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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8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마태오 23,27-32
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 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내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하느님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인생에는 적어도 몇번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서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 인생을 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는데도 온 줄도 모르고,
그 소중한 대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끔씩 자신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틈나는 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입니다.
한번씩 인생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탈탈 털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반전의 시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쳤을 때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가, 곧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대 성인이자 학자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껌 좀 씹는 청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보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 명예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발생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에
널리 팽창되던 종교였습니다.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니교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마니교는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함께 인생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386년 가을이었습니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고향 친구 폰시아노가 찾아옵니다.
폰시아노는 최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깊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자들, 특히 안토니오의 성스럽고 빛나는 영적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우구스티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애를 쓰고 있는데, 공부 꽤나 했다는 우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은혜로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갑작스런 내면의 변화을 주체하지 못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며 기도하던 아우구스티노의 귓전에 한 애띤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즉시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책상 위해 놓여 있는 성경을 들어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 성경 구절은 다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생명수같은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해줄 은혜로운 말씀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강론>
(2024. 8. 28. 수)(마태 23,27-32)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위선자들의 업적은 바벨탑일 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7-32).”
1)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 같다.” 라는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2열왕 25장), 헤로데가 재건축했습니다.
당시에 헤로데가 46년이나 걸려서 재건축한(요한 2,20) 예루살렘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었을 뿐입니다(마태 21,13).
겉은 아름답게(거룩하게) 보이지만 속은 온갖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생명력 없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처음에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봉헌할 때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1열왕 9,6-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예언’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또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경고하신 대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파괴된 채로 있습니다.>
3) 그 일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는(나는) 어떤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우리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7-22).”
이 경고는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신앙인들 각 개인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위선’의 바탕에는 ‘교만’과 ‘자만심’이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라는 착각과 자만심이
‘위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든지, 각 개인이든지 간에 자만심에 빠지면 곧바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아름다고 거룩한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중을 듣게 됩니다.
4) 우리는 신앙생활을 무슨 업적을 쌓는 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만
대단한 업적을 쌓는 것은 ‘바벨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만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합당하게 살았느냐를 보십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삶’ 자체가 신앙인의 업적입니다.
<위선자들은 “우리는 정말로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라고 내세우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2-23).>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