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서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 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역설적, 낭만적
◆ 표현
* 그리움과 설렘의 어조
* 경어체를 사용하여 화자의 간절하고 진솔한 마음을 잘 드러냄.
* 자연현상에 빗댄 시상 전개 방식[겨울나무(화자) →봄을 기다림(그대를 기다림) →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버림(헛된 욕심과 보잘것없는 지식을 버림) ⇒
기다림을 통해 참된 마음의 자세를 깨달음]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첫눈 → 설렘과 기다림의 심상
* 그대 → 화자의 기다림의 대상
*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 사랑으로 인한 설렘과 기대감
때문에(역설적 인식)
*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 감정 이입
* 눈이 쌓일수록 → 기다림의 고통과 시련이 점점 더해질수록
*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 송두리째 버리는 숲 → 비움의 자세를 보여주는 숲의 모습
* 숲 → 각성(깨달음)의 매개물
* 헛된 욕심이며 / 보잘것없는 지식들 → 버려야 할 대상(세속적 욕망과 이기심 따위)
* 숫눈발 → '숫-'은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한'의 뜻임.
*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
* 폭설 → 크고 충만한 사랑 즉, 그대의 큰 사랑을 의미함.
*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 눈사람 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변함없이 그대를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
◆ 제재 :
◆ 화자 : 눈이 쌓일수록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처럼 자신도 헛된 욕심과 보잘것없는
지식을 버리고 그대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함.
◆ 주제 :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변함없는 마음
[시상의 흐름(짜임)]
◆ 1 ~ 6행 : 겨울 숲에서 그대를 기다림.
◆ 7 ~ 11행 : 기다림의 즐거움
◆ 12 ~ 20행 :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해야 하는 일
◆ 21 ~ 32행 : 그대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자기 다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화자 자신을 ‘겨울 숲의 한 그루 나무’에 비유하고 ‘헐벗은 나무들’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겨울나무가 숲 속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신도 오실 임을 기다리겠노라고 노래하고 있다. 임을 기다리는 순수하고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시적 화자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면서 화자 자신도 헛된 욕심과 보잘것없는 지식을 버리고 사랑하는 '그대'를 변함없이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과 희망의 자세를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기다림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역설적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기다림의 시간이 모든 것을 버리게 하는 시간이라는 깨달음에 화자가 도달하고 있고, 이를 통해 기다림의 새로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임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기다림을 기꺼이 인정하는 시적 화자의 긍정적 가치관이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다.
[작가소개]
안도현 : 작가, 시인
출생 : 1961. 경상북도 예천
소속 : 단국대학교(교수)
학력 :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데뷔 : 1981년 대구매일신문 '낙동강' 등단
수상 : 2007년 제2회 윤동주문학상 문학부문
경력 :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전통적 서정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안도현은 개인적 체험을 주조로 하면서도 사적 차원을 넘어서 민족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순수한 젊음의 시각에서 삶과 역사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주변 삶의 쓸쓸함과 현실에 대한 성찰이 담긴 『모닥불』(1989), 시대적 문제와
마음의 갈등을 다룬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과 시골 이발관 등 사소해
보이는 풍물을 애잔하고 낭만적으로 다룬 『바닷가 우체국』(1999)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바닷가 우체국』(2003),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5),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등을 간행하였으며,
소설집으로 연어의 모천회귀를 성장의 고통 및 사랑의 아픔에 빗대어 그린
『연어』(199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