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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가 아픈 날, 신은 태어났다
두번째 입맞춤이었다
모든 눈썹으로 당신의 눈을 숨긴다
서로를 사랑한 적 없는 유골들을
불덩이 속에 던져버리는 해방감
이해될 수 없어서 나는 나를 버리지 못한다
(중략)
우리는 이것이 그리웠단다
이렇게 내 거짓이 아름다우니까, 당신이여
봄날처럼 미치도록 만발하는 죄책감이
육체를 점령한다
여러 사랑들을 차례대로 지우는 것으로
유서를 써 내려간 후,
마음을 잃은 상징들을 건축한다
사랑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구절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일이다
말을 위해 입술들은 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간을 벗어나 다시 공간으로,
나는 기도문처럼 전생들을 회고할 것이다
흉터는 모두 한 편의 시
(후략)
이이체, 인간이 버린 사랑/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시집 "아픈 천국"
슬픔이 낭떠러지에 선 인간의 등을 떠밀어버리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쓰고 싶은 시가 좀 달라질 것 같다. 제정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주기적으로 벗었던 몽상이라는 모자, 그것을 왼손에 들고서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는 것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 남의 불행에 대하여 눈부셔하거나 황홀해하다가 눈꺼풀을 닫아버리는 일과, 나의 젊음이 뜨겁거나 아까워서 죽음의 관념을 가지고 놀아보는 일. 다 집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긋지긋해하지 않고 잘 살 것이다. 얼음을 입에 물고 착실히 굳어가는 겨울의 허벅지처럼. 죽을 만큼 밉다는 말보다 죽을 만큼 슬프다는 말을 진실로 믿으며. 나는 아직 그런 슬픔을 위로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유계영, 바라볼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전략)
나에 대해, 너에 대해
내가 너에게 더 가까워지려는 찰나에 대해
너무에 대해, 너무가 갖는 너무함에 대해, 너무가 한쪽 팔을 벌려 나무가 되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비로소 생장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세상을 향해 팔 뻗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품은 부정적 의미는 사라져
너무는 너무 많이 흔들린다
너무 너다워
너무 쑥스러워
가지가지 비밀들이 수줍게 움텄다
너무
나도 너도 아름다웠다
오은, 너무/ 시집 "유에서 유"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무슨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으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고생은 끝이 없겠지만
그 고생을 견뎌내는 사랑 또한 끝이 없으리니
그라시아스 알라비다, 내 삶에 감사합니다.
박노해
현관문을 나서다가 나는 다시 돌아오지요 돌아와선 왜 왔는지 잊어버려 다시 나가요 나가다가 생각하니 그게 시계였어요 시계를 찾기 위해 내가 뒤지는 곳은 시계가 없는 곳이죠
당신과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처럼 시계를 찾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 시간을 찾다가 손목을 잃어버리는 일, 새롭지도 않아요 오늘은 약국에 들러야 하는데 증세가 생각나지 않아요
하얀 알약을 보면 왜 죽음이 떠오르는지요 편도염을 낫게 하는 알약을 한꺼번에 털어넣은 아랫방 언니가 있었거든요 그녀는 무얼 잊고 싶었던 걸까요
시계는 찾지 못하고 시간은 멎었어요 우린 평생 없는 걸 찾아다니겠지만, 찾아야 할 건 이미 옆에 있었다고 누군가 말하지만, 그런데도 그건 영원히 없는 것이죠
깜빡깜빡 잊으므로 여기 또 깜빡깜빡 살아요 현관을 나서다 나를 잃어버리고 빨래통에 벗어놓은 나를 뒤집어쓰고 나 아닌 내가 다시 나가요 나가다 생각하니,
이규리, 현관문 나서다가/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않음으로
나는 모든 것을 말하였으므로,
배영옥, 고백/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우리가 외로운 것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서이다
밥 딜런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육체는 빛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
누구보다도 죄를 잘 짓는다
하얀 기척
야생을 벗어나 죽어가는 늙은 이리처럼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주고 싶을 때마다
느껴지는 초라한 참담이 있다
먼 이국을 고향에서 그리워하는,
향수(鄕愁)를 거꾸로 앓으면서
희생양의 성좌
죄 없는 자들로부터 병든 삶을 옮아
나는 시든 꽃으로 만개한다
손등으로 벽을 밀어본다
살쾡이들이 다가오는 묽은 저녁
알에도 표정이란 것이 있다
하얀 기척
허구의 귀로 환한 속삭임을 줍는다
이이체, 푸른 손의 처녀들/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페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시집 "상처적 체질"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최정례, 우주의 어느 일요일/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1 가을호
코를 길게 늘여도 맡아지지 않는 먼 냄새들이 있다
폭설에 오지 않는 새들은 어느 별보다도 멀고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는 날엔 탈골되어 수북한 마음들,
집 밖의 삶이니 뼈를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가장 가까운 별도 사는 동안엔 닿을 수 없다는데
당신 마음을 내 뼈가 삭아갈 때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쁠까 우리 거창한 예식도 없이,
탄생을 칭얼거릴 때 인생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란
노인들의 위로가 나를 풀처럼 가만히 눕혀주었지
같은 바람을 타고서도 서로를 못 알아보는 이번 생엔
숲으로 가 어둠에 몸을 걸친다
이만하면 늙어가는 기술을 하나씩 알아채고 있는 걸까
결국 껑충껑충 뛰어야만 기운이 빠지는 날들,
우린 아이가 아닌 척 애를 써야만 하는 어른들인 거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노래가 뒤섞이는 밤엔
돌아설 때 간혹 보인다 새들이 이번 생에 내린 닻
그 운명의 닻 그 달의 녹슬음,
살고 있으니 마음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한 나무가 얼룩진 잎을 매달고 천 번의 눈을 맞는 동안
나는 어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침묵하고
정영, 간절(間節)/ 시집 "화류"
(전략)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중략)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이제니, 발 없는 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건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이규리, 해마다 꽃무릇/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안녕 여시들, 전 편에 쓴 글을 몇몇 여시들이 좋아해주어서
1편엔 못 썼지만 평소 좋아했던 시하고 글을 나누려고 다시 왔어
특히 내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엔 색깔을 넣어봤어
너무 길면 가독성이 좀 떨어질 것 같아서..
대부분 전문을 다 안 싣긴 했는데 그래도 길다ㅠ
좋다고 느끼는 여시들이 있다면 다음 번에도 힘내볼게!
궁금한 점 있으면 댓글 남겨줘
+) 마지막 시는 내 닉네임의 유래가 된 시...
문제 시 쑥쓰럽게 수정
첫댓글 이이체 시인 글귀들 참 좋다. 잘 읽었어 여시야!
너무 좋다 지하철인데 힐링 돼ㅠㅠㅠ
잘읽었어 고마웡!!
좋은 글 고마워~
다 내취향이다 ㅜㅠㅠㅠ 정말 고마워 여시!!
아 너무 좋다
좋은글 고마워♡
여시 글 하루에 한 번씩 읽으러 온다.. 진짜 너무 고마워 :)
여시 댓글이 더 고맙다ㅠㅠ 일 바쁜 거 좀 끝나고 한숨 돌리면 또 좋은 글 가지고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