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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는 의로움 경험하라
로마서 3장21절 / 차명권 목사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여 영광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이 왜 타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의로움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장 13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사단은 높이, 높이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까지 자기의 자리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고자 했습니다. 선과 악의 판단 주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자기 의가 높아졌는지 모릅니다. 사단이 사람을 타락시키고 죄에 속박시키려고 할 때도 이렇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움을 의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의존하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율법도 자기 의의 한 형태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알게 되면 지키려고 합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삼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항상 저주 아래에 있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 즉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악한 죄입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바로 자기 의였습니다. 이브가 아담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이브가 차라리 아담을 죽였다면, 혹은 아담이 이브를 죽였다면, 우리는 그래 살인이라는 것이 가장 악한 죄야, 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 근원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훔치는 것도 아니고, 부도덕한 행위를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한 죄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타락한 것과 같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즉 자기 의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업적을 무효화했던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노력과 업적으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받고 누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자기 의를 발동시켜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의 의존적 행동은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표시입니다. 나 스스로 방어할거야, 나 스스로 처리할거야, 내 안에 선이 있고, 내 안에 나의 의로움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의로움을 나의 의로움에 둘 때, 인간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만들고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끝입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측의 공로로 의롭게 만드는 분이 되고자 하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으로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나만 옳다, 그리고 강한 척 했던 것 내려놓고, 나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또한 인정하는 것이요.
욥기 1장에 보면 욥은 매일 아침마다 반복해서 계속했던 것이 있습니다. 욥기 1장 5절입니다.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이 자녀들의 번제까지 철저히 드린 것은 욥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다 이루심 가운데 안식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너무나 죄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그 형벌이 자기에까지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잘 보시면 욥은 자기를 위해서 번제를 드린 부분이 없습니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자기 의의 삶입니까. 즉, 자녀들은 죄를 짓더라도, 나는 안 짓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의가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각종 두려움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파괴시키고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더 깊은 뿌리는 정죄함이고, 자기 의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죄의 근원인 자기 의를 의존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죄감을 느끼는 순간, 마음속에 정죄함이 드는 순간, 우리는 자기 의로 노력해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떤 형태든, 어떤 방법이든 자기 의를 추구해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두려움이 생겼고, 그 두려움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욥에게는 강렬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지어 죽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계속 두려워하다가 종교적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게 아니라 두려움으로 드린 번제였습니다. 죄는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사하심은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못 보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횡행해왔습니다. 죄를 고백하면서도 죄 사함은 확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는 이미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믿음 위에 서서, 어떤 정죄함과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죄를 다스리기 위해 하는 고백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사람은 종교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강한 척 하는거죠. 내가 판단자인 척 하는거에요. 기독교적인 여러 행동마저도 자기 의를 위해서 합니다. 자기가 쌓아왔던 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해온 것을 기준 삼아 타인을 속박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 아래에는 자기 의가 있고,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의 영혼은 늘 두려움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러면 또 종교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 쉬지 못하는 영혼입니다. 나의 의가 먼지와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나의 의로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행위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의롭게 하신 게 아니라, 주님의 거룩하심 안에 우리를 두시고 계속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거룩하다고 하심으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병행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빚어가시는 원리와 같습니다. 율법은 다르죠. 아직 의롭지 않으니까 율법지킴과 나의 의를 발휘하여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어떻게 죄 많고 비참한 나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만드셨습니까? 그렇게 실제로 질문해 보세요. 그 질문이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다른 이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 많고 비참한 나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만드셨나요?”
이 질문입니다. 아담으로 타락의 시작은 이브라는 타인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다면, 분명 복음에서 멀어져 있고, 자기 의가 다시 차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완벽함을 지키시면서도 비참한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만드셨나요?
바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값을 찾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찾았다면 확신이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몸값을 찾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방법을 찾아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속죄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 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의롭다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로운 자로 서면 길을 잃게 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면서 스스로 오만해지거나 내 명성이나 지위나 노력을 자랑하거나, 반대로 자기를 정죄하여 스스로 비참하게 여기거나 나는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둘 다 나 자신의 의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전자는 내가 이루고 가진 것이 중심이고, 후자는 내가 못 이루고 가지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새로운 자신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을 나의 새로운 자아이자 자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심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예수를 통해 너를 볼 것이다. 너의 선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함이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 나의 선함의 작고 많음이 아니라, 복음은 예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가 아무리 커도 은혜를 막지 못합니다. 지금 죄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트라우마에 속박된 자가 있다면 이 복음을 믿으세요. 아무리 죄가 커도 은혜를 막지 못한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성경에는 한 집단만은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가로막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면 사라집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멈추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바래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고, 그들을 향한 은혜가 멈춘 것은 그들의 자기 의 때문이었습니다. 내 의를 믿는 순간,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따위는 필요없어요. 나는 선하니까, 그런 태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한 번 구원을 받고서 다시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분리를 경험하고, 은혜에서 멀어져 쓴뿌리 가운데 영적 침체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 도망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는 자가 되는 이유를 뭐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죄를 지은 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죄를 지은 자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죄가 있는 곳에 더욱 큰 은혜가 임합니다. 정작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드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기 의를 의지하면, 믿음이 역사하는 것을 막아섭니다. 그러나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면, 믿음이 역사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2-13절입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는 저주 받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무슨 말입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의 저주 가운데에서 살리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믿음은 서로 반대입니다. 율법은 믿음이 아닌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내 행위를 중시하고 의지하면 믿음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영은 무엇입니까? 믿고 말하고, 믿고 말하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영입니다. 영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행위라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행위의 열매가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맺힐지를 또한 판단하지 마십시오. 죽기 전에 맺힐 수도 있고, 죽기 전에 육신의 안목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맺히고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도 보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에 포착되지 않는 겨자씨 한 알의 행위의 맺힘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입니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를 보면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의심하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단어가 디아크리노 입니다.
디아크리노의 첫 번째 뜻은 차이를 두다입니다. 영어로는 make difference입니다. 산을 향하여 바다에 던지라 라고 말하는 것과, 시들어가는 식물에게 말하는 것에 차이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기는 기도하면서, 큰 질병이 오면 어렵다고 말하며 차이를 두지 말하는 것입니다. 감기가 오면 걱정도 별로 안 하는데, 큰 병이 오면 걱정과 두려움에 평안을 잃어버리고, 선포하는 것에 차이를 두고 맙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큰 병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차이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는 감기보다 큰 질병이 더 치료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문제가 커 보일수록 더 쉽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한 곳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다른 곳에서는 칠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보리빵 다섯 개가 필요했지만, 칠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그보다 작은 빵 네 개면 충분했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더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문제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을 알고, 그분이 누구신지에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의심하다, 라고 번역된 디아크리노의 두 번째 의미는 정죄함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디아의 뜻은 무엇을 통하여, 라는 뜻이고, 크리노는 심판하다, 정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디아크리노 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은, 마음에 정죄함을 가지지 말고, 믿음으로 말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할 때, 그 안에서 정죄함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가로 막는 것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로 인한 정죄함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모든 정죄함에서 해방되고, 그 결코 정죄함 없는 믿음,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자유함의 영으로 믿고 말하여,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를 누리는 영의 사람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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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8).
감사합니다.
💖아무도 알수 없는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질수 있는것 같아요. 오늘 하루도 즐거운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