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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 (9/15. 21:50, 04:40, 05:25, 08:3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9/15. 21:50, )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4:4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2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8:35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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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믿음과 희망과 사랑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12,31-13,13)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7,31-3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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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204
2026.09.15 21:29
2026년 9월 16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7,31-35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의 변덕스러운 아이들에 비기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
무엇을 해 주어도 트집을 잡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하며 오자 “마귀 들렸다” 하고,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며 오자 “먹보요 술꾼”이라 합니다.
이렇게 오든 저렇게 오든, 처음부터 ‘거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짐과 트집’의 정신입니다.
트집을 잡기로 작정한 마음은 언제나 트집거리를 찾아냅니다.
은총에 응답하는 대신 장터의 게임만 벌이는 것입니다.
이 끊임없는 트집이 공동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진리는 장터의 말싸움으로 증명되지 않고,
‘그 열매(자녀·삶)’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기리는 두 순교자가 바로 그 ‘지혜의 자녀’입니다.
모진 박해와 쓰라린 분열의 시대에,
고르넬리오 교황과 치프리아노 주교는
장터의 트집 게임에 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순교) 진리를 ‘열매로’ 증언했고,
무엇보다 ‘일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 시대의 큰 물음은 이것이었습니다.
‘박해 때 배교했다가 뉘우친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엄격주의자들은 “영영 내치라” 했지만,
두 목자는 “교회는 뉘우치는 자녀를 다시 품는 어머니”라며,
자비와 함께(참회를 통하여)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교부들이 그러했듯,
참된 목자는 넘어진 양 한 마리도 ‘버리지’ 않습니다.
아낌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두 가지 아낌이 있습니다.
첫째, ‘넘어진 한 사람을 낭비하지 않는’ 아낌입니다.
실패한 이를 손쉽게 내치는 대신, 되찾아 품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하나 됨을 낭비하지 않는’ 아낌입니다.
트집과 분열로 공동체를 갈라 낭비하지 않고, 일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마지막에 “선을 행하다 지치지 맙시다”(갈라 6,9) 하고 권합니다.
두 순교자는 끝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 주어도 ‘트집 잡는’ 장터의 마음은 아닌가?
나는 진리를 ‘말싸움’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드러내는가?
나는 넘어진 한 사람을 ‘내치는가, 되찾아 품는가’?
나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지키려 애쓰는가?
주님,
트집과 분열의 마음을 거두어 주소서.
진리를 삶의 열매로 드러내게 하시고,
넘어진 이를 되찾아 품으며 교회의 일치를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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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27?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5. 16:44
하느님 안에서 역설을 살아내며 사랑한 이!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바오로는 특별히 외적인 질서나 세속적 단정함, 혹은 사회적 통제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변모시켜 준 환시
하느님 안에서 역설을 살아내며 사랑한 이!
2026년 9월 15일 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가르쳤던 수많은 역설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살아냈는지를 성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의 체험 이후,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서간 속에서 역설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대조와 비교,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겉으로만 읽는 이들은 흔히 어느 한쪽을 ‘나쁜 것’으로, 다른 한쪽을 ‘좋은 것’으로 단순히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바오로의 참된 스승으로서의 지혜를 놓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씨름하며 부분적으로 화해시켜야 하는 신비로운 패턴을 드러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러한 내적 투쟁과 화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바오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언어"(1코린토 1,18)가 마치 영적 철학자의 돌처럼, 곧 현실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질서와 논리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게 하였는데, 그는 이를 "하느님의 감추어진 지혜"(1코린토 2,7)라 불렀습니다.
이 지혜는 단순한 공부나 인간적 지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오직 공동체와의 친교 안에서 자신을 내어 맡기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신비였습니다.
그는 그 재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법적 용어인 "의화"를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궁극적인 인정, 거울처럼 비추어 주는 사랑, 치유, 혹은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참된 재정렬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자아를 벗겨내는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거짓되고 꾸며낸 옛 자아가 벗겨지고 새로운 자아로 인도되는 체험(에페소 2,15; 갈라티아 6,15)을 통해 모든 모순이 흡수되고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은 바오로 자신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이 화해를 전하는 것"(2코린토 5,18)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는 언제나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일치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바오로는 이를 십자가라 불렀습니다.
그가 즐겨 다루고 화해시키려 했던 겉으로 보이는 이중성들을 몇 가지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율법과 은총, 육과 성령, 옛 사람과 새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 약함과 힘, 어리석음과 지혜, 행위와 자비, 배타성과 포용성 등입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바오로는 단순히 대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화해된 신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적 갈등을 통해, 그리고 더 크신 사랑 안에서 이러한 긴장들이 하나로 모아지고 극복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바오로의 가르침은 단순한 대조가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의식이 지금까지는 이 창조적 긴장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는 대체로 바오로의 서간을 인용할 때 구조와 질서를 강조하는 쪽에 치우쳐 왔고, 그가 분명히 드러낸 반(反)구조적 견해들을 외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견해들은 세속적 질서를 세우려는 종교에는 위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바오로 사도도 특별히 질서나 단정함, 사회적 통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과 역사의 변화를 향해 있었고, 오히려 인간 삶의 무질서 자체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 불렀고, 이는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놀랍고도 기쁨 가득한 발견이 되었습니다.
즉, 복음은 단순히 혼란을 정리하는 규범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하느님께서 새롭게 빚어내시는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는 길입니다.
오늘날 서구 종교가 전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무질서한 세상 위에 불가능한 질서를 덧씌우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무질서를 통해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참된 "기쁜 소식"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깊은 우울의 시기를 겪었지만, 어느 날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그 순간 제가 치유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특별한 만남 아주 거룩한 영혼들에게만 일어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그 전례들을 발견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의 사울, 의심 많은 사도 토마스, 그리고 막달라의 마리아. 이들은 특권을 가진 영혼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과의 만남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Anne W.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Soul Brothers: Men in the Bible Speak to Men Today (Orbis Books, 2004), 64–65, 66–67, 68–7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hris Chow, untitled (detail), 2020, photo, Roscoe Village, Coshocton, O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베틀 위에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무늬(패턴)를 기꺼이 내려놓을 때에만 더 큰 이야기를 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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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16 04:29
- 사랑도 철이 들어야 한다
오늘 독서는 코린토 13장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인데
첫째로 성령의 언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건 성령의 언어가 아니라 깡통 소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 깡통이 소리만 요란하다는 우리말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갈수록 느낍니다.
옛날에 사랑이 없는 말들이 많았을 때 말은 그럴듯했겠지만
의미를 주지 못했기에 열매를 맺지 못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생기를 주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욕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영적으로 사랑의 철이 들면서 뭔 말을 해도
사랑으로 하니 그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도 철이 들어야 합니다.
제 자랑 같지만 지난주 모 수도회 피정 동반을 했는데 사랑으로 강의하고
특히 고백성사 때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훈화하니
시작할 때의 얼굴이 점차 환해지고 생기를 지닌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말이 머리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까지 얘기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나란 존재는 의미가 없는 존재란 말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게 예술적 재능이나 신학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나란 존재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이고,
그것으로 뭘 해도 나는 그들 구원을 위해 아무 소용 없는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보고 누가 너는 딴따라일 뿐이야 하면 기분이 매우 나쁠 것입니다.
당신은 천부적인 작곡가라고 더 좋게 얘기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천부적인 재능으로 남을 아무리 즐겁게 해 줘도
나는 즐거움을 주는 광대일 뿐 행복이나 구원은 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는 존재는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셋째로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도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앞서 사랑이 없으면 남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제 뭘 줘도 사랑 없이 주면 그것이 그에게 어떤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고 특히 나의 구원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죽 쒀서 개한테 주는 셈이라는 것이고,
남은 기쁘게 하고 자기는 슬픈 그런 것이요,
남은 행복하게 하고 자기는 불행한 그런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는 행위는 뭘 해도 내게도 네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그래서 사랑만이 존재의 의미와 행위의 의미임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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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28?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6. 05:16
부족하고 죄 많은 '내'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거하시고 일하신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믿음!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문학 비평가들을 "문학 귀뚜라미"라 불렀습니다. 그는 비평가들이 자기만의 목소리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남의 작품을 비판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감을 세우려 한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책뿐 아니라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태도 말입니다. 이는 어린 시절의 무력감과 결핍에서 비롯된 습관일지도 모릅니다.
생명은 사랑과 긍정이신 하느님에게서 그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명은 사실 사랑받고 사랑할 때, 그리고 긍정을 품고 긍정을 살아갈 때 그 활력을 얻어 성장하고 번창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런 냉소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나' 중심의 외떨어지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며 그 결핍을 계속해서 에고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원의만을 좇아가며 더 어두운 나락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 "아니오"라는 말이 입에 달린 사람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어떤 부탁이나 요청에 "아니오"라는 말을 하거나 침묵을 선택할 뿐입니다.
"아니오"는 안전한 자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전하다기보다는 생명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수많은 것에 "예"라고 말하는 것이며, "예"라고 말하는 것은 곧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위험을 거부한다면 이미 죽은 듯 행동하는 것이고, 삶에서 오는 도전들에 아무런 응답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예", 즉 자기 내면에 사랑하고 긍정할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자 하는 "예"는 기뻐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따금 우리의 영혼을 들어 올려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대개 많은 고난을 겪은 이들입니다. "고통을 받다(suffer)"라는 말은 곧 "허락하다" 혹은 "받아들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은 삶이 자신을 파고들도록 허락한 이들입니다. 물론 고난이 사람을 굳게 만들고 쓰라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을 통해 더욱 부드럽고 기쁨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된 이들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제 고통의 어머니 성모님을 기념하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참된 삶, 참된 믿음의 삶에 있어 크나큰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예"로 응답하며 그 뜻을 좇아 살아가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그 "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응답이었지만, 당신 자신 안에 성령 하느님이 거하시며 사랑과 긍정의 힘을 주신다는 신념으로 그 도전들에 용기 있게 맞설 수 있게 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마음에 간직하고 새긴 것이 바로 이 진리라고 봅니다!
연세가 지긋한 어떤 어르신이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게 닥친 불운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런 운도 얻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이 말 속에는 역설적인 지혜와, 삶에서 오는 복잡다난한 굴곡을 허락하고 받아들인 사람의 깊은 영적인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역설은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에서 선포하신 "복음의 역설"을 받아들이는 삶의 지혜요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부족하고 죄 많은 '내' 안에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거하시고 일하신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숙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강력하게 현존하시면서 당신 사랑의 일을 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이 믿음을 반복적으로 의식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수양)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말과 행위로도 큰 긍정과 사랑의 향기를 내어 주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수양은 반복적인 연습입니다. 우리가 깨어 의식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적으로 이 믿음을 우리 마음과 정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가려는 수양을 한다면 우리는 사랑과 긍정의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살아왔다면 그것을 긍정으로 돌리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긍정과 사랑은 그 반대쪽을 싸워서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큰 용기를 내어 이 수양을 해 나가야 합니다. "빛이 어둠을 이긴적이 없다!"(요한 1,6)고 요한 복음 저자가 강조하여 선언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의식하지 못한 채 부정과 냉소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의미를 잃어가며 우울이라는 어둠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어느 가톨릭 라디오의 토크쇼에서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70% 이상이 자신감(self-confidence)의 결핍을 자기들의 가장 큰 문제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다만 미국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이는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 세상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일하신다는 믿음이 아닌 그 반대, 즉 이 세상이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믿을 수 없게 하는 곳이라는 허구적 현실에 더 정신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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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224
2026.09.16 07:31
내 젊음을 묻어둔 자리에서 1
산청 성심원에서 보낸 젊은 날의 시간, 한센인들과 맺었던 깊은 정, 수많은 이들을 먼저 보내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피정자로 돌아온 지금, 회상과 더불어 삶의 자리에서 얻었던 마음을 내 인생의 오후를 보내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산청 성심원에 다시 왔습니다. 1986년, 종신서원을 1년 앞두고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도, 수도자의 삶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젊은 날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열두 해를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참 긴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긴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고, 계절이 계절을 데리고 지나가는 동안 저는 이곳에서 제 젊음의 가장 뜨거운 시간을 살았습니다.
부식을 조달하러 한 주간에 5일을 진주에 있는 시장에 다녔고, 후원회를 맡았으며, 시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원장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살림과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디가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 달려가야 했고, 무엇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마련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야 했고, 도움을 청해야 했고, 살림을 걱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서로 다른 마음 사이에 서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일들은 이상하리만큼 희미해지고 사람들의 얼굴만 남아 있습니다. 한센인 형제자매들의 얼굴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들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해가 지나고, 다시 4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이 자리에 서 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그들을 돌본 것보다 그들이 나를 더 많이 받아주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게 준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들은 내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시설을 고치고 살림을 돌보았지만, 그들은 내 안의 허물어진 곳을 오래도록 말없이 고쳐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아픔 곁에 있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서툴렀던 한 젊은 수도자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성심원은 내게 단순한 근무지가 아닙니다. 내 젊음의 일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곳입니다. 어느 길모퉁이에는 스물 몇 살의 내가 걸어가고 있을 것 같고, 어느 방문을 열면 오래전에 만났던 누군가가 웃으며 나를 부를 것 같습니다. “수사님.” 그 한마디가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먼저 떠난 이들만 해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얼굴이 있었으며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웃음이 있었고 서러움이 있었으며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었고,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건네주었던 따뜻한 손길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늘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내일도 만나고, 다음 주에도 만나고, 내년에도 만날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빈자리를 보고서야 알게 됩니다.
사람은 떠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식탁의 빈자리 하나, 방 하나, 이름 하나, 습관처럼 건네던 인사 한마디가 그렇게 크게 다가올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수백 번의 죽음을 보내면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많이 본다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보내고 또 한 사람을 보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있다는 것은 영원히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시간 동안 온전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떠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먼저 떠났고 나는 조금 더 남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심원의 묘지와 오래된 길과 익숙한 건물 앞에 서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살아납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많은 날 동안 무엇을 붙들고 살았으며, 무엇을 놓치며 살았는가. 그리고 이제 남아 있는 시간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1986년의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려 했을 것입니다. 젊었으니까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에게 다른 대답을 가르쳐 줍니다. 이제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를 묻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보다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묻게 됩니다. 얼마나 인정받았는가보다 누군가의 외로운 시간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성심원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큰 복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결국 사랑한 만큼 남는다는 것. 세월은 업적을 지워가지만 사랑의 흔적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는 것. 한센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병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도 보았습니다. 세상의 시선과 편견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보았습니다. 상처 입은 몸 안에도 존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얼굴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상처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만났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책보다 이곳에서 조금 더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가간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상처 입은 사람의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 손이 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심원은 내게 나환자의 자리였고, 복음의 자리였으며, 나 자신의 가난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40년 세월을 건너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이번에는 일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관구 연피정을 하러 왔습니다. 참 묘합니다. 젊은 날에는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하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머물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에는 부식을 마련하고, 후원자를 만나고, 시설을 살피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이곳의 길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내 삶을 돌아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아주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오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잊었고,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을 잊었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젊은 수도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이들의 마음을 잊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사람을 통하여 나를 찾아오셨던 하느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피정은 어쩌면 새로운 것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오래된 은총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잊었던 얼굴을 기억하고, 잊었던 고마움을 기억하고, 잊었던 눈물을 기억하고,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다시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기억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기억은 오늘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은총입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그들이 내게 남겨준 사랑은 아직 내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건넸던 웃음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어느 할머니가 잡아주었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말없이 바라보던 어느 형제의 눈빛 하나가 내가 수도자로 살아온 긴 세월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떠받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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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6 07:18
내 젊음을 묻어둔 자리에서 2
우리는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라는 사람 안에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 나를 기다려 주었던 사람, 나 때문에 마음 아팠던 사람,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미처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람까지 모두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심원에 다시 온다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으로 묻습니다.
“수사님, 잘 살아왔습니까?”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저 오래된 길 위에 잠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해 주었는지. 당신들의 상처를 바라보며 내가 하느님을 배웠고, 당신들의 외로움 곁에 앉아 있으면서 형제라는 말을 배웠으며, 당신들의 죽음을 보내면서 삶이 선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가난을 가르쳐 주었고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고 사람의 존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은 한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나도 많이 늙었습니다. 1986년의 젊은 수사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때처럼 빨리 걸을 수도 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힘도 없습니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갔고, 많은 사람을 데려갔으며, 내게서도 젊음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월이 가져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움입니다. 사랑했던 것들은 그리움이 되어 남습니다. 그래서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 삶에 사랑이 있었다는 뜻이고, 눈물이 난다는 것은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성심원의 저녁빛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보낸 열두 해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시간이었다고. 내가 그들에게 젊음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내 젊음을 받아 하느님께 봉헌해 준 사람들이었다고. 그래서 이제야 조금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성심원에서 젊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젊음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젊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얼굴 속에 흩어져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나는 그 얼굴들을 천천히 만나고 싶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평안히 쉬십시오.” 하고 인사하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젊었던 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께서는 이곳에서 저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제가 그들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통하여 저를 섬겨 주셨고, 제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통하여 먼저 저를 사랑하셨으며, 제가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상처를 통하여 제 안의 더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기 위해 왔습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왔습니다. 무엇인가를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고백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삶도 그렇게 살게 해주십시오. 젊은 날처럼 많은 것을 할 수 없더라도 한 사람의 곁에 머무를 수 있게 하시고, 큰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작은 형제가 되게 하시며, 내 이름을 남기려 애쓰기보다 당신의 사랑이 지나갈 수 있는 작고 가난한 길 하나가 되게 하소서. 언젠가 나 또한 이곳에서 먼저 떠난 수많은 형제자매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고 묻기보다, 얼마나 사랑했느냐는 그 한마디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심원의 한 주는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삶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음의 자리에서 늙어감을 배우고, 만남의 자리에서 떠남을 배우며, 수많은 죽음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다시 믿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피정이 끝나 다시 성심원을 떠나는 날에는 무엇인가를 더 많이 가지고 나가기보다 조금 더 가난해져서 떠나고 싶습니다. 붙잡았던 것을 내려놓고, 미워했던 것을 용서하고, 잊었던 사람을 기억하며, 받았던 사랑에 감사하고, 남은 날들을 더 단순하게, 더 작게, 더 형제답게 살고 싶습니다.
산청 성심원! 내 젊음이 머물렀던 곳.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었던 곳. 울고 웃으며 사람을 배웠고 상처를 통하여 사랑을 배웠으며 죽음을 통하여 삶을 배웠던 곳. 40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나는 다시 이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곳이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와 길과 집들 사이에서 먼저 떠난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처럼 조용히 들려오는 듯합니다.
“수사님, 오랜만입니다.” 나는 그 목소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삶 전체로 대답합니다. 그래요. 참 오래 걸렸습니다. 다시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들과 함께했던 그 열두 해가 내가 당신들에게 내어준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통하여 내게 주셨던 시간이었음을. 내가 당신들을 사랑했던 것보다 훨씬 먼저, 당신들이 나를 형제로 받아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만남과 헤어짐, 눈물과 웃음, 젊음과 늙음, 머묾과 떠남을 지나 결국 내게 남은 것은 하나뿐임을. 사랑했던 것만 남았습니다. 사랑받았던 것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한가운데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하느님만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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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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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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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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