면서 말이 많습니다. 일종의 자기변명과 합리화입니다. 우리가 포도주를 한 두잔 마셨다해서 타락하고 마시지 않는다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포도주를 마신다고해서 구원받을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는 포도주와 술에 관한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별히 포도주에 관한 기사가 많습니다. 포도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기도 하고 진노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잘 쓰면 약이요, 잘못 쓰면 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술은 세상문화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 레위기 23장13절에 전제라는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용하는 포도주는 알콜이 아니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딤전5:23). 물론 이 때 사용하는 포도주는 당시에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약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악용합니다. 자기들의 입장에 맞는 말로 교묘하게 각색을 해서 이용합니다. 매우 간사한 생각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하게 포도주를 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기서 10장 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에게“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특히 나실인에게는 절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민6:3-4).
신명기 29장6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예 포도주를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잠23:31). 이유는 포도주가 사람을 거만케 하기 때문입니다(잠20:1). 또한 포도가 뱀같이 물기 때문이요 독사같이 쏘기 때문입니다(잠23:32). 포도주를 마시면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이며 마음이 망령된 것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주가 나중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되고 맙니다(계17:2). 한마디로 포도주가 주는 해악이 심각하기 때문에 금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포도주를 주어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바벨론 궁중에서 제공하는 최고급 포도주를 절대 거부했습니다(단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습니다. 잠간의 고통이라도 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받기조차 거절하십니다.
구약의 나실인들도 마시지 않습니다. 나실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 시대에 구별되어진 주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 사람들 역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실 것 같으면 우리에게 왜 마시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마시면 좋지 않기 때문에 마시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기 입장에 맞게 각색을 하고 악용을 합니다. 사실 이 작은 계명 하나가 많은 크리스천들을 넘어뜨리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계명 하나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계명을 깨뜨리는 단초로 사용되고 있어도 마시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영적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보다 크고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안하는 것입니다. 포도주 한잔 마셨다해서 금방 우리가 죽게 되고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붕괴되는 일은 절대 큰 것으로 인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노골적으로 교회를 흔들거나 예수님을 핍박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소홀하게 생각되는 작은 것을 허용함으로 인하여 우리 신앙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을 타고 악한 물이 들어옵니다. 조금씩 새어드는 물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양심의 거대한 둑을 무너뜨립니다.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안마시고는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변명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더 잘 압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지 술 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술이 없으면 비즈니스가 안되고 인간관계가 안된다고 변명합니다. 중고생들도 쉽게 술을 사서 마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강제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문화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자꾸만 술을 권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중에 기독교를 공격할 때 그런 것들을 가지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슬금슬금 빠져듭니다. 결국은 그들의 함정에 완전히 빠져들고 맙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술은 세상문화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세상문화를 거절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 없이 포도주를 거부해야 합니다.
레갑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포도주 시험앞에서 전혀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그들만의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포도주 한잔으로 자신들의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념을 무너뜨리지 도 않았습니다. 레갑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향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향기가 없으니까 그들이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는 레갑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2)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7절상)
세상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경건을 방해하고 유혹합니다. 성도의 생명력이 경건함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죄많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롬12:2).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것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보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누리는 것, 즐기는 것 등등 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거룩을 훼방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문화가 우리 믿는 성도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이라는 공간을 떠나서 살수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로마서 12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죄악된 세상에 동화되어 버릴 수도 있고, 오히려 더러운 세상을 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경건한 삶의 행실에 달려 있습니다. 똑같은 물속에 들어가도 닭은 빠져서 발버둥을 치고 난리지만 오리는 빠지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안방처럼 즐기고 다닙니다. 얼마든지 우리에게는 더러운 세상에서 자기를 오염시키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믿음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7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들은 세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짓지도 않았고 파종도 하지 않으며 포도원도 재배치 않고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면 이들이 염세주의자들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그들은 게으른 자도 아니요, 그들은 염세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신앙적 가치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들은 이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아무래도 집을 짓고 파종을 하며 포도원을 개간하다보면 땅에 것에 대한 욕심이 자라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기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유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 생겨서 죄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 있는 소유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아무래도 농경의 신 바알의 우상에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하게 될 것이고 젖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농경사회의 정착생활을 거부함으로 인해 더 이상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이 세상적인 탐욕이나 안일을 거부한 것은 분명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큰 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적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욕심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고 죄를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 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로 발전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신앙의 대적인 것입니다. 아무래도 세상 것에 집착하다보면 누구든지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심으로 발전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그것 때문에 레갑인들은 세상의 소유를 거절한 것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정신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들의 신앙적인 순결함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욕심없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방해하는 또 다른 대적은 안일함입니다. 안일함은 우리 신앙을 은밀하게 무너뜨립니다. 안일함의 쉬운 표현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정말 우리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아주 간사한 죄악입니다. 성도는 게으름을 버려야 합니다. 레갑인들은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파종을 하게 되면 정착하게 되어 안주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안하겠다고 서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도 그 땅에서 정착하여 살면 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삶의 안락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영원한 것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영원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 세상의 화려한 모든 것을 미련없이 내려놓는 위대한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말 아까운 것이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영이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고 싶은 의도를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신앙적인 모습을 극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버려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깝지만 내려놓아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갑인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절대적으로 우리는 레갑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해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믿음의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레갑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3)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7절중)
우리가 레갑인을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장막생활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장막에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정착지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생스러운 장막생활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장막은 요지부동의 거처가 아닙니다. 장막은 유동적인 거처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생활은 무척 불편합니다. 피곤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생활입니다. 누가 그런 생활을 좋아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합니다. 장막생활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생활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처소에 대한 미련이나 소유에 집착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곳에 안주할 수도 없습니다. 게으를 수도 없습니다. 항상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어디로든지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망설임이 없이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장막생활은 나그네 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사명자의 생활과도 같습니다. 나그네와 사명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항상 개나리 봇짐하나만 짊어지고 떠나야 하는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요, 사명자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와 사명자는 짐을 많이 가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짐을 다 풀지도 않습니다. 마치 군대의 5분대기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장막생활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다못해 이사 다니는 것이 싫어서 무리하게 빚을내서라도 집을 사고 장만을 하는 세대가 아닙니까? 장막생활은 그런 생활을 거절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더욱 위대한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두 나라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속은 하나님의 나라지만 사는 처소는 세상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나라입니다. 일시적이고 허무적이며 변화무쌍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나라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 속한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 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 것으로 인해 영원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세상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맞다 틀리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영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즐겨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들을 존중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네 인생자체가 장막인생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이 땅에서 장막인생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20절에 보면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장막 인생을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도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가나안땅에 들어간 후에 장막생활을 했습니다(창12:8). 그의 아들 이삭도 장막생활을 했으며, 야곱도 장막생활을 했습니다(히11:9). 이유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11:10).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대로 장막절을 지켰습니다(레위기23:42-43). 장막절을 지킨 이유는 이 땅은 임시처소지만 우리가 들어갈 본향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지킵니다. 며칠간의 시간을 정해 지키는 장막절은 경험적으로 가능하지만 평생을 장막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레갑인들이 평생토록 장막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적인 결단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레갑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갈수록 우리 믿음을 지켜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갑인들의 신앙적인 삶의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충격과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변질되어 간다할지라도 우리는 레갑인들을 배워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그들의 고고한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경건한 삶의 행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영원을 사모하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들의 성경적 신앙만큼은 절대 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레갑인을 배웁시다. 할렐루야!!!(201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