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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悟思想의 現代的 意味(돈오사상의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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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頓修의 世界(돈수의 세계)
退翁(퇴옹)은 [禪門正路(선문정로)] 제13장에서 밝혔듯이 頓悟漸修(돈오점수)를 혐기하고 있다. 돈오점수를 직역하면, '깨달으면 부처라도 닦음이 필요하다'고 하거나 '천천히 닦으면서 깨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지근하고 모호한 수도방법을 退翁(퇴옹)은 호되게 쳐부수고 있다.
즉 깨달았더라도 계속 닦아야 하고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설법은 못하며 다른 사람이 물을 때 대답도 못한다. 왜냐하면 처음 깨쳤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완숙이나 원만성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初見性(초견성)에 비할 수 있는 미완성의 知解的(지해적)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退翁(퇴옹)이 평석하기를, '見性(견성)은 現證圓通(현증원통)한 究竟覺(구경각)이므로, 十信初位(십신초위)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해오)인 頓悟(돈오)는 견성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처음 답사하여 참으로 굉장한 세계가 있구나 하고 감탄한 것이지,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완연하게 知悉(지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退翁(퇴옹)도 말씀하시기를, '自古(자고)로 禪門(선문)에서 頓悟(돈오)하였다 함은, 甚深極玄(심심극현)한 難問(난문)으로써 시험하여 靑天白日(청천백일)과 같이 明明了了(명명료료)한 正答(정답)이 불능하면 打出(타출)되어 印可(인가)를 받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廓徹大悟(곽철대오), 그것이 頓悟(돈오)의 圓證(원증)일 것이다. 비슷하게 알거나 相似覺(상사각)으로 알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정확하게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가에서 수행도중 喝(갈)을 하거나 방망이로 때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머뭇거림없이, 참구함 없이, 사고함이 없이 곧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卽時的(즉시적)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소리도 주장자를 경상에 두드리면 바로 나고, 빛도 밝히면 바로 밝아지는 것이다.
소리가 시간적 간격을 두거나 빛이 사이를 두고 빛나는 것이 아니다. 소리와 빛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울리고 발광하는 것이다. 卽時的(즉시적) 見聞覺知(견문각지)가 頓覺(돈각)의 實體(실체)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완전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는 禪門(선문)의 頓悟(돈오), 즉 견성과 알음알이로 깨달은 敎家(교가)의 頓悟(돈오)와는 찬양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항상 깨침의 상태에 있는 것은 물론, 卽時的(즉시적) 通時的(통시적) 지혜가 생명하고 있는 세계가 頓悟(돈오)의 경지이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이해된 지식과 궁극적 자각에 의하여 自內證(자내증)한 깨달음과는 하늘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보조스님 定慧結社文(정혜결사문)에서,
우선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적함을 깊게 믿고 이해하여 그 信解(신해)를 의지하여 훈습 수행하는 것이 무방하리라.
고 한 대목에 대하여, 退翁(퇴옹)은 평석하기를 보조스님이 말씀한
이 信解(신해)는 解悟(해오)인 頓悟(돈오)를 말함이니 이는 敎家(교가)의 頓悟漸修思想(돈오점수사상)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普照(보조) 修心訣(수심결)의 돈오점수를 평하기를,
解悟(해오)는 重妄想(중망상)을 벗어나지 못한 虛幻妄境(허환망경)이므로, 客塵煩惱(객진번뇌)가 前日(전일)과 같이 치연히 起滅(기멸)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煩惱妄想(번뇌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悟後(오후)의 漸修(접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가에서는 번뇌망상은 물론이거니와 미세한 번뇌마저 영원히 없어진 절대무심의 大休歇地(대휴헐지)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일체망상이 멸진하고 참다움이 증득된 그 자리, 즉 無心(무심) · 無念(무념) · 無爲(무위) · 無事(무사)의 금강과 같은 禪定位(선정위)가 바로 圓證(원증)의 자리인 것이다.
자못 후대 선객이 돈오란 말로써 교가가 지칭하는 것과 선가에서 말하는 것이 대별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을 동일한 의미로 보아 온 것은 선을 오도하고 佛祖(불조)의 뜻을 그르치는 大罪過(대죄과)가 된다고 하였다.
達摩(달마)가 직접으로 전한 것은 慧能(혜능)이 이어받았으며, 이것은 오직 돈오만 있고, 점수는 없는 것이다. 즉 慧能(혜능)이 頌(송)한 '菩提本無樹(보제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는 본래부터 無(무) · 空(공)의 法性體(법성체)를 悟達(오달)함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가 선가의 정통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편이요, 선문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철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바르게 하려면 오직 선문의 바른 법으로 준수하여 수행하여야 하며 이단잡설에 현혹됨을 벗어나야 한다.
이로써 解悟(해오)는 추重妄想(추중망상)을 벗어나지 못한 虛幻妄境(허환망경)이므로 客塵煩惱(객진번뇌)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煩惱妄想(번뇌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은 뒤에도 닦는 漸修(점수)이다.
그런데 禪門(선문)에서는 추重妄想(추중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第八(제8)의 微細(미세)한 알음알이 마저 永斷(영단)한 구경 무심의 大休歇處(대휴헐처)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妄滅眞證(망멸진증)한 이 無心(무심) · 無念(무념) · 無爲(무위) · 無事(무사)의 金剛大定(금강대정)을 보림하는 것이 長養聖胎(장양성태)이다.
깨달음과 아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이들을 見性(견성)이란 말로 얼버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敎家(교가)에서는 解悟(해오)의 상태밖에 이르지 못한 것을 頓悟(돈오)라고 주장한 이상, 아직가지 完盡(완진)하지 못한 煩惱妄想(번뇌망상)을 제거하여야만이 大休歇處(대휴헐처)에 도달하게 되므로 漸修問(점수문)이 필요함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禪門正傳(선문정전)에서는 일체망상이 完滅(완멸)한 大休歇處(대휴헐처)가 頓悟(돈오)라 하고 見性(견성)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解悟(해오)와 頓悟(돈오)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普照(보조)스님이 [結社文(결사문)]과 [修心訣(수심결)]에서는 荷澤(하택) · 圭峯(규봉)의 頓悟漸修(돈오점수)를 達摩正傳(달마정전)이라고 주장하다가 [節要(절요)]에 와서는 荷澤(하택) · 圭峯(규봉)은 知解宗徒(지해종도)로서 曹溪嫡統(조계적통)이 아님과 동시에 그의 사상인 頓悟漸修(돈오점수)는 依言生解(의언생해)하는 敎家(교가)요, 離言忘解(이언망해)하는 禪門(선문)이 아니믈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은 커다란 사상의 전환인 것이다.
退翁(퇴옹)의 禪門正路(선문정로)에 의하면 普照(보조)의 저술 연차를 [結社文(결사문)]을 지은 것이 33세, [節要(절요)]는 입적하기 전 해인 52세 때이다. 그런데 [修心訣(수심결)]은 撰述年代(찬술년대)가 없으나 그 내용이 [結社文(결사문)]과 동일하므로 초년에 저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초년에 지은 結社文(결사문)과 修心訣(수심결)에서는 禪敎(선교)를 혼동하여 敎家(교가)쪽에서 주장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頓悟漸修(돈오점수)를 達摩禪宗(달마선종)이라고 하였으나, 慧解(혜해)가 增高(증고)함에 따라 만년에는 앞의 過誤(과오)를 해맑게 깨치어 禪宗(선종)은 徑截門(경절문)임을 說破(설파)한 것이다.
普照(보조)가 만년에 이르러서 依言生解(의언생해)하는 것이 頓悟漸修(돈오점수)하는 知解(지해)임을 명백히 밝힌 것은 禪門(선문)을 위하여 중요한 轉機(전기)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려 禪宗史(선종사)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禪家(선가)에서 상용어로 회자되던 頓悟漸修(돈오점수)가 언어에 의하여 了解(요해)되는 知識組織(지식조직)으로서 본래의 究竟本覺(구경본각)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普照(보조)가 활동할 때에 이미 頓悟漸修(돈오점수)가 禪宗(선종)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普照入寂(보조입적) 以後(이후) 8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普照(보조)를 빙자하여 頓悟漸修(돈오점수)를 禪宗(선종)이라고 주장하는 禪僧(선승)이 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退翁(퇴옹)은 강력히 질타하고 있다.
그리하여 退翁(퇴옹)은 頓悟漸修(돈오점수)를 祖述(조술)한 普照 自身(보조 자신)이 頓悟漸修(돈오점수)의 元祖(원조)인 荷澤(하택) · 圭峯(규봉)을 知解宗師(지해종사)라고 斷言(단언)하였으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頓悟漸修思想(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은 전부 知解宗徒(지해종도)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禪(선)을 주로 하는 曹溪宗(조계종)에 아직까지도 頓悟漸修(돈오점수)의 行法(행법)은 강하게 선을 그어져 오면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頓悟見性(돈오견성)이 禪(선)의 구경처가 되어야 함을 알지 못하고 解悟(해오)의 논리로서 닦아가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이것은 退翁(퇴옹)이 어떤 형태로 敎示(교시)하던 간에 오늘날 한국 禪門(선문)이 흘러온 물결에 연유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조계선의 巨峯 普照(거봉 보조)에 隨應(수응)하여 수행하는 것을 한 법으로 삼아오니 자연히 頓悟漸修(돈오점수)의 수행이 禪門山脈(선문산맥)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이처럼 普照禪(보조선)이 한국선종사에 미친 영향이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禪敎(선교)를 혼돈한 초년의 저술인 [結社文(결사문)]과 [修心訣(수심결)]로서 頓悟漸修(돈오점수)의 大宗(대종)으로 추앙되는 普照自身(보조자신)도
만년에는 敎外別傳(교외별전)은 逈出敎乘(형출교승)이라 宣說(선설)하여 頓悟漸修(돈오점수)를 知解(지해)인 死句(사구)라고 규정하고 禪宗(선종)의 徑截門活句(경절문활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거늘,
만약에 頓悟漸修(돈오점수)를 禪宗(선종)이라고 다시 云謂(운위)한다면 이는 禪宗正傳(선종정전)의 반역일 뿐만 아니라 普照(보조)에 대하여도 몰이해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그러므로 敎外別傳(교외별전)인 達摩兒孫(달마아손)은, '禪門(선문)의 最大禁忌(최대금기)인 荷澤(하택) · 圭峯(규봉)의 知解宗徒(지해종도)가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普照(보조)는 禪(선)의 理解(이해)가 처음에는 잘못 들어갔지만 [看話決疑論(간화결의론)]을 저술할 때는 禪宗正傳(선종정전)의 길로 들어왔다고 하였고 또한 禪(선)을 參究(참구)하는 者(자)들도 반드시 이 길을 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退翁(퇴옹)은 禪門正路(선문정로) 15장인 多聞知解(다문지해)의 끝머리에,
頓悟漸修(돈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해오)인 圓頓信解(원돈신해)가 禪門(선문) 최대의 禁忌(금기)인 知解(지해)임을 明知(명지)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禪門正路(선문정로)]의 本分宗師(본분종사)들은 추호의 知解(지해)도 이를 佛祖(불조)의 慧命(혜명)을 단절하는 邪知惡解(사지악해)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一言半句(일언반구)도 知解(지해)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普照(보조)는 圭峯(규봉)의 解悟思想(해오사상)을 知解(지해)라고 비판하면서도 [節要(절요)] [圓頓成佛論(원돈성불론)] 등에서 解悟思想(해오사상)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普照(보조)는 만년에 圓頓解悟(원돈해오)가 禪門(선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圓頓思想(원돈사상)을 고수하였으니, 普照(보조)는 禪門(선문)의 표적인 直旨單傳(직지단전)의 本分宗師(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思想(사상)의 主體(주체)는 華嚴禪(화엄선)이다.
라고 하여 한국선종사에 새로운 地平(지평)을 개연한 것이다. 여기서는 普照(보조)의 선사상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普照(보조)가 지향하였던 敎禪理解(교선이해)를 바르게 인식하자는 생각이 앞선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4. 현대에 있어서 頓悟의 位置(...돈오의 위치)
退翁(퇴옹)이 저술한 [禪門正路(선문정로)]는 19章으로 엮어진다. 章別(장별)마다 특성이 있는데, 참다운 마음을 발견하고 그 참다운 마음으로 바르게 생활하여야 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禪(선)을 수행하는 衲子(납자)에게 교시하는 것이 아니라 禪(선)의 正統(정통)이 오도되고 있으므로 禪(선)이 현대에 와서도 정통적으로 전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며 와전된 보수적 선수행을 혁파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길이 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합리적이고 방편적인 방법으로 禪(선)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禪(선)과 건강, 禪(선)과 서예, 禪(선)과 茶(차), 禪(선)과 詩(시)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선과 관계되는 무엇이지 一如(일여), 卽如(즉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茶禪一如(차선일여), 詩禪一如(시선일여) 등으로 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선과 관련되어 나오는 어떤 상황일 것이다.
普照國師(보조국사)의 사상 속에 華嚴的(화엄적)인 것이 농후함으로 선과 화엄이 융섭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선이라 하지 아니하고 화엄선이라고 명명하였는데 하물며 禪詩(선시) · 禪書(선서) · 禪茶(선다) · 禪武(선무) 이것들은 선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된 '詩 · 書 · 茶 · 武'일 수 있어도 禪(선) 그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禪(선)은 생활 속에 있어서 아니면 현대에 있어서 不可能(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질 것이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倫理(윤리)마저 파기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즉 '父母(부모)를 살해한 大逆重罪(대역중죄)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대반야)를 비방한 罪(비방)는 참으로 참회하기가 極難(극난)하다'라고 설파한 것도 있다. 사실 부모를 살해한 것이 극악무도한 대죄인데 이것은 참회하면 가능하고 득도를 사칭하여 반야를 비방한 죄과는 참회하여도 구제 받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은 윤리성의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표현이 바로 禪(선)만이 특유하게 갖고 있는 언어논리인 것이다. 이것은 뒤바꿔 설명하면 대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일들도 法軌(법궤)에 맞추어 보지 아니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를 무서워하고 진리에 맞추어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殺父殺母(살부살모)가 가능한 것인가. 즉 得道(득도)하지 못하고 得道(득도)하였다 함은 增上慢(증상만)인지라 大般若(대반야)을 비방함이니 懺悔(참회)로써 통하지 못한다.
빈궁한 賤人(천인)이 임금이라고 거짓 외치고 다니면 자기 일신만 망치게 되지만 득도를 가장하여 法王(법왕)이라 사칭하여 행법하고 다니면 無數衆生(무수중생)을 기만하게 되어 사악한 길로 끌어들이니 그 죄상은 千佛(천불)이 出現(출현)하여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邪見(사견)을 내어 놓고 이것을 如實(여실)한 生活(생활)로 引用(인용)하려는 사람들의 作戱(작희)인 것이다.
그런데 禪門(선문)에서는 이러한 邪見作戱(사견작희)를 용납하지 않는다. 즉, '見性成佛(견성성불)하면 一得永得(일득영득)하여 스스로의 寶藏(보장)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家寶(가보)를 운용하는데 그 수용함이 한계가 있겠는가[환悟心要(환오심요)]'라는 대목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절대적 완성자가 되면 한번 얻어 깨달은 것으로 영원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의 무한동력으로 항상 일용할 동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현하는 무한동력은 아무리 오래 쓴다고 하여도 무제한의 동력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심성을 참다운 見性(견성)으로 발현하게 한다면 그것은 무한동력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정된 동력을 쓰고 나면 다시 충전하거나 다른 연료로 바꾸어야 하는데 한번의 깨침으로 무한동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생활의 위대한 轉機(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깨침이 自我(자아)에 定坐(정좌)한다면 그 自我(자아)는 무한한 청정성에서 生命(생명)할 것이다.
圓頓(원돈)이 禪(선)으로 성취되면 두 번 다시 퇴몰하지 않는 不生 無生(불생 무생)의 경지에 참입하여 일체를 전용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眼前(안전)에 현현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退翁(퇴옹)의 교설은 고원한 禪說(선설)로서 일관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세속적인 사람으로는 그 법문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그러므로 스님이 한 때 오늘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간결한 법문이 있었다.
즉,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주체이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성을 잃고 일상의 수레에 이끌려 가고 있다. 이것은 물질만능에 의해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財色(재색)을 보기를 독사보는 것 같이 하라'고 하였다.
물질로는 인간의 공허를 메울 수가 없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는 오직 자기의 심성 속에서 되찾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를 本分回歸(본분회귀)의 순례자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만이 구제할 수 있고 자각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은 이러한 자각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며 자각하는 그 목적이 무엇이며 중생은 영원히 중생인가에 대하여 '佛法(불법)에는 중생이 없다. 이는 중생의 허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자아의 허물을 발견하여 본래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法(법)이나 道(도)가 모두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며 경전은 단지 참된 면목을 일깨워 주는 방편일 뿐이다. 경전을 읽지 않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길이 있으니 이를 불러 敎外別傳(교외별전)이라고 한다'고 갈파하였다.
현대인은 문제에 얽매이고 남의 사상에 가탁하여 살려고 한다. 남의 사상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것은 남이 解知(해지)한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다. 불교의 교설, 圓證(원증)의 세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교설이고 사상이며 착함이나 완성으로 이끄는 방법밖에 되지 않는다.
그 세계에 스스로 참입하고 스스로 증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禪修行(선수행)의 길이요 頓悟頓修(돈오돈수)의 길이다. 그러므로 禪(선)은 교수하는 것이 아니고 직시하여야 한다. 우주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禪(선)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내면세계에서 밝아온 光明體(광명체)인 것이다. 중생은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뭇 생명체가 하나라면 거기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본래면목이 있는 것이다.
禪(선)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달관하려는 心行(심행)인 것이다. 현상은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본질은 생명의 근원을 투시함은 물론 禪行(선행)을 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원으로 일치하는 본원력이 발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禪(선)의 구경으로 이룩된 힘은 佛力(불력)이요, 菩薩力(보살력)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알음알이로 되는 인식적 논리이거나 또는 동정심으로 구원하는 윤리적 봉사가 아닌 것이다.
禪(선)은 자기 생명의 실현임과 동시에 일체 생명의 평등성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나 논리, 사회적 상관관계에서 부여될 수 있는 윤리적인 봉사가 아닌 것이 禪(선)이 짊어져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무조건 나아가야 한다.
조건에 의미를 두거나 조건에다 자기의 면목을 내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禪(선)에 參入(참입)한 것이 아니다. 다음의 자기에 어떠한 일이 닥친다 하여도 그 조건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현재의 모든 조건을 상대하며서 해결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不退轉(불퇴전)의 精進(정진)이며 문제의식에 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이다. 그러므로 禪(선)은 現存性(현존성)의 次元(차원)에서 歷史的 存在(역사적 존재)로서 大我(대아)가 되려한다. 이것은 歷史(역사)를 책임의식으로 담당하는 행동선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退翁(퇴옹)이 이와 같은 행동선으로 대경을 척파하지 아니하였다면 과거의 역사 앞에서나 지금의 실존 앞에 사악한 행위가 난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退翁(퇴옹)의 행동선이 과거의 시간 속에 일어났던 모든 문제들, 또한 현실 앞에 파생되었던 모든 不義(불의)를 혁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세간적 입장에서 말하기 좋아한다.
왜 退翁(퇴옹)이 山下市井(산하시정)에 내려와 下垂(하수)하지 않는가고, 禪(선)이 山(산) 아래 내려오면 禪(선)의 獨悟性(독오성)은 물들고 만다. 山山水水(산산수수)하는 그 自在性(자재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山(산)과 水(수)를 別異(별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山(산)과 水(수)가 六相圓融(육상원융)과 無餘涅槃(무여열반)을 明顯(명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頓悟(돈오)의 現代的 意味(현대적 의미)는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절차가 아니고 또한 깨달음이 끝이 난 解證(해증)도 아닌, 깨달음이 常日恒光(상일항광)하는 如來體顯(여래체현)인 것이다.
口頭禪(구두선) · 生活禪(생활선) · 禪文化(선문화)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禪(선)으로 解悟(해오)하는 것이지만 頓悟(돈오)는 중생을 혁명케하며 一切煩惱漏垢(일절번뇌루구)가 頓除(돈제)되어 두 번 다시 無明業妄(무명업망)으로 생활하지 못하게 하는 光明(광명)의 世界(세계)다.
이러한 세계를 논리적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닦으려고 하니 사회적 · 윤리적 · 인간적 갈등이 선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념으로 야기되는 모든 갈등 · 소외 · 고독 · 번민이 일시에 사라져 天眞童(천진동)의 心光(심광)이 서로를 비추는 비로광이 되고
중생이 佛性(불성)을 구현하는 무조건적 階位(계위)를 인지하는 宇宙的(우주적) 연기법인『 (n-1)n÷2 』의 衆生佛思想(중생불사상)이 바로 頓悟(돈오)의 現代的(현대적) 이해가 되어야 한다.
참고>:『 (n-1)n÷2 』 이것은 연기법을 수식으로 풀어본 것이다. 서로 상대되는 것을 n으로 놓고, 이 공식에 대입하여 상대적 관계성을 알 수 있다. 즉 n=3이라 하면 〔(3-1)×3〕÷2 =3 이 된다. 즉 A · B · C가 서로 횡적 · 종적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바가 세 번 있다는 것이다. n이 ∞가 되므로 ∞관계, 즉 무진연기가 성립되는 것을 나타낸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