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미 합동 훈련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대 연합국 합동 작전을 위한 계획과 준비가 진행됨과 함께 현지 실무자들 간의 접촉도 활발히 진행되어, 계획은 점차 실천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미 합작의 군사 행동 계획은 당초 태평양 전쟁의 발생과 함께 당시 미국 하와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歐美) 위원부에서도 계획한 바 있었다. 즉, 이승만(李承晩)을 위원장으로 하는 구미 위원부에서는, 미·일 양국 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위원부 직원을 보강하여 새로운 활동을 전개함과 함께 한·미 공동 전투 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한·미 작전에 의한 재미 한국 청년들의 전투 훈련 및 참전을 미국측에 제안하여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부 좌익분자들의 모략 책동으로 하여 계획이 좌절되자 1943년 봄, 위원부에서는 다시 장기영(張基榮)·장석윤(張錫潤)·조종익(趙鍾翊)·피터김 등 청년들을 미 국방성 전략 정보처(OSS)에 추천하여 정보, 통신등 5) ≪소앙문서≫ 제82호, 여기에는 편성할 수 있는 우리의 공군 인원 중 중국군 출신 및 소속의 비행사·기계사로 최용덕(崔用德)·이영무(李英武)·김진일(金震一)·염온동(廉溫東) 등 11명의 명단이 있기는 하다. - 490 -
특수 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교육 훈련이 끝난 후에는 버어마 전선에 배치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태평양 전쟁 후 한·미 합작 특수 훈련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1)
한편 이 무렵, 중국의 피난 수도 중경(重慶)에서는 우리임시정부의 외무부 및 선전 위원회의 요직에 있으면서 대외 관계에 활약하던 안원생(安原生)이 미국 대사관 및 군사 관계자들과 긴밀한 활동을 하는 중, 1943년 2월에 중국 주재 미국공군 사령부의 정보 장교인 크래렌스비윔스(Chrence B. Weems)를 중경 연화지(蓮花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로 맞이하여 김구(金九) 주석과의 회담으로 한·미 군사 합작에 대한 토의를 하게 되니, 여기서 광복군과 주중 미군측과의 군사 합작 문제는 점차 활발하게 토의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1943,44년에 걸쳐, 우선 미국 전략 정보처 즉 오에스에스(OSS)와의 제휴로 한·미 합동의 정보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송면수(宋冕洙)·안원생(安原生)·안우생(安偶生)·진춘호(陳春浩)·박영만(朴英晩)·김유철(金裕哲)·이원범(李元範) 등이 함께 참가하여 한·미 군사 합작의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도 이원범은 중국군 제2 전구인 보계(寶溪) 포로 수용소에서 적 일본군 포로들의 심문을 담당하여 많은 군사 정보를 얻어 미군측에 제공함으로써 한·미 합작의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2)
그리고, 한·미 합작의 제1차 계획으로 정보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에 다시 한·미 합작의 특수 훈련 계획이 추진되었다. 즉,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일찍부터 중국 곤명(昆明)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제14항공대의 간부 쉬노우더(중국 이름 진납덕(陳納德)와 긴밀한 접촉을 가져온 바 있었지만, 1944년 가을에는 다시 중경(重慶)에서, 주중 미군 사령관으로 연합군 중국 전구(戰區) 부사령인 웨드마이어 미 육군 중장을 만나 광복군의 작전 계획과 한·미 합작에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범석 지대장의 전략 건의가 연합군 한·미 합작의 특수 훈련 및 1) 정운수(鄭雲樹, 당 73세, 당시 구미 위원부 직원, 후에 서안(西安) 제2지대 한·미 합동 훈련반 통신 교관) 증언 및 ≪정운수가 걸어온 항일 독립 투쟁의 경위≫ 참고
2) 김유철(金裕哲) ≪한미군사합작≫ 약사. 김승학(金承學) ≪한국독립사≫ 광복군조 참조 - 491 - 작전 계획은 순차적으로 합의를 보고 실천 단계로 옮겨지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3)
따라서 그해 12월경, 미군측에서는 곤명 주재 제14항공대에서 클라이드비사아젠트(Clyde B. Sargent)와 정운수(鄭雲樹)를 파견하여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원들과 면담하고, 또 제1·제2지대 본부를 방문하여 광복군의 실정을 파악하며, 지대장들의 의견을 들으므로 하여 일을 점점 구체화하게 되었다.
이 동안에는, 일찌기 하와이에서 우리 구미 위원부 직원으로 한·미 합동 군사 활동 계획에도 참여한 바 있었으며, 그 후 미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1944년 5월경부터 제14항공대의 장교로 정보활동을 하던 정운수(鄭雲樹)와 일찌기 우리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의 아들인 미 공군 정보 장교 윔스 및 오우 에스 에스 부대의 연락 장교로 중국 사정에 정통하던, 칼른 크라이더 등의 협조 노력도 적지 않았다. 4)
또, 정운수는 후일 제2지대 한·미 합작 훈련의 교관으로 와서 통신 교육을 전담하기도 하였지만, 훈련 개시에 앞서 그 통신 교재로 사용할 교본을 작성하였는데, 특히 한글 자모음을 중심으로 하여 1차만 사용할 수 있는 다섯 숫자 패드(5 digit ped)를 연구 발명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으며, 여기에는 우리말에도 능통한 미군 장교 윔스 및 당시 특수 훈련 관계로 곤명에 가 있던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 동 대원 김우전(金佑銓) 등의 협조를 얻은 바도 많았다고 한다.5)
이렇게 하여 모든 계획과 준비가 이루어짐과 함께 1945년 5월부터는, 우리 광복군 제2, 제3 지대에 대한 한·미 합작 특수 훈련이 시작되었다. 제2지대에서는 지대장 이범석 책임 하에 미국인 장교 사아젠트 및 정운수(鄭雲樹)가 훈련을 담당하고,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있는 제3 지대에서는 지대장 김학규 책임 하에 미국인 장교 윔스가 교육을 담당하였다. 광복군 정예 대원에게 3개월의 기간으로 특수 작전에 필요한 정보·파괴·무전 공작 등의 교육 훈련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정의 교육 훈련이 끝나면 훈련생들을 직접 국내로 파견하여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지하군을 조직하고 3) 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신동아≫ 69년 4월호) 및 김유철 위의 ≪한미군사합작약사≫ 참조 4) 이범석 ≪광복군≫ 및 정운수(鄭雲樹) ≪정운수가 걸어 온 항일독립투쟁의 경위≫ 참조 5) ≪정운수가 걸어 온 항일독립투쟁의 길≫ 및 정운수 증언 참고 - 492 -
정보 활동을 하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다는 것이었다. 이야말로 광복 사업의 최종 활동을 장식하는 사업이 아닐 수는 없는 것이었다. 6)
그러면 이때 우리 국내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이미 1937년에 소위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구실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후, 섬나라 일본은 광막(廣漠)한 중원 대륙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행하노라 인원·물력 동원에 여념이 없었는데, 1941년 12월에 최후 발악적인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그대로‘총력(總力)’을 기울여서 당해낼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내선 일체(內鮮一體)’,‘황국신민(皇國臣民)’을 내세우면서 우리 동포 청년들을 전선(戰線)으로 내몰고 악랄한 방법으로 금전·물자를 강탈하여 그들의 발악적인 전쟁 수행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는데, 그 방법이야말로 무소부지(無所不至)였다. 소위 지원병제(志願兵制), 징병제(徵兵制), 징용령 등을 행사하여 우리의 많은 청장년들을 죽음의 전장터로 몰아내면서 후방에서는 우리 역사의 말살, 문화의 말살 등으로 민족정신, 민족의식을 완전히 제거하고 우리 동포들을 모두 그들이 말하는, 그들이 잠꼬대처럼 떠들어 대는 흥아 건설(興亞建設), 대동아 공영권(共榮圈) 건설에 심신을 바치게 하려고 가진 애를 썼다.
앙곡을 공출(供出)하고 금속류와 모든 군수 물자를 강탈 또는 강제 생산하여 국내 동포들로 하루 한 시간의 여유도 가질 수 없게 들볶는데, 전국은 점점 기울어져서 미군 항공기는 일본에 대한 폭격만이 아니라, 우리 국내에 대하여도 군사 시설을 폭격하고 유유히 시위 비행을 하며 비라를 산포하니 시달린 순진한 국민들로서 앞장 서서 항일투쟁에 나서기를 주저하지만 이미 유사시 구국 복국(復國) 운동에 봉기(蜂起)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언중에 움직이는 인심의 동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미·중 등 연합국측의 우리 광복 운동에 대한 지원 협력은 그대로 국내 동포들에게 분발의 힘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또 대일 전쟁의 조속한 종결, 한국 독립의 6)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부기(附記) 2, 한국광복군 약사. 김승학(金承學) 지은 ≪한국독립사≫ 한국광복군 조. 김구(金九)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중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조 참조 - 493 - 조기 달성을 가져올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국내 진입을 위한 한·미 합동의 특수 훈련은 서안과 부양 두 곳 광복군 진영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서안에 있어서는 서안 비행장에서 서북쪽으로 16킬로 지점의 광복군 제1지대 본부가 있는 두곡(杜曲) 부근에서 특수한 소질이 인정되는 열혈 청년들로 훈련반이 편성되었다. 중국에서도 불교 관계로 잘 알려진 종남산(終南山) 중에 있는 종남사 옆 예비 훈련장에서부터 훈련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먼저 1주간의 예비 훈련을 통하여 개개인의 소질과 적성(適性)이 평가 인정된 다음, 각기 소정의 과목에 따라 본격적인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제2지대 훈련반에는 특별히 일찌기 학도병으로 중국 전선에 나갔다가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의 제3 지대 초모처로 와서 중국 전시 간부 훈련단 제1분단에서 한국광복군반(약칭 한광반)으로 3개월간의 각종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6천여 리의 험준한 길을 도보 행군하여 중경(重慶)으로 들어와서, 우리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진은 물론, 중국 및 내외 기자들과의 회견으로 전지의 형편과 적진 탈출 경위들을 소상하게 발표하여 국 내외에 큰 충동을 주기도 하였던, 장준하(張俊河)[일명 : 김신철]·김준엽(金俊燁[일명 : 김신일] 등 수십 명의 학병 출신 열혈 청년들이 가담하여 한층 더 기대를 걸게 되었다.
당초 이들은 중경으로 와서 중경에 있는 우리 관·민의 큰 환영을 받고 임시로 토교대(土橋隊)에 편입되어 있다가 이범석(李範奭) 제2지대장의 요청으로 이곳 제2지대 소속의 훈련반에 들어오게 된 것인 만큼, 이들의 구국 복국을 위한 염원이나 그 발랄한 기개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모범이 될 만하였으며, 또 훈련 성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전략 첩보의 목적 수행을 위한 합동 훈련반의 훈련은 문자 그대로 특종 훈련이었다. 우선 1주간 받은 예비 훈련에 있어서부터도 도강술(渡江術)·사격술의 기초 과정에서 게릴라 전법에 필요한 각종 특전단의 군사 훈련이었다. 밧줄을 타고 절벽 밑까지 내려가서 나무잎을 따 온다든가 밤에 낙하산 연습을 하는 것, 또는 식사 때에, 바로 옆에서 묻었던 폭약을 폭발시켜 그 담력을 시험하기도 하고, 특수 음페 및 엄페법(掩蔽法)을 가르치는 등 적지 침투 공작에 긴요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특수 훈련은 미 육군 특전단(特戰團)의 - 494 - 전술 사관들에 의하여 실시하며, 또 그들에 의하여 채점되고 구분되어 다시 통신·파괴·교란 행동·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 각 단원의 임무가 주어지고, 그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기술 전법의 훈련이 3개월간 실시되는 것이었다. 훈련생들은 종남산 밑 훈련장을 중심으로 한 천막 중에서 엄격한 규율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계속하였는데 이국 청년들의 구국 의욕으로 이루어지는 일사불란(一絲不亂)의 훈련은 미국인 교관과 오에스에스(OSS) 간부진을 경탄하게 하기도 하였다. 7)
제2지대 소속 오에스에스 훈련 단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무전반
이재현(李在賢)·민영수(閔泳秀)·최봉상(崔鳳祥)·유덕량(劉德亮)·장덕기(張德旗)·이우성(李宇成)·임재남(林裁南)·송창석(宋昌錫)·김용(金湧)·이종무(李鍾鵡)·장재민(張在敏)·석근영(石根永)·김영호(金英鎬)·노능서(魯能瑞)·김유길(金柔吉)·홍기화(洪基華)·김성근(金星根)·김춘정(金春鼎)·고철호(高澈浩)·이계현(李啓玄)·이덕산(李德山)·노성환(盧星煥)·이준승(李濬承)·김성환(金聖煥)·이정선(李正善)·김중호(金仲浩)·윤치원(尹致源)
정보·파괴반
송면수(宋冕洙)·김용주(金容珠)·정일명(鄭一明)·임정근(林正根)·강정선(康楨善)·장철(張鐵)·강일성(江一成)·황삼룡(黃三龍)·최철(崔鐵)·정정산(鄭正山)·이지성(李志成)·이건림(李健林)·이운학(李雲鶴)·박재화(朴載華)·박훈(朴勳)·오서희(吳庶熙)·김석동(金奭東)·계의성(桂義成)·동방석(董邦石)·이윤장(李允章)·최문식(崔文植)·신덕영(申悳泳)·송석형(宋錫亨)·이지홍(李志鴻)·허영일(許永一)·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선우기(鮮于基)·한종원(韓宗元)·김상을(金商乙)·태윤기(太倫基)·이준명(李俊明)·오건(吳健)·이명(李明)·허봉석(許鳳錫)·신국빈(申國彬)·백준기(白俊基)·이호길(李浩吉)·이욱승(李旭昇)·박명광(朴明光)·윤재현(尹在賢)·김성갑(金成甲)·김세용(金世用)·박영섭(朴永燮)·홍재원(洪在源)·박금동(朴金童)·장두성(張斗星)·이순승(李淳承)·송수일(宋秀一)·김욱배(金旭培)·한경수(韓景洙)·구자민(具滋民)·윤태현(尹泰鉉)·석호문(石鎬文)·안국보(安國寶)·전성윤(田成胤)·이동환(李東煥)·이우경(李宇卿)·김덕원(金德元)·이동학(李東學)·김선옥(金先玉)·김동걸(金東傑)·박수덕(朴樹德)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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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준하(張俊河) 지은 ≪돌배개≫ 중 가릉청수(嘉陵淸水)는 양자탁류(揚子濁流)로 8.15 전후(1) 참조 - 4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