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태생이며, 우루과이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어려서부터 지역 클럽팀인명문 다누비오 유소년 팀에서 단계별로 실력을 쌓아오던 카스티요는 15살의 어린 나이로 1군 무대에 데뷔하면서 처음으로 축구계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다누비오 1군 무대에선 단 2경기만을 소화했을 뿐이지만, 그는 다누비오 유소년 팀 소속으로 많은 대회에 참가하며 남미에서 손꼽히는 유망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빠른 발과 더불어 골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난 그에게 많은 명문 클럽 스카우터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마침내 16살이 되던 해(2000년) 그는 잉글랜드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아버지와 에이전트는 다른 유럽의 명문 클럽들보다도 유소년에게 많은 기회를 주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었기에 그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군 무대 경력도 부족했고 대표팀 경력도 없었기에 워크퍼밋을 받는데에 실패하면서 그의 맨체스터 행에 대한 희망은 산산히 무너졌고,
그에게 눈독을 들이던 그리스의 거인 올림피아코스가 접근했고, 결국 그는 맨체스터가 아닌 아테네로 향하면서 유럽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직 어린 나이었던 네리 카스티요는 2년간 주로 리저브 팀에서 뛰며 실력을 쌓았고, 3년째 되던 해 드디어 주전선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주전으로 도약한 이후 그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등번호 7번은 올림피아코스 팬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고, 그의 애칭이기도 한 '7번 게이트'에는 그의 광적인 팬들이 자리잡게 됐습니다.
빠른 발과 뛰어난 테크닉으로 공격진 어디서나 활약할 수 있었고, 정확한 패스와 넓은 시야로 플레이메이커 역할까지 담당할 수 있었던 그는 리그와 유럽 무대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이어갔고, 연신 그리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그리스리그 최고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4/05 시즌을 앞두고 그에게 우루과이와 멕시코에서 동시에 대표팀을 제의했고, 그는 상당한 고민에 빠지며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 챔피언이었던 유벤투스와 멕시코의 명문 치바스 과달라하라와의 이적설에 휩쌓였고, 팀에서는 경쟁자인 히바우두가 새로이 영입되면서 팀 내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부진에 빠지면서 벤치로 밀려났습니다. 그리스에서 찬란하게 시작됐던 그의 경력은 곧 악몽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시즌 마지막 리그경기에서 그는 팀원의 프리킥을 가로채 골을 넣었는데, 그는 골 세레모니로 자신의 유니폼을 그의 광적인 서포터 집단이 모여있는 7번 게이트에 집어던지면서 물의를 야기했습니다. 그의 팀 동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존경심이 부족했고 이기적이었다"며 비난했고, 카스티요는 궁지에 몰렸죠.
하지만 2006/07 시즌을 앞두고 올림피아코스와 4년 재계약을 맺은 그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펼치면서(5경기 3골) 그의 이름을 전유럽에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리그에서도 25경기에 출장해 12골을 넣으며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 골을 수립했고,
끝없는 고민끝에 멕시코대표로 합류하여 참여한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엄청난 활약으로 멕시코 대표팀을 이끌었고, 특히나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카스티요는 대회 4골을 넣었고, 그의 환상적인 활약에 고무된 많은 명문클럽들이 본격적으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으며, 더이상 올림피아코스는 그를 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발렌시아와 맨체스터 시티를 비롯해 많은 클럽들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올림피아코스는 가장 많은 이적료를 제시한 우크라이나의 명문 사크타흐의 오퍼를 받아들였습니다.결국 그는 2007년 여름, 우크라이나 리그 역대 기록인 2천만 유로의 이적료로 사크타흐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에게 너무나도 추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좀처럼 클럽에 적응하지 못했죠.
결국 그는 이적을 원했고, 07-08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1년 임대에 합의하면서 추운 얼음의 땅 우크라이나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임대 금액은 놀랍게도 500만 유로였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떠나길 절실히 원했고, 결국 자신의 연봉에서 임대료의 일부를 내기로 하는 강수를 던지면서 마침내 8년 전에 실패했던 맨체스터로 입성했습니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는 영입생 발레리 보지노프의 장기부상과 롤란도 비앙키의 적응실패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베테랑 공격수 음펜자는 고작 두골을 넣었을 뿐이었고, 코라디와 디코프는 아예 경기에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에릭손 감독의 신임아래 잔여 경기 9경기에 출전한 카스티요는 실망스러운 플레이로 일관했고,
시즌 종료후 레알마드리드로부터 호비뉴가 영입되면서 맨체스터 생활은 6개월만에 끝나버립니다.
돌아온 샤크타르에서는 더욱 벤치만 달궜을 뿐입니다.
팀은 유에파컵 역사상 마지막 우승팀이 되었지만, 카스티요는 아무런 역할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2009년 겨울에는 드니프로로 임대를 떠났고,
2010년에는 MLS 시카고 파이어에 입단하면서 유럽생활을 청산한 수많은 과거의 스타들처럼 미국에서 축구를 하게됩니다.
하지만 카스티요의 유럽에대한 열망은 남아있었고, 자신이 가장 큰 성공을 이룩했던 그리스로 돌아가면서 부활을 시도합니다.
아리스 테살로니키에서 2시즌간 주전으로 활약한 카스티요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으며,
이후 멕시코 파추카에 의해 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파추카에서는 더욱 힘든 시즌을 보냈으며,
현재 파추카에서 라요 바예카노로 이적한 카스티요는 시즌 2골을 넣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