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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
전두환, 직선제 수용 건의에 “노태우를 설득하라, 특명이다”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2007.06.01 통권 573 호 (p194 ~ 205) |
● 6·29는 ‘항복’ 아니라 ‘결단’과 ‘수용’ ● 6·10항쟁 현장에서 확인한 민심…“직선제밖에 없다” ● 안기부장, 당 사무총장 “직선제? 쓸데없는 소리” ● 군·경찰·청와대, 1987년 6·14 계엄령 논의 회동 ● 군부는 직선제 개헌 반대 쿠데타 기획 ● 6월18일, 목 내놓고 직선제 수용 건의 보고서 올려 ● 고도의 정치공학 “김대중 풀어놓으면 직선제 해도 이긴다” |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으로 1987년 6월을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6·10민주항쟁인가, 아니면 6·29선언인가를 물으면 그 대답은 일치하지 않는다. 1987년 당시, 거리에서 ‘호헌(護憲)철폐’를 외친 사람들은 당연히 6·10민주항쟁을 민주화의 시발이라고 말한다. 반면, 시위로 점철된 혼란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정권은 6·29선언이 기점이라고 주장한다. 5공화국의 실세들에게 6·10민주항쟁은 아직도 ‘소요사태’로 통용된다. 그들에겐 6·29선언이 ‘용기 있는 결단’이자 ‘구국의 선택’이다. 그 중심에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金容甲·71) 의원(한나라당)이 있었다. 김 의원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1980~85)을 거쳐 1986년 1월 청와대 민정수석이 됐고, 1987년 6월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의 사면복권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6·29선언을 탄생시키는 데 동참한 게 더없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5월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김 의원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6·29선언에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5·6공의 도덕성 문제 때문에 6·29정신이 훼손되고 잊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6·29선언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김 의원은 오는 6월29일 6·29선언 20주년을 맞이해 재평가 세미나를 마련할 계획이다.
6·29선언의 의미 “누가 뭐래도 6·29선언은 민주화의 분수령이자 밑거름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시발점이었지요. 대통령 직선제, 정치금지법 폐지, 정치인의 사면복권, 지방자치제 도입, 언론의 완전한 자유 보장 등 현재의 정치적 기반이 모두 그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 6·29선언의 주역이 누구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요. “누가 주도했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단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제대로 평가하는 게 중요해요. 네가 했다, 내가 했다 공을 다툴 게 아니라 제대로 올바른 평가를 받자는 겁니다.” 직접 표현은 안 했지만 김 의원은 박철언 전 의원(6·29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을 겨냥한 듯했다. 박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6·29선언의 주역인 것처럼 써놓았기 때문이다. 박 전 의원은 6·29선언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없다. 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과 이종찬 전 의원도 6·29선언을 적극 추진했던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6·29선언의 실질적 주역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6·29선언에 동참한 데 대한 자부심이 무척 큰 것 같습니다.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참모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요. 거기에 동참했던 한 사람으로서 영광스럽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6·29선언이 왜곡 또는 왜소 평가되거나 무시당하며 잊히는 게 안타깝습니다. 5·6공 수구 꼴통이라고 할까봐 지금껏 제대로 말을 못했는데 20주년이 되면서 욕을 먹어도 평가는 제대로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6·29선언 20주년 세미나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정치사적으로 6·29가 민주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집중 조명할 생각입니다.” ▼ 6·29선언은 국민의 저항에 부딪힌 군사정권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 아닌가요.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쪽에서는 ‘항복’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처지에서 본다면 전두환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과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이자 대표위원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결연한 수용,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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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결국 국민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삼선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했지만 전 대통령은 그럴 마음이 애초에 없었죠. 국민은 믿지 않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불신을 늘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어차피 대통령은 물려줘야 하고 그렇게 하기로 한 이상 국민의 요구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에서 이기면 더없이 좋고,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그렇게 권력을 인계한 뒤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역사 물꼬 튼 ‘민심동향 보고’
▼ 직선제 수용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대통령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위에 대한) 해결방법이 여럿 있었죠.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평화롭게 수습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그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청와대와 민정당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역사는 늘 선택의 연속 아닙니까. 국민의 요구를 정책적 대안으로 선택하는 용기,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 ‘여러 방법’에는 무력진압도 포함됐습니까.
“계엄령, 쿠데타, 국민투표안, 직선제 총선 연계안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1987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의원은 6월민주항쟁의 발단을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개헌논의 허용에서 찾았다. 1985년 중순부터 시작된 개헌논의는 김대중씨 가택연금, 정치활동 중단 등 정치관련 금지법의 서슬이 퍼런 가운데 재야단체와 야당 일각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6년 1월 개헌논의가 합법화하자 직선제 국민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박철언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86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국회를 해산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
“1987년 6월 ‘소요’는 1986년부터 예고됐습니다. 개헌논의에 불이 붙은 게 그 때니까요. 1986년 1월14일 민정수석으로 임명됐고 그해 4월24일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민심(民心) 동향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무렵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차 유럽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야당에서 개헌논의를 시작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현장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대전 실내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당시 야당 총재이던 이민우씨가 나왔고 김영삼씨가 고문으로 참가했죠. 2만여 명이 모인 거대 집회였습니다. 개헌과 관련한 집회나 논의가 일절 금지돼 있을 때였죠. 전 대통령과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를 추진하려 했고, 야당과 재야에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습니다. 대통령에게 1시간에 걸쳐 특별 동향보고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민정수석이 야당의 집회에 몰래 간 것에 놀라 ‘이거 큰 사건이군, 잡히면 큰일인데’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때 와이프와 함께 갔는데, 30분 만에 못 나오면 경찰에 신고하라 하고 들어갔죠.”
▼ 동향보고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군중집회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면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아예 대통령 직선제 개헌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대통령이 평소 같으면 ‘네가 뭘 알아’라고 나무라고 끝냈을 터인데 민정수석이 집회 현장을 다녀온 것에 쇼크를 받았는지 ‘그래 알았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인 4월30일 개헌논의를 공식화하는 담화가 발표됐지요. 현장 상황을 캐치한 제 판단을 대통령이 믿은 겁니다.”
박종철 사건, 청와대도 속았다?
▼ 그로부터 1년 후에 4·13 호헌 조치가 나왔는데요.
“개헌논의 허용 이후 격렬한 싸움이 계속됐죠. 정부와 여당은 내각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야당과 재야에서는 직선제를 하자고 연일 집회를 하니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년의 시간만 흘려보낸 것이죠. 대통령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4·13 호헌 조치 발표는 당시 정무1수석이던 김윤환씨 소관이었습니다. 저는 민심 동향보고만 충실하게 했습니다.
발표 이전에 내부적으로 개헌논의를 했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7년 3월14일 개헌논의 중단을 발표하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곧이어 4·13 호헌 조치가 나왔고요. 결과적으로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대(對)정부 투쟁에 불을 지피게 됐지만 청와대로서는 1987년 말 대통령선거 일정이 있으니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후보 지명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6월 초 민정당의 건의를 대통령이 수렴하는 식으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는 계획을 짜놓고 있었습니다.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6월10일로 잡혀 있었는데, 그 무렵 공교롭게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죠. 이 두 사건이 합쳐지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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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군이 고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까.
“저는 민정수석으로 민심 동향 파악이 주업무였고, 경찰과 행정파트는 강우혁 정무2수석 소관이었습니다. 강 수석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군이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보고하길래 제가 ‘어이 강 수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나무랐죠. 정치 담당이던 김윤환 정무1수석과 박영수 비서실장 등 모두들 못 믿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경찰의 보고는 초등학교 학생도 못 믿는다’고 했죠. 강 수석도 ‘나도 못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경찰에서 그렇게 우기는데’라며 답답해했습니다. 박군 사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직감했습니다. 취조과정에서 쇼크사했거나, 실수를 했거나 뭐 뻔한 것 아닙니까.”
▼ 당시 수사를 맡은 안상수 검사는 박군 고문치사 은폐가 청와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내가 아는 한 청와대의 지시는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보고라고 나무랐고, 정확한 사인(死因)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겠지만, 담당 수석비서관인 강우혁 수석 자신이 펄펄 뛰고 그랬는데 그게 감춘다고 감춰질 일인가요. 깊숙하게는 모르지만 안기부가 어떻게 연관됐다는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고. 결국 경찰의 뒤를 봐주다 문제가 생겨 장세동 안기부장이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죠.”
“계엄령은 절대 안 된다”
▼ 전국적 시위가 있었던 6월10일 상황을 들려주시죠.
“6월10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치러지고 있을 즈음 저는 시위가 한창이던 서울 시내에 있었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죠. 최루탄 무서운 줄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김옥조 민정비서관(전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비롯한 민정비서실 식구 20여 명 전부가 종로, 명동, 시청 앞에 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봤는데, 명동의 다방에도 들어가고 지나가는 행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아,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구나. 민심을 다시 회복하려면 대단히 어렵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그날 모종의 결심을 했죠.”
▼ 경찰이 명동성당 포위를 푼 것도 김 의원의 작품이라고 하던데요.
“10일 밤 경찰이 명동성당을 원천봉쇄했는데 3000여 명이 성당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죠. 다음날인 11일 아침 경찰에 통보하지 않고 명동성당에 들어가봤더니 농성자 대부분이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뒤편으로 통로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지휘부에 안을 냈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농성 학생이 빠져나가고 200여 명만 남았습니다. 제가 성당 안에서 빠져나오자 경찰이 그때서야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군요.”
▼ ‘모종의 결심’이란 게 뭡니까.
“국민의 여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지요. 결심을 굳히고 6월12일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을 만나러 롯데호텔로 갔습니다.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중에 저는 ‘직선제를 받아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직접화법을 선택한 것이죠. 그랬더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장난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한 줄 안 모양이에요. 그날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 당시 정권 핵심부에선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던 겁니까.
“6월14일 청와대 녹지원에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무·공보수석, 군 수뇌부, 치안관계 장관 등이 모였습니다. 일요일인데도 전 대통령이 이들을 급히 불러 모은 것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어요. 전 대통령은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생각만 있었을 뿐, ‘계엄령’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치안본부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 김 의원은 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쪽(병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라인에 있지 않았죠. 어쨌든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회의는 이미 끝났다고 해서 급히 비서실장과 공보수석, 정무1, 2수석을 불러서 비서실 입구 조그만 방에서 제 복안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방법을 바꾸는 게 좋겠다, 우선 절대로 계엄령을 선포해서는 안 된다, 그건 수습이 아니라 정국 혼란을 확산시키는 방책이다, 그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것을 받아주자, 일단 받아주고 최선을 다하면, 즉 국민의 진정성을 이해하면 충분히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수석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모두 다 어리둥절했죠.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단하고 직선제 안 한다고 했는데 참모라는 사람이 반대로 이야기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박영수 비서실장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메모를 해줬죠. 후일에 알았지만, 박 실장은 제 의견을 대통령에게 귀띔한 모양입니다.”
김윤환의 3개 정국수습안
▼ 사실 정국의 해법을 찾는 것은 민정수석의 몫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민심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게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수석회의 다음날인 6월15일 김윤환 정무1수석을 찾아갔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물었죠. 당신에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요. 김 수석은 세 가지 방안이 있다고 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직선제 수용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 대통령선거를 한 후 13대 총선(88년 1월) 결과에 따라 내각제냐 직선제냐 선택하는 방안, 4·13 호헌 조치 자체를 당장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이었습니다. 이들 안은 결국 민정당의 안과 같았죠.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당시 상황으로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김 수석에게 ‘이걸 안이라고 내놨습니까. 내가 들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국민이 이해하겠어요? 이대로 하면 결국 지게 됩니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쏘아붙였죠. 그러고는 ‘그러지 말고 직선제 받아주지요, (선거에)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대중씨 가택연금 해제와 정치인 사면 복권도 같이 하자며 제 복안을 다시 설명했지요. 그랬더니 김윤환씨는 ‘전통(全統)이 내각제를 하자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합니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겠습니까’라고 맞받아쳤습니다. 그래서 ‘방울은 내가 달겠습니다. 일단 내가 전통에게 이야기할 테니 김 수석을 불러서 이야기하면 지원을 해 주소’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윤환씨는 그후 6·29선언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김용갑이한테 물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 그래서 어떻게 ‘방울’을 달았습니까.
“설득 끝에 김윤환 수석도 ‘전 대통령만 납득시키면 그 방법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박영수 실장은 이미 공감을 표했고. 그래서 김옥조 민정비서관에게 대통령에게 설명할 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했지요. ‘4·13 후유증 극복을 위한 근본 대책 검토’가 그것인데, 지금 보면 제목이 좀 촌스럽지요? 김 비서관은 지시를 받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고요. 저는 ‘아니야, 이 방법 밖에 없어. 받아들일지 말지는 대통령의 선택이야’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김 비서관은 제 생각을 틀로 해서 공식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보고서를 지금도 갖고 있냐는 질문에 김 의원은 “보고서는 없지만, 당시 상황을 매일 깨알같이 적어놓은 노트가 있다”고 했다. 노트를 공개할 수 있냐고 묻자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 노트에서 필요한 내용을 발췌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다
▼ 민정당 노태우 후보 캠프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6월16일 낮 12시10분 청와대 인근 식당에서 노태우 캠프에 있던 민정당 의원들을 만났습니다. 현홍주, 유홍수…. 최병렬씨가 그때 있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제 생각을 말했더니 유홍수 의원은 아무 말도 안하고 현홍주 의원은 ‘대통령이 받아줄지가 걱정이다. 일단 이에 대해선 보안을 유지하자’고 하곤 헤어졌습니다. 그쪽도 별 대안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죠.
그런데 민정당 의원들을 만나기 전날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민방위훈련이 있는 15일이라 청와대 수석들이 평소처럼 지하 벙커에 내려가 훈련을 하고 있는데 전 대통령이 거기로 내려왔어요. 그러더니 ‘민정수석, 너 말이야, 미리 겁 먹고 시시한 보고나 하고 말이야… 앞으로 그런 보고는 하지마’ 하고 딱 지목해서 기합을 주는 거예요.
전 대통령이 평소 저를 무척 신뢰했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김 비서관이 만든 대책 문건을 아직 보고하지도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박영수 실장에게 써준 메모가 전해졌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 부분은 아직도 의문입니다. ‘앞으로 민심 동향 보고 하지마’란 대통령의 꾸지람에 일단 ‘예’라고 대답하고 저 혼자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곤 ‘이 문제에 대해선 내 목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보고서 올릴 준비를 했습니다.”
▼ 직선제 수용에 대한 공식 보고는 언제 했습니까.
“6월17일 대통령에게 특별면담을 신청해놓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그날은 대통령의 일정이 꽉 차 있어 못 했습니다. 이튿날 면담을 했죠. 6월18일 오전 9시20분. 첫마디가 ‘각하, 1시간 정도 걸리겠습니다’였죠. 제가 전 대통령에게 불쑥 남은 임기를 묻자 대통령은 당황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각하, 지금 임기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8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지금 그 시간 안에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단의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지금 상태에선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민심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만 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 해결책은 국민의 요구대로 수용하는 것뿐입니다. 국민과 야당이 직선제를 원하니 그들의 요구를 일단 들어준 후에 최선을 다해 싸우고, 지면 깨끗하게 정권을 이양하고 야당 하면 됩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을 수 있습니다. 무리하게 수습하다 실패하면 이승만 대통령 때처럼 어려워집니다. 각하가 보안사령관 시절 사무실에 걸어둔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문구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다 던지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 설명을 하자 대통령은 듣고만 있었습니다.”
▼ 전두환 대통령과 무척 가까웠나봅니다. 그런 보고를 다 하고….
“전 대통령이 소령 때 제가 중위로 알고 지냈고, 안기부장대행 시절 안기부 기조실장을 했으니까 인연은 있지요.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현장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고할 때는 정신없이 했습니다. 참모의 임무를 다했을 뿐이죠. 당시 정보 보고는 안기부와 경찰의 보고를 짜깁기한 것인데,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대통령에게 ‘땡전 뉴스’에 대해서도 말했고, 전경환씨를 되도록 빨리 잘라야 한다고도 보고했습니다.
당시는 정말 너무 심했죠. KAL기 추락사건으로 269명이 죽었는데 방송의 저녁 9시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이 새마을 청소하는 게 나올 정도였죠. 영부인도 너무 자주 나왔고. 그래서 국민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후 공보수석에게 시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여론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양반이 기분은 나쁜 게 분명한데 저를 끝까지 데리고 있었습니다. 후일 백담사에 갔을 때 그러더군요. ‘바른말 한 사람은 김용갑밖에 없다’고.”
노태우 캠프와 안기부의 반발
▼ 다시 대통령 면담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 대통령이 김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직선제 수용과 함께 김대중씨의 연금을 풀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시킨 뒤 정부는 선거의 공정한 심판자로 남자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정국이 불안하니 안정을 바라는 국민도 많을 것이고, 최선을 다하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지요. 실패한다고 하면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 대통령이 말을 끊으며 ‘야 그러면 니 지금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설명해라. 특명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분 성격 급한 것은 모두가 알죠.”
▼ ‘대통령이 다 됐다’고 생각했던 노태우 민정당 대선후보의 반응이 냉랭했을 것 같은데요.
“회의를 하던 노 대표에게 전 대통령의 특명임을 전하고 조그마한 회의실 옆방에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양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내가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160만 당원에게 내각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갑자기 말을 바꾸겠냐, 힘들다’고 했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지요. 노 대표는 ‘안무혁 안기부장과 안기부장 특보 박철언, 이춘구 사무총장과 상의해서 하겠다’고 말한 후에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어요.
민정당사에서 나오는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안가(安家)로 바로 가라는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대통령이 벌써 그곳에 안기부장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불러놓았다는 거예요. 갔더니 식사가 준비돼 있었는데 육사 동기생인 안현태 청와대 경호실장이 먼저 와서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대충 설명한 뒤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두 사람 모두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먼저 자기들에게 상의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어요.
내가 안기부장이었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습니다. 이춘구 총장도 당에서 내각제를 추진한 책임자로서 황당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죠. 일단 미안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그들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참모로서 아이디어를 준 것뿐이다. 결단은 대통령이 내린다. 그러면 당신들에겐 다른 수습방안이 있는가’ 하고 물었죠. 저는 이 방법 외에는 쾌도난마식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했죠. 서로 옥신각신하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습니다. 경호실장은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가버렸고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제가 절충안을 냈습니다. 그쪽에선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청와대에선 김옥조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실무 책임자로 해서 계속 의논하자고요.”
전-노 합의 돌파구 뚫은 원로 회합
▼ 내부적으로 꽤 진통이 심했군요.
“다음날인 19일, 다시 대통령을 찾았습니다. 오후 2시20분이었습니다. ‘각하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다른 방법을 아무리 써도 안 됩니다. 만일 지금 계엄령을 내리면 국민은 탱크 위에 올라탈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민심이반 현상이 심각합니다’고 말하자 대통령은 ‘노 대표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었어요. 저는 차마 ‘어둡다, 부정적이다’라고 할 수가 없어 그냥 ‘검토 중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저녁 노 대표와 스케줄 잡아’라고 지시했어요.
그날 저녁 두 분이 어디선가 만찬을 하며 논의를 한 모양입니다. 이튿날인 20일 아침 대통령이 집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저를 찾았습니다. 전날 밤 노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더군요. ‘충분히 이야기했는데 직선제는 어렵지 않겠냐고 하더라. 정치 지도자의 정치 노선이 왔다갔다하면 되겠냐고 하던데…’라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대통령이 뭔가 헷갈려 하는 것 같아 바로 받아쳤죠. ‘아니, 각하 지금 나라가 망하는데 정치 노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나라를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또 금방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렇지. 지금 정치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지’라고 했습니다. 대통령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거죠.”
▼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쿠데타를 기획한 집단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중 누군가가 제게 그 이야기를 해주길래 뜯어말렸지요. 그들은 직선제를 수용한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차마 말을 못했지요. 일파만파의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설득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뒷수습은 제가 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병력을 동원해 장군들을 잡아들이겠어요?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 정말 역사의 죄인이 될 뻔했습니다. 당시에 나의 설득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
“국가 원로들의 의견을 듣자고 제안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원로와 김영삼씨도 만났죠. 6월22일에는 노태우 대표가 김영삼씨를 만났습니다. 모양새를 갖추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후 청와대와 노태우 캠프 간에 합의가 이뤄지고, 6월26일 선언문 초안이 작성됐습니다. 선언문 발표자가 노태우 후보였으니까 선언문은 그쪽에서 만드는 게 당연했지요. 초안은 노 대표가 박철언에게 작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철언은 당시 법무부에서 청와대에 파견돼 비서관을 맏고있던 강재섭 검사(현 한나라당 대표)에게 실무를 맡겼지요. 최근 강재섭 대표에게 확인했더니 자기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작성했다고 하더군요.”
격정의 눈물과 회한
▼ 6·29선언에 김대중씨의 사면 복권이 들어간 것은 대선 때 야당 표를 분산시키려는 포석이었나요.
“우리가 보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씨 간에 절대로 후보 단일화 합의가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뭐, 되면 할 수 없고…하는 심정이었지요. ‘김영삼씨만 대선에 나가면 위험하다.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을 풀어줘야 한다’고 대통령께 보고한 것도 사실이고요. 정치공학적인 계산이 다 있었던 것이지요.”
▼ 6·29선언을 노태우 정권의 군부독재 연장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의 완충작용을 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말입니다. 물태우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민주화 과정에서 통제가 어려우니 나온 말일 테고요. 여소야대 국면에서도 6·29선언의 공약을 다 지켰지 않습니까. 이후에 김영삼씨도 대통령이 됐고 김대중씨도 대통령이 됐습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다 알 겁니다. 일부 386 의원들도 6·29선언이 민주화의 시작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 6·29선언 20주년을 앞둔 감회가 남다르겠군요.
“1987년 6월29일, 6·29선언이 있던 그날 저는 반포 집 근처의 한강변을 뛰고 있었습니다. 제 할 일은 다했으니까요. 혼자 만세를 불렀습니다.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지요. 저는 오늘도 그때처럼 10km를 뛰고 나왔습니다. 아직도 제 가슴엔 그날의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6·29의 의미가 퇴색하고 잊히는 게 안타깝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에 밑거름이 됐는데도 수구 꼴통이라는 말이나 듣고 있으니…. 사실 저는 국가보안법이나 안보 문제에 대해서만 그렇지, 다른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플렉시블합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개혁적이었던 만큼 지금도 개혁적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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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
“토론보다 선동의 시대, 군 나섰어도 온몸 던졌을 것”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2007.06.01 통권 573 호 (p182 ~ 193) |
● 분노로 가득 찬 국민…용기만 있으면 됐다 ● 87년 5월, “6월에 잽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자” ● 명동성당 농성, 이한열 죽음이 6월항쟁 장기화 두 축 ● 全 정권 군 동원 가능성?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 수도” ● 6·29선언 직후 ‘정권 꼼수에 말려들었다’ 지도부 책임론 제기 ●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수십만 시민…“그러나 선배들은 없었다” ● 87년 전대협의 ‘DJ 비판적 지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 노무현 정권의 失政, 386 탓으로 매도하지 마라 |
열린우리당 이인영(李仁榮·43) 의원이 건네준 명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건 e메일 주소였다. ‘liy1987@kuro.or.kr’. 이름 이니셜(liy) 뒤의 네 자리 숫자. 그에게 1987년은 그렇게 특별할 수밖에 없다. 1987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그는 그해 5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으로 선출돼 6·10항쟁의 전위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 초대 의장을 맡았다. 정확히 하자면 그는 ‘6·10항쟁’이 아닌 ‘6월항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야 맞다. 6월10일에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심과 학생운동 조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당국은 서대협 의장인 그를 6월1일 체포했다. 그는 6월10일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수송차량의 작은 창틈으로 시청 앞에 모인 군중의 성난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6월17일 ‘구속취소’라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 전개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세상은 그렇게 긴박하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목청 높아지고, 손짓 강렬해지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대학을 다닌 기자로선 일개 대학 총학생회장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을지 사실 좀 회의적이다. 그러나 1987년 당시 고려대에 다닌 동료 기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인영 의원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학생들 앞에 서면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의 손짓에, 그의 외침에 학생들은 응어리진 분노를 터뜨리고, 용기로 무장했다. 이 의원은 20년 전 자신의 모습이 개인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됐다기보다, 그 시절이 그를 비롯한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전사가 되도록 부추겼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슴속에 사회 정의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데 대한 분노,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학살자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였으니까요. 정서적, 정신적 공유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나 토론이 아니었어요. 왜 나가야 하는지를 설득하기보다, 용기를 내도록 선동하는 게 필요했죠. 그래서 목청이 높아지고, 손짓이 강렬해지고…. 제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과 사람들 가슴속 분노를 터뜨리는 건 일치된 과정이었지, 사람들에게 없는 분노를 심는 게 아니었어요. 의식을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용기를 터뜨리는 과정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필요했을 뿐, 저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 의원은 충북 충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재수 끝에 1984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를 뒤따라 교사가 되거나, 운 좋게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돼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봄이 채 저물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지 깨닫는다. 당시 대학은 민주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었기에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는 그에게도 금세 전이됐다. ‘언더서클’에 가입해 활동했고, 3학년 2학기 때 과 학생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년 가을, 비공개 서클 활동이 점차 공개 활동으로 전환하는 흐름을 탔다.
혈서 유세 1986년 10·28 건국대 사태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언더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 의원이 이듬해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 의원은 당초 총학생회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조직 내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친구가 학점 미달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고, 조직은 그에게 출마를 권유했다. 선거를 30여 일 앞둔 2월 중순이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조직의 오더’ ‘사명’ ‘헌신’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또 총학생회장이 폼 나는 자리가 아니라 ‘징역 가는 길’이었으니 뺄 일도 아니었고요. 그게 옳고, 집단적 의사결정이 그렇다면 그대로 따라야 했죠.” |
그에게 오더를 내린 언더서클의 정체는 ‘나중에 알고 보니’ 고려대 기독학생회 비공개 서클이었다. 언더서클 활동이 대개 그렇듯 그도 처음엔 어떤 간판이 달렸는지 모르고 들어가 활동했다.
조직의 결정과 함께, 그도 마음을 굳히고 충주 집에 내려갔다. 그의 결심에 놀란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형에게 당장 휴학계를 써갖고 내려오라 호통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는 독했죠. 그게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줄 알면서도 군사독재와의 싸움이 우선이라, 부모와 가족을 뒤로 하고 뛰어들었죠. 그게 ‘더 큰 어머니’ 조국에 대해 아들 노릇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다음 날 새벽 서울로 올라와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고려대 서창캠퍼스 혈서 유세는 그의 독한 구석을 보여준다.
“고려대 안암캠퍼스와 서창캠퍼스 간에 학력고사 성적, 학생에 대한 대우 차이가 컸음에도 총학생회를 단일하게 구성했는데, 서창캠퍼스 학생들 불만이 컸어요. 선거 때만 되면 우르르 몰려와 ‘우리는 하나다’고 외치는데, 자신들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죠. ‘또 표 달라고 왔냐’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어요. 운동권의 정의를 놓고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학생운동이 핑계가 됐든, 타성에 젖어서이든 어쨌든 노력을 안 한 거죠. 그런 점들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어요. 제 진심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못 찾겠더라고요. 당초 준비했던 원고를 찢어버리고 혈서를 썼죠. ‘서창 민주화 투쟁 만세’라고. 그런데 그럴듯하게 가공하진 못했어요. 면도칼로 그어야 피가 잘 나온다는데, 이로 깨물어서 하려니까 피도 잘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그걸로 진심이 통하긴 했어요.”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
그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지만 결국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창캠퍼스 발전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1987년 정치 투쟁이 워낙 긴박하게 진행된 탓이지만, 어쨌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분명했다. 이 의원은 “혈서를 썼을 당시 학생들이 표구해 걸어뒀는데, 2~3년 뒤에 가보았을 땐 액자가 없었다. 그게 그들의 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을 때만 해도 6월항쟁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까.
“1987년이 워낙 중요한 시기라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대회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어요. 군사정권은 정권을 재창출해 자신들의 군사독재 기반을 재편하려 했고, 학생운동세력으로선 그에 대응하는 총공세를 퍼부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정권을 세워야 했으니까요. 물론 6월항쟁이라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거나 성공을 예단했던 건 아니죠. 이길 거라 생각해서 싸운 게 아니었어요. 다만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였죠.
대회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미 각성한 사람들만으로 투쟁하는 건 동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문화적, 정서적으로 유도해야 했죠. 3월 총학생회 선거, 4~5월 대학 축제 등을 통해 참여 기반을 넓히고, 대중적 역량을 쌓아올리는 정도는 목적의식을 갖고 계획했어요. 총학생회 투쟁위원회 100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1만명의 결의를 모으는 게 더 힘을 발휘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고려대에서는 매년 4월18일에 4·19탑까지 마라톤을 하는데, 거기에 1만명 이상이 참여하면 그 합법적 공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독재타도, 호헌(護憲)철폐’ 함성이 비합법적 공간에서 500, 600명이 외치는 것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합법적이고, 최대한 대중적인 방법을 고민했죠.”
▼ 5월에 서대협을 결성한 것은 대회전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학생운동세력이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 대회전의 기반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4월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 선언을 했습니다. 온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 불이 붙고 있는데, 개헌 논의가 무의미하다며 호헌 선언을 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려고 하니 민심이 들끓었죠. 1월에 박종철 물고문치사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훼손됐는데, 4월13일에 정치적 정통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선언이 나오니까 분노가 끓어오를 수밖에요. 4월19일 수도권 30여 개 대학이 연합집회를 하고, 5월 초에 각 대학 학생회장이 모여서 학생회장 협의체를 구성해 대학간 연대의 틀을 공식화하자면서 서대협을 만들었죠.”
▼ 그후 서대협 의장에 선출됐는데,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넘어온 겁니까.
“전체 학생운동의 리더 노릇은 서울대가 주로 해왔어요. 대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팸플릿을 통해 창출하고 제공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6년 들어 서울대 운동권이 자민투, 민민투로 나눠지고, 자민투가 친북 성향을 띤다고 매도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조직이 많이 파괴됐습니다. 5월3일 인천에서 직선제 개헌 대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연세대 지도부도 역량이 절반 정도 파괴되고, 10월28일 건국대 투쟁에서 나머지 역량마저 대부분 사라지고 말죠. 그 결과 고대의 지도부 역량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았어요. 또 다른 이유는, 학생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 대한 주도적 권위 못지않게 분열을 넘어선 대단결을 통해 의기로, 용기로 뚫어 나가는 것도 필요한데, 그런 면은 고대가 강했어요. 언더서클이 동아리나 총학생회 활동을 배후조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노선으로 전환해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형태로 학생운동을 이어갔죠. 그런 것들이 학생운동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어요. 보통은 총학생회장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언더서클의 ‘대빵’이 따로 있게 마련인데, 고대는 그런 걸 없애버려 어떤 의미에선 제가 막강한 총학생회장이 된 거죠.”
6월은 징검다리, 9월이 귀착점
4·13 호헌 선언은 메마른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고,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 폭로였다.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기념 추모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박종철 사건의 범인이 경찰 고위층에 의해 축소 조작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확인된다. 1월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처음 알려진 뒤, 2·7 박종철군 추도집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했던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즉각 6월10일에 전국 규모의 대대적 항의집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6월10일은 마침 여당인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당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기로 돼 있었다. 5월27일, 야당과 재야단체 대표 20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고, 6·10집회 때 박종철 사건 규탄과 아울러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각 대학도 6월10일에 맞춰 총궐기하기로 뜻을 모으고, 준비를 해요. 하지만 6월 안에 ‘쫑’ 날 거라고 생각진 못했어요. 6월에 ‘잽’을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어보자는 계산이었죠. 6월을 징검다리로 삼고, 방학 때 역량을 농축하고 넓혀서 9월에 농민 추곡수매가 인상 투쟁, 노동자 임단투와 결합해 결론을 보자는 거였어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 2월 혁명을 참고했고, 9월이 결국 귀착점이 아닌가 생각했죠.”
맨몸으로 방패를 뚫다
▼ 당시 기사를 보면, 국민운동본부는 국민 행동요강까지 정하는 등 아주 조직적으로 6·10 집회를 준비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세력과의 협의나 교류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학생들은 재야나 야당이 혁명적이지 않고 프티적이라고 과소평가했고, 반대로 재야나 야당은 학생운동권이 급진적이고 위험하다고 인식했죠. 인천 5·3사태, 10·28 건대 사태 영향이죠. 학생들은 쉽게 통제가 안 된다며 조심스러워했는데, 박종철군의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벽이 와해됐어요. 정권의 치부, 바닥이 드러난 마당에 서로에 대한 작은 불신 때문에 연대하지 못해 적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죄악이라고 생각한 거죠.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거나 각목 휘두르는 것을 자제하고, 차도로 바로 뛰어드는 대신 인도에서 군중에 섞여 함성을 지르는 비폭력 시위로 전환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강화됐지요. 학생운동은 전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행사 마지막 날인 5월23일에 학생들이 종로3가 도로에 드러누웠던 것은 계획된 일이었나요.
“그날 3000여 명이 나왔는데, 그중 1500여 명이 드러누웠을 거예요. 고대생이 800~900명쯤 됐죠. 지나고 나서 보면, 그날의 일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관성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거였어요. ‘싸움’ 하면 으레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각목 휘둘러야 용감한 거라는 생각을 털어내고, (경찰에) 끌려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맨몸뚱이로 맞서는 더 큰 용기를 발휘했죠. 그 때문에 국민 대중의 공감을 얻었고, 도덕성을 인정받았어요.
이른바 결사항전, 옥쇄를 각오했죠. 한 사람이 잡혀가면 두 사람이 분노하고, 열 사람이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예요. 우리 몸뚱이를 내던져 불을 지핀다는 생각이었어요. 친구, 부모님, 교수님한테 편지를 썼어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간다, 왜 우리가 가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가자’ 해서 간부들은 혈서로 다짐하고, 일선에 있는 활동가는 편지를 썼어요. 다 잡혀 감옥에 갇히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공개하고, 대자보를 붙여 많은 학생이 총궐기하도록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의외로 수배 중이던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그날 밤 거의 다 풀려났어요. 그게 오히려 뚫어낸 거라고 생각해요. 건국대 사태 때 1300여 명이 구속됐는데, ‘다 잡아가라’하며 나서니 정권이 오히려 풀어준 거잖아요.”
이 의원은 연좌시위나 연와시위와 같은 평화투쟁 방식이 대중의 6월항쟁 참여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구속 취소’
▼ 이 의원의 홈페이지를 보니 6월10일 당시 감옥에 있었더군요.
“6월1일 새벽에 붙잡혔어요. 6·10 궐기 준비하면서, (학생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단식에 들어가고, 6월6일엔 고대에 몇천 명, 몇만 명이 모여 연합대동제를 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로 하고, 프로그램을 가동하자마자 붙잡혔어요. 6월10일 마침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는데, 시청 앞에서 ‘안드로메다 군단’(전경)에 둘러싸인 인파를 호송차 창 틈으로 볼 수 있었어요. 그러고 6월17일엔가 나왔죠. 그래서 사실 6·10항쟁은 나중에 들은 얘기가 다예요.”
▼ 사건이 검찰로까지 넘어갔는데 풀려났단 말인가요.
“구속이 취소됐어요. 아주 이례적인 일이죠. 4월19일에 수유리에서 연합집회한 걸 집시법 위반으로 걸고넘어졌는데, 그날 제가 빠진 다음에 소요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절 주범으로 몰기엔 법적 고리가 약했어요. 고대 학생들이 석방투쟁을 강렬하게 해준 덕도 크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6월항쟁이 성공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죠. 저를 풀어주면 진정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한 거예요. 제가 나온 뒤에 국민운동본부 주요 인사들도 거의 다 석방됐어요. 그렇게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거죠.”
그가 풀려났을 때는 이미 6·10 궐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명동성당 농성과 이한열군의 희생이 6월항쟁을 장기화하는 결정적인 두 축이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국민운동본부 실무자들은 6월10일 밤 이미 승리의 축배를 들었고, 학생운동세력도 6월은 ‘본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성난 민심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걸로 예상했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경찰과 접전을 벌인 시위대 중 일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명동성당 농성은 6월15일 오후까지 5박6일간 계속됐다. 국민의 눈은 명동성당으로 쏠렸고, 매일같이 그 주위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6·10대회 하루 전날, 시위를 벌이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군이 6월 내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최루탄은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어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 결국 ‘6·18 최루탄 추방대회’로 다시 한 번 수만 군중이 집결하는 기회를 만들었고, 6·10항쟁의 불씨는 6월 내내 꺼지지 않았다.
▼ 항쟁이 장기화하면서 아무래도 열기가 식고, 연대에도 분열 조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최루탄 추방대회 전후로 ‘비상조치설’ ‘계엄설’이 떠돌아 위기를 맞는 듯했죠. 6월20일이라고 날짜까지 박아서 꽤 구체적으로 소문이 떠돌았어요. 군부대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어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침마다 교문 앞에 집합하고, 오후엔 시내로 퍼져 쉽게 진압당하지 않게 하자는 식의 준비를 했죠.”
6·26 최후 항전
▼ 당시 정권에서 정말 군을 동원할 생각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군부대가 나올 준비를 했다고 하던데요.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만하죠.”
▼ 그렇다면 당시 정권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군부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을 한 건 자신들의 용단이었다고 하는 게 억지는 아니네요.
“그건 그렇지 않죠. 군부대를 투입했어도 민중은 온몸으로 맞붙었을 겁니다. 그게 두려우니까 군부대 투입 계획을 접은 거죠. 아직도 6·29선언이 정권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옳다고 봐요.”
▼ 야당과의 연대는 어땠습니까.
“비상조치설이 나돌면서 YS(김영삼)가 정권과 타협하려는 듯한 조짐이 있었죠. 영수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영수회담 때 정치적으로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6월23일과 26일에 연합집회를 세게 하기로 계획했어요. 결국 24일 영수회담은 합의된 게 아무것도 없이 결렬됐죠.”
6월26일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국민평화대행진엔 전국 30여 개 지역에서 100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6·10대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결과적으로 이날 시위는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최후의 항전이 됐다.
“조기 게양!” “청와대!”
▼ 당시 학생운동 세력에선 6·29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일단 승리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말려든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인데, 집권세력에 시간만 벌어준 것 아니냐는. 그래서 지도부 책임론도 제기됐고요. 사실 완전한 승리라고 보긴 힘들죠. 하지만 부분적인 승리나마 인정할 건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투쟁을 계속할지 고민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서대협 의장이던 이 의원은 이한열군이 사망한 7월5일,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국대학생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8월19일 충남대에서 전국 100여 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발족, 그를 제1기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한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21’에 1987년의 이인영 의원에 대해 쓴 대목이 있다. 한 교수는 “민주화운동의 독수리 오형제 가문에서 4·19세대, 6·3세대, 긴급조치 세대에 이은 넷째인 386세대는 집안이 가장 요동칠 때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고, 형들이 변변치 못한 탓에 민주화의 큰 짐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져야 했다”고 하면서 이 의원 관련 일화를 소개했다(막내는 ‘(강)경대 친구’라 불리는 91학번 이후 세대라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이한열군 장례식 날이었다. 군사정권이 주검을 탈취해갈지 몰랐기 때문에 청년학생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노제(路祭)를 지내러 시청 앞에 다다랐을 때 인파는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시청 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후미는 신촌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관제동원을 제하고는 단군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 당시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 기자로 일하던 나는 왔다갔다하다가 전대협 의장이던 이인영을 보게 되었다. 재야인사 누구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래도 그는 백만 인파를 향해 앰프 시설도 제대로 없는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이 의원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날, 주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인간 방어막을 치기로 되어 있었다. 대열에서 뒤로 밀린 그가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구차는 떠나고, 수십만 인파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 대열의 맨 앞에 서자 군중 속에서 “조기 게양” “조기 게양”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금세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조기 게양”을 외쳤다. 결국 서대협 일원 중 한 명이 시청 직원과 담판을 지어 조기를 게양했다. 그러자 군중은 “청와대” “청와대”를 외쳤다.
최초의 패배
“난감했죠. 전태일 열사 어머니까지 나와서 연설을 했지만, 시간을 끄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을지로나 퇴계로로 시가행진을 하다 자연스럽게 해산하는 방법도 떠올랐지만 그 많은 인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결국 청와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결국 광화문에서 경찰에 막혔죠. 대치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시위대 일부에서 경찰을 공격하는 바람에 경찰이 ‘지랄탄(다연발탄)’을 퍼부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요. 저에겐 최초의 패배였어요.
수십만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였는데, 그냥 그렇게 도망치듯 흩어지고 말았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요. 그 사람들이 시내 곳곳을 누비며 행진을 하다 YS와 DJ(김대중)에게 몰려갔더라면 두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미스터리예요. 그날 그 자리에 선배들이 왜 아무도 없었는지.”
▼ 선배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나요.
“물어봤지요. 그냥 뭐 회의하고 있었다, 어디 가 있었다 하는데….”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6월항쟁은 미완으로 남았다. 정권교체 실패의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엔 ‘전대협 책임론’도 있다.
▼ 12월 대선을 20여 일 앞두고 전대협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것이 학생운동사에 남을 결정적 실수라는 지적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것이 전대협 책임이라고 하면 제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당시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요. YS와 DJ가 양립하는 상황에서 독자후보, 후보 단일화, DJ 비판적 지지라는 세 노선이 있었는데, 지향점은 정권 교체 하나였어요. 전대협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건, 그렇게 어느 한쪽을 지지하면 후보단일화를 앞당길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어요. 지지 대상이 YS가 아닌 DJ였던 건, DJ가 더 진보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요.”
사실 전대협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11월26일, 그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를 잃은 뒤에야 풀려났다. 그 사이 군부독재는 제도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지지율 36%’를 받고 합법적으로 정권을 연장했다. 그는 정권교체 실패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 그 후 10여 년을 재야 시민운동에 헌신한다.
“386, 관상용 꽃 아니다”
2000년 16대 총선은 운동권 출신 386이 대거 국회 입성을 시도해 화제가 됐다. DJ의 이른바 ‘젊은층 수혈’ 바람이다. 이 의원도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구로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의 386,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386 정치인들은 너무 빨리 시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3김(金)이라는 화훼업자들이 젊은 피를 찾아 채 피지도 못한 꽃을 따다 꽃병에 꽂은 격”이라고 비유했다. 이 의원은 이런 비유가 언짢은 듯했다.
“한홍구 선배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알겠습니다만, 전 관상용 꽃이 아니니 그렇게 비유하는 건 좀 그렇고…. 더욱이 386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전적으로 3김(金)의 발탁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는 건 옳지 않아요. YS 정권 이후 민주화운동은 재야보다 제도권 정치 안에서 하는 게 효과적인 면이 있어요. 정권의 성격 자체가 그 전 정권들과 다르니까요. 그런 변화들을 따져보고 정계 진출을 결정한 겁니다.”
▼ 그러나 대중이 운동권 출신 386 정치인들에게 실망한 건 사실입니다.
“386 정치인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386에 대한 불신은 언론 탓도 있어요. 노무현 정권을 386정권으로 인식시킨 바람에 386이 싸잡아 비난을 받게 됐어요. 노무현 정권에 386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386 정치인들이 잘못하는 것은 비난하되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그것대로 인정해줘야죠. 평생교육법, 사학법, 기초노령연금법 등은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넥타이 부대의 꿈
지난 4월23일 국무회의에서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 의원은 지난해 12월, 125명의 의원이 서명한 ‘6·10 민주항쟁 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는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 지정됨에 따라 6·10항쟁과 6·29선언 중 ‘1987년 민주화’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한다.
“1987년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나온 건 그들이 가장 빨리 이뤄지길 소원했던 꿈이 민주화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거리로 나왔던 넥타이 부대가 지금 바라는 꿈은 뭘까요. 돈 많이 벌어서 자녀들 사교육비 충분히 대주면서 교육시키는 것? 아니면 그렇게 사교육비 들이지 않고 공부시키는 것?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요즘은 가족에게 잘하려고 노력해요. 제 아내가, 제 아들이 행복해지는 길이 뭔지, 제 가족으로부터 답을 찾아보려고요.”
이 의원은 자신의 이름 앞에 ‘6월항쟁의 주역’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위대하고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갔을 뿐이다.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작은 노력에 비해 이미 과분한 격려와 보상을 받았다. 민주화항쟁은 꿈을 실현하고픈 민중의 열망이 빚어낸 것이다. 꿈은 박제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지금 대중이 원하는 꿈을 파악해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6월항쟁의 혜택을 입은 정치인으로서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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