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감각
김광섭
여명(黎明)의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현대문학>(1967)-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상징적
◆ 표현 : 의식의 세계와 죽음의 그림자가 여러 사물을 통하여 구상화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여명 → 밤의 절망에서 아침의 희망으로의 전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부활'의
시간적 출발점에 해당함.
* 1연 → 청각과 시각의 표현을 통해 생명의 부활을 감각적으로 환기시켜 줌.
* 2연 →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제시함.
공동체적 삶에서는 상대적으로 서로의 의미가 드러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개체로서의 생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깨달음을 제시해 줌.
*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 병고로 쓰러졌을 때,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낌.
*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 아픔이 끝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됨.
* 가슴에 뼈가 서지 못했다 → 삶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왕성하게 회복되지 못함.
* 푸른빛은 장마에 /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 생의 의미에 대해 허무와 절망을 느끼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함.
* 깨진 하늘, 장마, 흐린 강물 →
* 무너지는 둑 → '절망의 끝'을 상징.
* 채송화 →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투병 체험 속에서, 화자에게 생명의식을
환기시켜주는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함. '소생과 부활의 생명 의식'
◆ 제재 : 생의 감각
◆ 주제 : 생명의 신비로운 부활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다시 깨어난 첫 새벽에 느끼는 삶의 감각
◆ 2연 :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깨달음
◆ 3연 : 죽음의 체험에서 겪은 절망감
◆ 4연 : 극적인 소생의 과정 회상(절망의 극복과 강렬한 삶의 의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다시 소생한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이다. 여기서 '생의 감각'이란, 생에 대한 자각인 '부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시에는 인생론적인 면과 소생 과정의 극적인 면이 동시에 수용되고 있다.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투병 체험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생명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동사에 나타난 시제를 유심히 살펴보면 1연과 2연에서는 현재형 시제가 사용되었으나 3연에서는 과거형 시제가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3연의 내용은 병마에 시달렸던 지난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슭에 피어 있는 채송화가 '나'에게 생의 감각을 흔들어주었다는 것은, 채송화가 '나'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존재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소개]
김광섭[ 金珖燮 ]
호 : 이산(怡山)
출생 – 사망 : 1904년 ~ 1977년
성격 : 시인, 독립운동가
출신지 : 함경북도 경성군
성별 : 남
본관 : 전주(全州)
저서(작품) : 김광섭시전집, 개 있는 풍경, 시원, 고독, 동경, 초추
대표관직(경력) :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정의>
광복 이후 『마음』,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시전집』 등을 저술한 시인.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이산(怡山). 함경북도 경성 출신. 아버지는 김인준(金寅濬)이며, 3남3녀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7년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옮겨 1924년에 졸업했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와 친교를 맺었으며, 이어 정인섭(鄭寅燮)과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하였다.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문화 및 정치의 표면에서 활동하였다. 중앙문화협회의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주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만들어 위원장직을 맡고, 『자유문학(自由文學)』지를 발행했다. 그가 문학에 뜻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이헌구와 교분을 맺으면서부터인데,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우리 나라 학생 동창회지인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했다.
1933년 『삼천리(三千里)』에 「현대영길리시단(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 발표했고, 같은 해 시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평론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동아일보』(1933.10.2.)에 발표했다.
이어서 1934년 『문학(文學)』에 「수필문학고(隨筆文學考)」, 『조선문학(朝鮮文學)』에 「현대영문학에의 조선적 관심(朝鮮的關心)」을 발표하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들어선 것은 1935년 『시원(詩苑)』에 「고독(孤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좌절과 절망을 읊은 것이었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동경(憧憬)」·「초추(初秋)」 등이 있는데,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한 고독·불안·허무의식이 배경이 된 것들이었다. 1937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 연극운동에 가담하면서 서항석(徐恒錫)·함대훈(咸大勳)·모윤숙(毛允淑)·노천명(盧天命) 등과 교유했다.
1938년 제1시집 『동경(憧憬)』을 간행했다. 광복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해 창작과 단체활동을 병행했다. 이 무렵의 시로는 「속박과 해방」·「민족의 제전」 등이 있는데, 광복의 환희와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 계도적인 민족주의 문학론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경향신문』에 「정치의식과 문학의 기본이념」(1946), 『민주일보』에 「문학의 당면 임무」(1946), 『만세보(萬歲報)』에 「민족문학의 방향」(1947), 『백민(白民)』에 「민족문학을 위하여」(1948)·「민족주의 정신과 문학인의 건국운동」(1949)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론(時論)들은 그의 시정신과 동일한 맥락을 이루는 것이었다. 1949년에 간행된 제2시집 『마음』과 1957년에 간행된 제3시집 『해바라기』의 시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 시편들이었다.
작품 「마음」은 맑은 물과 백조의 조응을 통하여 한 생명의 실상을 읊은 것이고, 「해바라기」는 높은 이념을 해로써 상징하고 민족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후기의 작품들은 1966년에 간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1971년 간행된 『반응(反應)』에 수록되었는데 전자에서는 병상에서 터득한 인생·자연·문명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1960년대의 시대적 비리도 비판하였고, 후자는 사회성을 띤 시들로서 1970년대 산업사회의 모순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의 시편들은 관념이 예술적으로 세련, 승화되어 관조와 각성의 원숙경을 보여준다. 그는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 문명의 괴리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시킨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 저서로는 『김광섭시전집』(1974)과 번역시 『서정시집(抒情詩集)』(1958)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문화공보부예술상, 같은 해 국민훈장모란장, 1974년에는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김광섭론」(김현승, 『창작과 비평』, 1969.봄호)
「김광섭론」(정태용, 『현대문학』, 1967.4.)
[네이버 지식백과] 김광섭 [金珖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