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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7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마태오 23,23-26
그릇보다 음식이 중요하다는 말이 그릇이 더러워도 된다는 뜻인가?
어제 저희 성당 어떤 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내서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신부님 강론을 들었습니다.
바로 십일조로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한 달 적자가 600만 원, 십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음에도 십일조를 내어 주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때가 되어서도 적자가 흑자로 바뀌었고 매년 1억 이상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다른 곳에 분점을 계약하고 왔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이제 가톨릭교회에서는 더는 십일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 신자들이 더 평균 재산이 많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멀리서 온 편지를 받고 유산을 받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협곡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려면 수백 미터는 내려갔다가 다시 수백 미터를 올라와야 합니다.
도중에 뱀도 만날 수 있고 물살이 센 개울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계곡들에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 같이 안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다리는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 다리마다 거의 피가 묻은 글씨로 나무 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를 믿어라. 보기엔 위험해 보여도 실제로는 아래로 가는 길이 훨씬 위험하단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며 다리를 마련해 놓았다.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지만, 제발 한 번이라도 시험해 보려무나.
나는 이것을 만들다가 많은 피를 흘려 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단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
아버지를 굳게 믿은 자녀들은 다리를 건너서 아버지께 빨리 이르러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를 믿지 않은 아들들은 계곡을 건너다 떠내려가거나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간신이 도착한 아들들은 이미 잔치가 마무리되는 때였고 자신들의 몰골이 심하게 구겨져서 감히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보살핌을 믿고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이것만큼 믿음이 증가할 도구는 없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 그리고 구약의 맨 마지막 방금 읽은 말라키서까지.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십일조 계명을 버리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복음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게”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해봅시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계명은 낙타입니다. 낙타를 삼키면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벌레들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요? 벌레는 여기서 십일조를 의미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작은 것을 걸러내면서 큰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책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일조는 그러면 그릇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릇이 필요하고, 또 그릇을 닦는 이유는 그 안의 것들을 맛있게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매우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는다면 그릇이 필요 없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되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십일조의 의도를 알고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의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릇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위선일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7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1테살로니카 2,9-13
마태오 23,27-32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이른바 삯꾼들,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거짓 지도자들이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으니, 입으로는 사랑이니 봉사니 거품을 물며 외쳐대지만,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궂은 일 한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론대 위에서는 갖은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구체적인 삶은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가르침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 겉과 속에 철저히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그들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과부들의 궁핍함을 덜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등쳐먹고 호의호식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타하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런 면에서 ‘목자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가 보여준 표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구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석상에서 명확히 밝히기까지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테살로니카 1서 2장 9절)
바오로 사도는 그 부담스럽고 바쁜 복음 선포의 길에서도 신자들에게 손톱만큼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천막 짜는 일을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곳 저 곳 젖먹이 같은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밤늦도록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가는 곳마다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달려드는 적대자들과 맞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온몸은 파김치처럼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동료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고생 많다며 한잔 가득 포도주를 따라주며 회포를 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기도했으며, 언행에 있어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밤에도 대낮처럼 품위 있게 처신했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 (테살로니카 1서 2장 10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강론>
(2024. 8. 27. 화)(마태 23,23-26)
(성녀 모니카 기념일)
<위선자가 안 되려면 끊임없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3-26).”
1) 위선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도행전 5장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연상됩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재산을 교회에 바친 일은, 당시의 신자들이 한 일을 따라 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4-35).”
당시 교회 공동체는 ‘영적’으로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물질적’으로는 ‘공동 소유’를 실천하면서,
글자 그대로 공동체를(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 일은 누가 강요한 일이 아니라, 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재산을 모두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재산을 모두 봉헌하는 것은 아까워했습니다.
<‘명예욕’에도 사로잡히고, 물질에 대한 ‘탐욕’에도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산의 ‘일부만’ 봉헌하면서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 부부가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만 듣고서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훌륭한 일을 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위선’입니다.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들 마음속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순간에는, 적어도 그 잠깐 동안에는 만족했을 것이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고, 그 순간에는 죄의식 같은 것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위선이 위험한 것은, 위선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감에 빠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두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고, 그들이 한 짓을 알아보았습니다.
<누가 고자질한 것은 아니고, 성령께서 알려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니아스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도 5,3-4).”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명예욕이나 탐욕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려고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위선이 큰 죄가 되는 것은, 감히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속을 모두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위선이라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나쁜 욕망부터 다스려야 하는데, 그게 누구에게나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8-25ㄱ).”
사실 스스로 원해서 위선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못된 욕망에 빠져서, 또는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됩니다.
위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