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水仙花)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한 떨기 겨울의 정령인가 송이송이 둥글다
그윽하고 담백한 성품은 차갑게 빼어났다네
매화가 고상타지만 뜨락을 못 벗어나는데
맑은 물에서 제대로 본 해탈한 신선이여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이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꽃은 같은 꽃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보는 때에 따라
달라지는 법. 추사는 24세가 되던 해 중국 연경에서 수선화를 처음 본다. 장원
급제 하여 기고만장한 젊은 수재였던 추사는 자만심과 나르시시즘의 꽃 수선화
를 귀한 꽃으로 좋아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50대 중년으로 제주도에 유배당한
추사는 그곳에서 수선화를 다시 본다. 밭두렁과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이 꽃은
천덕꾸러기로 우마(牛馬)의 먹이였다. 추사는 이곳에서 다시 자신의 분신으로 수
선화를 노래했다. 나르시시즘의 꽃 수선화는 제주에서 알아주는 사람 없이 잡
초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추사는 수선화와 자신을 해탈한 신선으로 동일시하
고 있다.
[작가소개]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 : 시ㆍ서ㆍ화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
출생 – 사망 : 1786년(정조 10년) ~ 1856년(철종 7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이다.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도 갖고 있다. 아버지 노경(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그가 태어난 향저(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천재성이 그의 인생에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드리우고 있음을 노재상이 알아본 것이다. 그가 살다간 19세기 조선 사회는 18세기의 진경문화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 문화의 보편성으로 흡수해야 하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 시ㆍ서ㆍ화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정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