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장 5-6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서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1장 지난번에 한 것처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죄 없다 한다면. 1장 9절에 나오지요? “만일 너희가 죄 없다하면” 생명이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떴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원인이 우리한테는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안에서 원인을 찾을 필요 없구나.’라고. ‘내가 나쁜 짓해서 벌 받았구나.’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착한 일 했더니만 예수 믿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란 말이지요.
공중에 나는 새가 위로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잖아요. 어떤 경우에도 참새 자기가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움직여서 참새가 공중으로 날아다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좀 떴다 싶으면 자신이 잘나서 그렇고, 떨어졌다 하면 하나님이 벌 줘서 그런 것이고. 전부 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자기가 임의로 자기변명과 합리화를 위해서 임의적으로 골라서 뽑는 거예요. 뽑아서 자기를 꾸미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까 고전주의처럼 실제의 빛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보는 그림을 실제라고 해놓고 보는 사람들에게 속이려는,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거지요. 자신이 죄 없다고 하면 자기가 남들에게 속이는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는 제 2의 자기를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죄 없거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왔는데 생명으로 오신 분 앞에서 ‘주여, 저는 죄 없거든요.’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진짜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를 스스로 꾸며서 대외용으로 홍보용으로 남을 속이기 위해 그 짓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생명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것은 네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2장 8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새로운 계명으로 왔다.’ 여기에서 새로운 계명이란 말은, 기존의 계명은 오히려 죽음을 죽음으로 확인케 하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효력이 없고 새로운 계명이 왔는데 이 새 계명의 특징이 뭐냐?
2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이 움직여서 우리가 움직이는 그러한 법칙. 그게 새 계명인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의 특징은, 내가 사랑하자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느끼면 ‘너는 이미 죄를 용서 받았어.’ 하고 환희와 기쁨이 오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랑에 감격하여 뭔가 움직이는데, 오줌을 누든지 밥을 먹든지 움직이는데 그 자체가 전부 하나의 사랑 덩어리로 움직이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다 이 말입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가 사랑을 알았으면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뭔가 들썩들썩 한다 이 말입니다.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요한일서에서 미움도 이야기하지요. 미움도 사람이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숨기지를 못한다는 뜻입니다.
보통 추석 때가 되면 가정마다 위기가 옵니다. 평소에 감정이 있던 것이 표출되는데, 보통 집에 올 때 정종 한 병 사들고 화투도 챙겨서 옵니다. 와서 처음에는 부엌에 가서 ‘형수님 수고하십니다. 형님 고생 많지요. 조카 입학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 하면서 겉치레 인사부터 좀 하고, 그러다가 저녁에 술 한 잔 들어가면, 술을 처먹는다고 해야지요. 술 처먹고 하는 말이, ‘여기 형님도 계시지만 형수님,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면 형도 ‘동생,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야, 이 새끼야. 네 형수가 어쨌는데? 제수씨가 네 형수만큼 하나?’ 이런 소리 듣고 있다가 엄마가 한 소리 하지요. ‘야들아, 와 이러노. 싸우려고 모였나? 1년에 한 두 번 만나서 어미 앞에서 이렇게 형제간에 욕하고 싸우려고 왔나?’ 하고 고함을 치지요. 동생이 ‘어머니는 좀 참으세요. 내가 형수한테 할 소리는 좀 해야겠습니다. 말 들으니 형수가 어머니께 그렇게 학대를 한다는데--’ 이 때 형이 냄새나는 말도 동생을 차면서 ‘야 이 새끼야, 너는 어머니 한번 모셔봤어?’
제사 지내고 난 뒤에 이런 다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형수님, 어제 밤에는 제가 좀 과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또 겉치레를 합니다. 형도 ‘어머님 계신데 서로 좀 참자. 자주 놀러 오너라.’ 이것이 하나의 순서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미움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돈 이야기 한다는 말은 참다 참다 튀어나온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 작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목사 자신은 복음을 전했다는 자기 정당성, 목회의 윤리와 도덕으로 교인들에게 말씀 증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착하잖아. 그동안 월급 안 줘도 참았잖아. 이런 자기 윤리, 도덕. 성경하고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교회 장사꾼이지요. 영혼 장사꾼이지요.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웃던데 여기는 안 웃네! 느낀바가 있는 모양이지. 특히 어머니가 나물 무치다가 ‘너희들이 싸우려고 왔나?’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술 취하면 개가 됩니다. 그러고는 화해한다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4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이게 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1층에서 안 돼요. 인간들의 지평에서는 이것이 성사가 안 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말씀을 배울 때는 자기가 판단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해 왔던 윤리,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보기 때문에 이것은 그 뒤의 구절이 해당이 안 됩니다.
그 뒤의 구절을 봅시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움직인다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일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이게 요한일서에 보면 ‘말씀’ 자리에 ‘사랑’을 집어넣어버려요. 십자가 사랑이 나를 탄복케 하고 환희에 잠기게 하고 기뻐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 목사한테 바늘로 꼭 치르면 ‘십자가 지신 주님 은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 이야기가 줄줄 나오지, ‘돈 안 내놓나?’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오느냔 말입니다. 정신을 어디다 쏟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소리하면 ‘다 안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전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장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돈 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자기가 망했다고 생각해도 그게 아직 망한 게 아니에요. 진짜 망하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누가 돈 안 주나? 이럴 겨를이 없어요. 진짜 망한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빛난 영광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아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삼스럽게 자기 것 안 챙겨요.
하나님 만나는 순간 뭐가 깨지느냐? 바로 윤리와 도덕이 깨집니다. 이것 꼭 적어놓으세요. 생명을 만나는 순간 윤리와 도덕이 깨져버립니다. 윤리, 도덕은 한 트럭 가져와도 소용없습니다. 천당 가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윤리, 도덕에서 벗어납니다. 왜? 죄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윤리, 도덕 깨지고 뭐가 등장합니까? 사랑으로 역사하는 사랑이 남아요.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행위가 나오지요. 노상방뇨를 해도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사랑으로 나온다니까.
이로서 사랑이 우리 죄 속에 침투하죠. 묵시가 역사를 침투하지요. 2층 사랑의 나라가 생명이란 이름으로 1층 나라 윤리와 도덕으로,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 자기 보람으로 사는 세계. 결국 그것이 뭐냐, 이런 힘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세계, 사실 죽어있으면서도 살고자 하는 세계.
여러분, 살아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것은 저주예요. 참 고통스럽습니다. 살아있는 것을 은혜로, 사랑이 주신 은혜로 순간순간 감사하면 되지 내일 일까지 미리 당겨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 현재를 지옥으로 만드는 거예요. 현재 나를 갑자기 지옥의 구렁텅이로 만드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죽은 인간은 죽는 날만 기다리면 돼요. 왜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되지 죽는 인간이 살고자 하는 것은 자기 본질과 어긋나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합니다. 어색하고 억지가 많아요.
목사가 되었으면 ‘저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죽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된다니깐. ‘저 목사거든요. 저 살아야겠는데요.’ 이런 소리, 이런 티를 내면 안 돼요. 목사들이 아무리 감춰도 교인들이 그것을 대번 압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압니다.
교회 헌금이 한 5,000만원 남아돌아서 처치를 못할 때, 그 때는 ‘여러분, 제대로 헌금합시다.?그 때는 괜찮아요. 하지만 돈이 궁할 때는 그런 것이 티를 낼 수 있다고요. 헌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헌금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가 나와야 합니다. 왜? 돈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돈은 생명이 아니고 십자가가 생명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헌금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부의 두 렙돈. 과부는 자기가 생명 얻었다는, 사랑 받았다는 것을 동전으로 냈어요. 이걸 동전으로 냈던 뭘로 내던 주께서는 아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주께서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기도해도 주께서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세요. 하늘나라의 특징은 몰래카메라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좌에 눈이 많다고 해요. 천사들은 눈이 많아서 걸어 다니는 몰래카메라에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윤리, 도덕이 아니라 사랑으로 뭘 해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오기를 지금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추상이 아니고 구체적인데 그 구체적인 것이 뭐냐? 사랑으로 기뻐하는 것이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외에는 다른 구체는 없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주제입니다. 아직 요한일서를 다 안 했지만 주제가 뭐냐? 생명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데 나오는 증거는 뭐냐? 사랑으로만 나온다. 끝. 다른 계명은 필요 없다.
8절을 다시 봅시다.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빛과 어두움을 구분합니다.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렇게 해서 아예 빛이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뭘 우리로 배격하게 하는가 하면, 우리가 따로 챙겨놓는 윤리, 도덕 이것을 완전히 제쳐버립니다. 발로 빌어버리지요. 너에게서 나오는 것, 네가 제공하는 것, 그것은 주께서 아예 받지를 않습니다.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이거거든요.
제가 책을 한 권 가져왔는데요,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인데, 그림이 하나 있는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야경’이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을 보면 특징이 빛이 딱 세 사람에게만 있지요. 그런데 여기 작은 소녀는 빛을 한꺼번에 받습니다. 이것은 화가가 이것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영적인 존재를 암시할 때는 이렇게 빛을 한껏 비춥니다. 이게 진짜 실제 같으면 빛이 모두에게 다 와야 되는데, 딱 중요한 핵심부분만 빛이 한꺼번에 옵니다. 이것은 ‘빛과 야경’이에요. 빛과 어둠의 세계를 구분하는 거예요. 실제로 보면 똑같이 빛이 와도 빛에 속한 사람 따로 있고, 어둠에 속한 사람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둠에 속했던 빛에 속했던 공동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어둠을 만들지도 않고 빛을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은 외부에서 비춰서 ‘너는 내 나라에 속한 인물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빛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빛은 그 사람이 어디를 가도 따라옵니다. 그러면 이 빛에 속한 사람은 어딜 가도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되어 있지 따로 자기의 독자적인 윤리, 도덕 체계를 내지 않게 되어 있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이 책(미학 오디세이)을 보여드리는 것은 요한일서의 빛?어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너희가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빛을 만들어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는, 심지어 지옥에 가더라도 빛이 너를 환하게 빛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꼭 거지 나사로 같아요. 남들 보기에는 거지인데 천사들이 받들어 모시고 가잖아요. 빛의 사람으로 찍은 거예요.
빛이 있고 우리가 있지, 우리가 빛을 만들어내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빛을 받고 누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빛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그 외에는 전부다 어디에 속했다? 어둠에 속했지요. 어둠에 속한 특징이 뭐냐? 사랑을 모른다는 거예요. 사랑을 모르니까 윤리, 도덕을 내세울 수밖에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윤리, 도덕은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했지요? 원인과 결과를 자기가 임의로 뽑아낸다고 했습니다. ‘당신 약국에 어떻게 왔습니까?’ ‘버스타고 왔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어떻게 왔습니까?’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게 평소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평소에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원인을 자기 입맛에 골라서 같은 사항도 계속 뽑아냈습니다. ‘포도를 왜 먹습니까?’ ‘포도가 먹음직스러워서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를 주시니까 먹지요.’ 이렇게 뽑는다고요. 그렇게 뽑는 이유가 ‘내가 이 포도 먹어봤는데 맛 별로다.’ 이런 뜻도 갖고 있고요. '나는 포도가 그리운데 잘 됐습니다.' 이런 뜻도 갖고 있고요, 내가 갖고 있는 내 신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급조해서 그때마다 자꾸 원인, 결과를 매치를 시키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 말이지요. 사람은 그렇게 돼요.
그런데 이 포도를 빛 가운데서 생명의 사랑을 알고 먹는다면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주께서 주셔서 먹게 했습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 이거 성경에 나오지요?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보자기에 있는 것을 왜 먹었느냐? 주께서 먹으라고 하니까 먹었습니다. 저는 그것 먹기 싫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원인을 네 속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살게 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 뭐가 역사한다고 했습니까? 말씀이 역사하기 때문에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들, 빛이라든가 사랑, 생명 이것이 여러분 속에 여러분 허락도 안 받고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빼도 박도 못한 신세로서 빛 된 생활 하고, 어쩔 수 없이 천국으로 끌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뭐 해야 됩니까?’ 이런 질문 많이 하지요? 이 말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교회 발을 끊겠습니다. 라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거든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챙길 것 챙겼으니까 더 이상은 안 다니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제가 뭘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주께서 당신의 쓴 잔을 먹게 하지요. 마시게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소유가, 소유권이 이전되어서 내가 아니고 주님 소유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지요. 십자가의 길로 가게하고, 좁은 길로 가게 하십니다.
‘내가 뭘 할까?’ 하는 것은 어둠에 속한 나의 옛날 버릇이지요. 습관이지요.
옛날에 한 얘기를 다시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한 말인가? ‘먹는다, 입는다, 마신다, 길은 간다.’고 할 때는 동사가 우선이고, 그런데 꼭 앞에 뭘 붙이는가 하면, ‘나’를 붙이지요. 이것은 없어야 돼요. ‘나’라는 것은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내가 아닌 자가 불쑥 나타났을 때 나를 느낍니다.
열심히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 오면 ‘내 밥’ 이렇게 된다고. ‘나’가 등장할 때는 자기 존재를 분명히 밝혀야 될 입장에 있을 때 ‘나’가 생각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영어 문법에서는 반드시 습관적으로 ‘나’를 써요. ‘내가 간다.’가 아니라 그냥 길을 가지요. 길을 가는데, 그냥 ‘길을 간다.’고 하면 되는데, 꼭 앞에 ‘내가 간다. 그가 간다. 그녀가 간다.’ 꼭 앞에 이런 것을 붙여요. 붙일 필요 없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잖아요.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배고픔이 나로 하여금 밥 먹게 했지요.
이것이 문법적 버릇 때문에 마치 내가 밥을 먹기로 작정한 것처럼 생각해요. 나는 이제부터 1주일 동안 오줌 안 눈다. 누가 했나? 내가 했다. 이것은 쓸데없는 짓이에요.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때는 ‘오줌 누가 눴지? 내가 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나는 다시는 나쁜 짓은 안 한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란 말이지요. 오줌을 내 마음대로 못하듯이 나쁜 짓도 다가오면 하게 되어 있고, ‘누가 했지? 내가 했네.’ ‘나는 뒤에 같다 붙는 거예요. 나중에 같다 붙는 거예요. 그런데 습관적으로 자꾸 ’나‘가 앞에 붙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이런 습관이 통하지 않고, ‘그래. 그 변명 다 아는데, 어쨌든 생명이 네 속에 역사하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고 빛의 생활이다. 그게 사랑이다.’ 성경이 이런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완전히 못 본 척 그냥 지나가고 밀어붙입니다. 생명이 너에게 와서 네가 생명의 사람이 되었다. 끝. 이제부터 생명이 네 속에서 너를 이런 쪼로 다뤄 나간다. 그게 뭐냐? 형제를 사랑이 되게 한다. 원인은 찾지 마라. 예초부터 너한테 원인은 없었다. 형제를 사랑하거든 주의 말씀이, 사랑이란 계명이 스스로 네 속에 작용해서 하나의 앵글이 되어 움직여서 그래서 바깥에 사랑이 나온 줄로 알아라.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뭐냐?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5장 18절을 봅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죠. 이걸 지켰다고 하면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또 바보같이 나에게서 찾는 거예요.
사람들이 바보처럼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왜 원인을 당신한테 두느냔 말이지요. 원인은 주님께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하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사람들이 인정해서 세례 요한이냐, 정말 너희들 보기에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한 세례 요한이냐? 그것을 묻는 거예요. 물어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면 ‘나도 그렇고, 예수 믿게 된 너희들도 그런 류의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원인을 땅에서는 찾지 못하고 하늘에 원인이 있는 아주 특수한 사람입니다. 그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4절 4-5절 봅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이제 이유를 알겠습니까? 내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의 원인을 나와 결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나와 결부시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윤리와 도덕이 되 버려요. 윤리, 도덕은 뭐냐? 반드시 나오는 게 ‘내가 지켜야지. 다시는 이런 짓 안 해야지’ 이거예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 해야지요.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원인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이런 소리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지켜야지, 내가 그것을 안 해야지. 내가 반드시 그것을 해야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지. 예배시간이 11신데 10시 50분까지는 반드시 가야지.’ 이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기차가 연착하는데 어쩔 거예요.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안 되지.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교회가 방종하고 교육이 안 되잖아요.’ 교회 교육을 누가 시키시는데요? 왜 원인을 목사한테 찾습니까? 원인은 주께 있는데. 저는 방종하는 사람을 기독교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안에 박혀있는 사람은 방종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자기가 방종하고 싶어서 방종하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은 세상을 이긴 분이 아니고 세상을 한 번도 못이긴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을 이긴 분이 우리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 말씀이 뭐라고요? 오직 사랑. 사랑인데 이 사랑은 내가 지키는 사랑입니까, 못 지키는 사랑입니까? 못 지키는 사랑이지요. ‘내가’를 붙입시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이것이 마지막에 늘상 나옵니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내가 못 지키는 사랑이’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가 우리 죄를 위해서” 뭐가 되었으니? “화목제물이 되었으니” 그것이 나중에 새로운 계명이 되어서 사랑으로 왔단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속에 주님의 화목제물이 용광로처럼 펄펄 타고 있으니까 그 사랑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반드시 이런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대중가요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화장을 고치며’라는 노래가 있는데, 아십니까? 그 노래 재현씨 아십니까? 그 가사에 보면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이 받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 있지요. 2절은 묻지 마세요. 2절은 잘 모르니까. “받기만 했을 뿐--” 노래 어떻게 되더라? ‘왁스’가 부른 노래인데, 그 가사를 보고 제가 큰 은혜를 받았어요. ‘아무것도 해준 것은 없는데 받기만 했을 뿐’
주여, 월급 한 푼 안 나오는 교회 오게 한 것도 이것이 사랑인줄 믿습니? 왜? 이것도 주께서 주신 ‘받기만 했을 뿐’에 해당되는 사랑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왔으니까 돈 내라’ 이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준 이것이 큰 사랑입니다.
노래가 생각 안 나네. 미치겠다 이거. ‘받기만 했을 뿐 -- 그래서 미안 해.’ 맞지요? ‘나 같은 여자를 왜 그리 사랑했는지 --’ 이러다가 다 나오겠다. 마지막 가사가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 이렇게 끝나지요. 잘 모르는 척 하면서 다 했다.
제가 그 노래에서 너무 은혜 받아서 박사교회 있을 때 그 노래 가사를 설교시간에 인용한 기억이 나요. 왜 우리가 평소에 자꾸 불평하는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내가 타협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것 해 줄 테니 사랑 달라는 것이 아니라 허락도 안 받고 그냥 들어옵니다. 빛이 와서 빛이 튀듯이 생명이 우리한테 튀다보니까 내 논리를 뛰어넘는 내 감성과 영이, 호흡이 거기에 반응을 해서, 내 영 속에 주의 사랑이 들어와서 주께서 그 사랑을, 사랑의 냄새가 풍기는 향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받기만 했을 뿐, 해 준 게 없는데’ 이런 식으로.
그 사랑이 왔을 때 요한일서 3장 16절이 성립이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이것을 지키겠다고 나오면 그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시더라도, 형제가 죽을 자리에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합니까? 왁스의 ‘화장을 고치며’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내가 형제를 위해 죽는 자리에 있더라도, 이것은 나의 선행도 아니고 나의 윤리, 도덕도 아니고, 이런 일까지 시키는 것도 주의 사랑의 연장선입니다. ‘받기만 했을 뿐 해준 게 없어 그래서 미안 해’ 진작 죽어야 했는데 이제 죽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생명의 티’입니다. 생명이 팍팍 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자, 2장 11절 봅시다. 미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어두움이란 것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요?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빛도 역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빛이 우리를 지배하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고 할 때, 이것은 우리가 실천할 항목이 아니고 주께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빛 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14절) 이 대목은 설교시간에 잘 때 잠 깨우는데 필요한 구절인데. 이 대목 한 번 찾아봅시다.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이제 빛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빛. 원인이 나한테 없는 것.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어디서 일어나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미 너희들은 죽은 놈이란 말이지요. 죽은 놈인데 빛이 오게 되면 ‘좀 더 잘래요.’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빛이 오면 눈이 부셔서 더 이상 잘 수가 없어요. 깨어서 일어나보니까 이미 자기는 빛의 자녀라. 어둠에 속한 것은 옛날 일이고 지금은 빛의 자녀라.
그렇다면 이 빛이 우리 속에 역사하지요. 뭘로? 주님의 사랑의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역사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생명의 활동하심’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아니고 생명의 활동. 그 활동하심에 우리는 거기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된 겁니다.
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 밑줄 쫙 긋고 별표를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절대로 원인을 자기 행동을 가지고 자기의 현재 있는 것과 원인과 결과를 역지 마세요. 그렇게 역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윤리, 도덕이 되면서 여러분들은 엉터리 같은 죄관이 막 나옵니다.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원인이 나한테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어머니 이름이 뭐지요? 마리아. 그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참 훌륭한 여인입니다. 꼭 우집사님 같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냥 저, 예의상 맨트라는 것 아시죠? 이 집에 왔기 때문에. 하하하하 -- 또 다른 집에 가면 달리 해야지요.
2장 14절 끝부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렇게 나옵니다. ‘사랑’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결국 사랑으로 뭐든지 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것을 하겠다, 저것을 하겠다. 논리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느낌대로 사랑으로 일하는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세상이냐 반드시 그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미워하게 되어 있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같은 인간을 놓고 악마와 하나님과 서로 다투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하나 놓고 둘이 다투는 거예요. 악마는 코끼리 다루고 하나님이 사람 다루고 이것이 아니고, 같은 사람을 놓고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자기 지배 하에 두려고 다투는 입장인데, 처음에는 누가 이겼습니까? 마귀가 이겼지요. 아담 이후에. 그런데 지금은 누가 이겼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겼다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은 아니고 택한 백성에게 해서 이겼단 말이지요.
이겼기 때문에, 그 이긴 특징이 뭐냐?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16절부터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먹고 싶은 것, 잠자고 싶은 것 등 신체적인 욕구를 육신의 정욕이라고 간주했고, 안목의 정욕은 기본적인 생존 외에 명품을 갖고 싶다든지 고급 아파트를 갖고 싶다든지 눈에 보이는 탐욕으로 봤고, 이생의 자랑은 자기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그리니까 남은 다쳐도 나는 다치면 안 되고,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되고 철저히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으로 이 세 가지를 구분했는데, 저는 여기에 대해 동의 못합니다. 일리는 가요. 그러나 동의는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세 가지로 구분될 게 아니고, 같은 말을 세 가지 면에서 했다고 봅니다. 똑같은 경우를 이렇게 저렇게,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면 같은 사과인데 첫 번째 크다, 맛있겠다, 비사겠다. 똑같은 사과를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이처럼 똑같은 것을 세 측면으로 본단 말이지요.
인간은 전부가 육신의 정욕에서 허덕이고 있고, 전부다 안목에 정욕에서 허덕이고 있고, 이생의 자랑거리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거스틴과 저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개인한테 이런 유혹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이런 것을 생산해 내는 사회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이것을 끊어야 되지만 나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거기서 나올 필요가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머리 깎고 산으로 갈 필요 없다니까요. 다만 그 정체를 알고 사랑 안 하면 되잖아요.
어거스틴 같으면 명품을 갖지 말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것이 아니라고 봐요. 명품이 있고, 고급 아파트가 있더라도 그걸 사랑 안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말은 예의상 맨트가 아닙니다.
제?설교시간에 그런 소리 하거든요. 부자가 천국 가기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 세상 논리에 의하면, 이 세상 자체에서 선인과 악인이 있다고 보잖아요. 그러니까 부자가 천당 못 간다면 그러면 가난하면 되겠네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 따로 구획 짓는 논리입니다.
저는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부자가 되든 가난한 자가 되든 사랑 안 하면 된다고 봐요. 그런데 부자가 집이 몇 채 이상 되어야 부자입니까? 스위스는 국민소득이 6만불입니다. 룩셈부르크는 4만 5천불입니다. 미국도 그쯤 됩니다. 우리나라는 1만불 좀 넘어요. 나이지리아나 토고에 가면 국민소득이 100불 혹은 200불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츄리닝만 입고 다녀도 아프리카에 가면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이소룡이 입는 노란 줄 쳐진 옷 알지요? 그것만 입고 다녀도 아프리카에 가면 테러 당할 수가 있어요. 부자라고 옷 빼앗길 수 있단 말입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에는 옷 자체가 갚진 재산이 되어서 옷을 뺏어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겉옷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속옷까지 주어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의 재산이 되니까. 핸드백 빼앗거든 시계도 풀어주라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란 말이 아니고, 세상에서 우리가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프리카 가면 부자 아닙니까? 미국가면 가난뱅이 되는데. 이 돈 가지고.
아까 오다보니까 감자탕 앞집에서 공무원들 파업하고 있어요.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 안 되서 욕합니다. 왜? 나라는 세금이 있는 이상은 월급 안 주는 경우가 전쟁 경우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장사는요 반짝 장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건너편에 새롭게 인테리어 한 집이 생기면 완전히 말아먹기 일보 직전이에요. 아슬아슬하다고.
그런데 그 사람들 파업한다고. 파업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치권을 달라고 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사치가 넘쳤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돈 문제가 아니고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돈 있고 인권 있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설움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돈 없어보세요. 사람이 괴물 되기 일 아닙니다. 한강에 나타난 괴물(영화: 괴물)만 괴물인줄 압니까? 지금도 한강에 자살하려고 괴물들이 쭉 서 있다니까요. 아까 말했지요? 사람이 술만 처먹으면 괴물 된다고. 술만 처먹으면 사람이 괴물 돼요. 사람이 술 먹는 이유가 뭔데요? 사는 게 힘들어서 먹잖아요. 좋아서 먹는 경우는 별로 안 돼요. 대부분 힘들어서 먹어요. 스트레스 안 풀면 내일 일어나지 못해서 풀고 갈려고 해요. 그래서 술집 이름이 뭐냐? ‘속에 천불’이에요. 술도 오래 살라고 이름이 ‘백세주’
세상을 사랑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랑이 밀려오면 세상 사랑할 겨를이 없어요. 세상 좋아할 마음이 안 생겨요. 왜? 시시해서. 이것은 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되지만 실제로 미국 가서 중산층 되는 사람보고 인터넷하면서 ‘당신 행복하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미국의 시민권 따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시민권 따고 난 뒤에 한 몇 개월 지내보니까 그것도 별로 행복 안 해요.
남자들 다 아시지요? 여자들 제일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 군에서 고생하는 졸병 시절에는, 제대하고 나가서 세상에서 머슴살이를 해도 좋으니까 제대만 하면 좋겠다. 했지만 제대하고 나면 머슴살이 못합니다.
제대하고 나면 그 겸손한 마음 싹 없어지고, 직장이 힘드니 어쩌니, 보너스가 적니 어떠니 하면서 사는 거예요. 군인들 훈련 끝나고 이등병 달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치마 둘렀으면 다 미인이다.’ 이게 이등병 때 말이지 제대하고 나면 --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 게 아니고 달리 사랑할 게 없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겁니다. 명품을 사랑하고 골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보다 좋은 게 없어서 그래요. 도박에 빠진 사람들, 도박보다 더 큰 쾌감 있으면 도박하러 안 갑니다. 도박보다 더 짜릿한 게 없기 때문에 도박으로 가는 겁니다. 술 먹는 사람도 그렇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그렇고 다 그래요.
남자들은 도박에 빠지지요. 여자들은 자식 사랑. 이것도 도박 못지않습니다. 사람이 얘기를 낳고 난 뒤에 세상이 바뀝니다. 안산에서 그런 강의 했는데, 애 낳기 전에는 주님 말씀이 어떻고 하지요. 애 낳고 보세요. 주의 말씀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아기는 어디에 속합니까? 세상에 속하지요. 아기보다 더 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기를 최종 사랑으로 보는 겁니다. 이 사랑을 인력으로 못 끊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옵니다.
그러면 아기를 하수가에 버릴까요? 어거스틴 같으면 그래요 돼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아기면 아기를 키우고, 예수 믿고 난 뒤에 그러면 고스톱 치지 말까요? 10원씩 걸고 하면 괜찮아요. 100원 넘어가면 큰 문제가 되는데. 그걸 하더라도 사랑 안 하면 된단 말이지요.
저는 취미로 컴퓨터 바둑을 하는데, 바둑 제 이름이 뭐냐 하면, ‘1초 바둑’이에요. 상대가 20분 생각하고 둬도 나는 1초 만에 놓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좀 당겨서 0.5초 만에 놓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딴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예수 사회] 원고를 생각하든지 이런 것을 할 수 있다고요. 딴 것을 하는 가운데 이쪽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딴 것을 하면서 이쪽을 집중 더 할 수 있어요.
남자들이 담배를 못 끊는 이유가 담배가 좋아서가 아니라 담배를 피우면서 딴 것에 몰두 할 수 있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담배를 피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 이 말입니다. 가수들이 마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말은, 세상은 그냥 가만 두시고 그 안에 그냥 사세요. 하나님께서 무슨 사태를 일으키실지 모릅니다. 사시되 그것이 나의 생명은 아닌 거예요.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회사에서 일하는데 회사는 나에게 더 나은 실적을 요구하지요. 만약 자동차를 판매하는데 지난 달에 5대를 팔았다. 그러면 이 사람은 졸지에 ‘너의 능력은 5대야.’ 이것이 확증되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6대 팔아야 돼요. 회사가 다 그래요. 자꾸 실적이 올라가야 돼요. 그래서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
그래서 여기에 매여 살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려고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저주라고 했지요.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이 뭡니까? 이것이 축복이지요. 그러면 5대 팔았으면 주의 은혜인줄 알고, 그 다음에 또 팔았으면 주의 은혜인줄 알고, 그냥 내가 현제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은혜지요. 저주가 아니에요. 세상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냥 은혜로 있는 것이지만 생명은 아니지요. 생명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는 여기에 있지요.
사회라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쪽에서 요구를 하게 됩니다. 심지어 원치 않는 쌍꺼풀 수술도 해야 되고, 원하지 않는 술판에도 가야 되고, 원하지 않는 노래방에도 가야 되고 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 환상을 꿈꾸고 있어요. 만약 의사이면, 내가 오늘 출근하면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상을 가지고 가는데, 막상 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럴 때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이 있어요. 환상이 한 사람만 가지면 환상인데, 여러 사람이 같이 꾸면 그것이 현실로 변하는 거예요. 세상은 이게 환상인데 이것을 뭘로 보느냐 하면 여러 사람이 다 꿈을 꾸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로 현실이 되 버립니다.
이 현실은 무슨 현실이냐? 너와 나의 환상을 정치적인 타협과 양보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 욕구대로 한다면 만약에 기차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 나 같으면 기차를 세우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창 밖으로 내 던지고 싶은데, 이것은 내 욕구지요. 그래서 타협하지요. ‘담배 끄겠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요. 이것이 바로 너와 나 사이의 양보와 타협입니다.
이것은 부부 사이에도 양보와 타협을 매일같이 합니다. 오늘 일찍 들어오소. 일찍 못 오는데. 몇 시까지? 10시에 올게. 9시까지 오소. 알았다. 이것이 타협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든지 곧이곧대로 한다는 것은 비사회적입니다. 곧이곧대로 한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의로움, 자기 정당함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남의 환상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곧이곧대로 안 됩니다. 타협이에요. 타협하다보니까 어떤 때는 돈을 안 밝히고 싶은데 밝혀야 되고 하는 거예요.
이런 사회 속에 우리가 사니까 우리의 윤리, 도덕이란 것은 그냥 핑계에 지나지 않지 어떻게 그것이 의로움이 되겠습니까? 사회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에 적응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그 사회를 주님처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주님께 용서 받은 것을 네가 부인해서는 안 된다.
저는 이 책을 보고 많은 책들을 나름대로 봤습니다만 항상 뭐가 없느냐 하면, 영적인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마지막 결론이 뭐냐? 타협입니다. 세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 적당히 양보하며 살아라. 그게 최선이다.
맞아요. 최선 맞습니다. 최선인데, 문제는 최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문제예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어쩔래.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면 섭섭하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까. 최선을 사랑하니까 문제예요. 최선을 사랑하면 안 돼요. 최선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최선을 하면서 삽니다. 그냥 사시되 그것을 최선대로 사는 것을 마치 어떤 훈장처럼 여기?사랑하지 마세요. 주님의 화목제물만 사랑해야지 최선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2장 17절 봅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것. ‘있다. 어, 어디 갔지? 오, 또 있네. 어디 갔지?’ 자꾸 뭔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는 이것이 지나가는 거예요.
영화가 개봉되면 꼭 보고 싶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지나가버리니까. 또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니까. 또 과대 선전을 하지요. 보고 싶지요. 안 봐도 괜찮아요. 지나가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계속 지나가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나는 가만히 서 있는데, 옆에 화려한 세상이 지나갑니다. 이것만 보지 마시고, 그렇다고 이것을 피하지도 마시고, 볼 건 보되 사랑의 대상은 지나가는 것이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거하는 주님의 사랑의 나라, 생명의 불꽃, 빛의 나라 그것을 여러분들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가 맨날 꿈만 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꿈을 지워주시고, 이 성경 말씀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우리가 믿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