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우리가 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든, 적어도 인간보다 낫다고 하든,
인간보다 훨씬 우알하다고 하든 이런 특징들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송이 꽃은 전 우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꽃이 이것보다 좋다거나 저것보다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좋다거나 좋지 않다는 생각,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모든 관념과 생각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다.
실체의 궁극적인 차원은 개념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인 실체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사과 주스 한 잔을 예로 들어 보자.
그대는 사과 주스를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는 사과 주스를 진정으로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한 길은 그것을 마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북이가 물고기에게 육지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물고기에게 육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물고기는 물 밖에서 어떻게 숨을 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물은 개념이나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오로지 직접 경험함으로써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떤 것도 개념을 통해 말하고 설명될 수 없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면, 자신과 상대방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깊이 바라보는 수행을 계속할 때, 그대는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대는 이제 종이와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많이 절약할 것이다.
또한 차를 마실 시간이 더욱 많아지고, 날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로히타사가 붓다에게 물었다.
"태어남고 죽음이 있는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을까요?"
붓다가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대가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하지만 붓다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세상을 초월할 수 없다고 말하진 않았다.
붓다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나려면 우리의 몸을 깊이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수행을 하고, 존재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상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다. 사실 두 세상은 하나다.
예수 또한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실체에 대해 지적했다.
예수는 그것을 하느님의 왕국이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왕국은
예수가 아바, 즉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니르바나의 세계라는 개념은, 니르바나의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말도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 인가?
영원한 삶은 죽음을 포함하는 삶이다. 사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불가능하다.
영원한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영원하지 못한 삶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원한 삶을 선택할 때 그대는 죽음도 함께 선택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동전의 한 면만 선택하길 바란다면 그대는 영원히 동전을 가질 수 없다.
신학자들은 신 또는 신의 왕국을 설명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실제로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경이로운 실체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신학은 형이상학적 신학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를 경험하며 사는 방법에 대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이후로 신학자들은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떄로 이런 움직음을 표현하기 위해 '세속적 기독교'나 '무신로적 기독교'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일부 사람들은 세속적 기독교나 무신론적 기독교가 더 이상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떄, 예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다면
그대가 일상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신성해질 것이다.
나는 결코 그것을 세속적 또는 무신론적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
한 선의 스승은 말했다.
"고통을 없애려면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제자가 물었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은 바로 여기,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세상에 있다."
다시 태어나려면 죽어야 한다. 삶의 덧없음과 자기가 없다는 것,
그리고 함께 존재함을 경험하자마자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식물은 겨울에 잠들어 있지 않으며 봄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예수는 우리가 아이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썼다.
"신의 사랑과 성령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진정으로 자각한다. 그것은 신비롭고 새로워지는 경험이다.
신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된다.
또한 그 경험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자아가 죽고,
성령 속에서 살고 활동하는 새롭고 자유로운 자아가 탄생함을 의미한다."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