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요한 20,11-18
부활 체험에도 단계가 있다: 우선 내가 왜 우는지 알아야!
1년에 100억 이상을 버는 인기 강사 이지영 선생도 중3 때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고 부모님은 동시에 암에 걸리셨고 심지어 지하에 사는데 홍수 물까지
들이닥쳐 옷가지는 물론 그동안 필기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선배가 버리고 간 교복을 입고 남들이 빌려준 연필과 노트로 공부하고 있는 그 비참함은 누가 봐도 살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지영 학생은 국어 수업 중에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잡아주려니 생각했겠지만, 선생님은 화장실 빨리 다녀오라고만 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건물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못 뛰어내리겠더랍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삶은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인생 두 번째 전환점은 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배우며 한 대법원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 용의자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본인도 자살 시도하며 죽여달라고 하고 검사나 모든 여론이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지만, 대법원 판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것에 착안하여 재판 때 피고인에게 “자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열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쏟았고 대법원장은 자신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던 이지영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나누며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이유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를 먼저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울고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스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돌려달라고 청합니다.
아직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만났습니다.
“나의 선생님”(라뿌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게 나를 이끌어줄, 나의 이름을 불러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돈을 버는 곳에, 애인에게, 혹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다 써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에서 보듯 알려고만 하면 믿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가 헛된 곳에 소진되게 됩니다.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어 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맨날 똑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이 우울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연애가 안 돼서 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발견하고는 ‘스승’이 없어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 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살펴봅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잡아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책이라도 읽어봅시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 요한 20,11-18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실 주님
세상 부끄러운 초대형 참사들을 유독 많이 겪은 우리 백성들입니다.
어쩔수 없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예방할수 있었던 인재라서 더욱 안타깝고 서글픕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희생자 유가족들의 참담한 슬픔은 결코 가시지 않습니다.
유가족들 가운데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고있는 분들이 있으니,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예 찾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분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한가지 시신이라도 돌아왔으면! 입니다.
그러면 흔들고 대성통곡이라도 할텐데, 붙들고 울부짖기라도 할텐데...
그만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신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추모하고 애도할수 있는 공간이 그리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절초풍할 일을 겪었습니다.
스승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내려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해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바없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내밀어주셨던 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세상 다 끝난 심정이던 마리아 막달레나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윽고 하시는 말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너무나 놀랍고도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뛸듯이 기뻤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라뿌니!" 하고 외치면서 예수님 발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두 발을 꼭 붙들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히, 우리 영혼의 성 안로 들어오시겠다는 표현입니다.
때로 미풍같은, 때로 태풍같은 성령의 현존으로, 때로 우리를 영생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체성혈의 형상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강론>
(2024. 4. 2. 화)(요한 20,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1-16).”
1)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는데
왜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면서 우느냐?”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천사들은 “울지 마라.”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을 텐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에 집중하려고 생략한 것 같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네 앞에 있는데, 왜 나의 시신을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울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텐데,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마리아는 그 말씀을 흘려들었을 것입니다.>
2)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고, ‘첫 선포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이 아니라 왜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만 편애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사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가장 앞서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도 부활 소식을 증언하고 선포하려면 가장 먼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요한 21,15-17).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런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으면서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그랬다고 흔히 생각하는데, 그런 단순한 뜻 외에도 좀 더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셔야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해야 하고,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을 뿐, 예수님을 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먼저 그에게 당신을 드러내셨고, 당신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사도 9,4-6).
그 당시 바오로 사도는 단순한 박해자가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갈망하면서 찾는, 또 ‘진짜 메시아’를 만나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구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을 때 바오로 사도의 반응은 처음부터 전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고,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자신이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만남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거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알려주더라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5)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왜 그냥 가버렸을까?
그렇게 가버리지 않고 마리아와 함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세 사람이 함께 예수님을 만났을 텐데......
두 사도가 그냥 가버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은 마리아의 사랑과 정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