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덕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고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세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 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친구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상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말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이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默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길래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그리고 온갖 나무잎이 욱은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殿堂)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 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는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가고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은 혹 자길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賢人)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 이양하 수필집 <신록예찬> 중에서 * 이양하(1904-1963) 영문학자. 수필가 서울대학교 교수역임 학술원 회원 저서 : 수필집 '이양하 수필집' '나무' 시집 '마음과 풍경' 외
작품 평 (본 난 비평은 윤재근 교수의 창작수필 이론 <말하는 에세이>와 필자의 <창작문예수필이론>에 근거하여 <창작문예수필>의 이론적 근거를 텍스트를 통하여 확고히 다지는 한편 창작실험수필작품의 제작을 장려하는 목적에서 행해집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이 아직 완성된 문학형식이 아니고 현재도 진화가 계속되고 있는 새로운 문학양식일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아직 <창작문예수필>을 '창작문학'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험'이라는 이름을 덧붙입니다.)
필자는 자신의 <나의 창작문예수필 이론>에서 '수필은 창작 대상의 본질에 대한 시적(창조적) 감동을 산문으로 형상화 하는 문학이다'라고 하였다. 이양하의 <나무>는 나무의 삶의 양상을 통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최선의 덕, 혹은 현인상을 보고 그 감동을 나무를 의인화 하는 수법을 통하여 형상화 해 낸 수작이다. 그러나 두어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필자가 이 작품을 '이 한편의 수필'에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이양하의 창작성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점과 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문을 통해서 필자 자신 우리 수필문학의 현주소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신의 창작문예수필 이론을 통해서 창작이란, 문학창작뿐 아니라 예술 전반이 본질상 비유의(넓은 의미의) 창작이라는 견해를 밝힌바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신적인 창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창조하고자 하는 대상 그 자체를 직접 창조한다. 그것이 나무면 나무 그 자체를, 돌이면 돌 그 자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것도 그것 자체를 창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한 인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창작 대상 그것 자체가 아닌 그것을 의미 할 수 있는 제3의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해 낸 예술 창작의 방법은 '비유적 창조'라는 것이다. 비유란 사물 자체가 아니다. 어떤 사물을 대신 할 수 있는, 혹을 그것을 의미 할 수 있는, 그것의 의미 표상(表象), 혹은 상징일 뿐이다. 문학적 인물의 창조 행위는 글자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같은 방법을 반복하여 여러 개의 문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인물을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 창조한다. 즉 문학적 인물은 '문장이라는 표현술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인물'이다. 이 때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는 인물'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 그 인물은 실재하는 인물인가? 말 할 것도 없이 아니다. 그는 표현되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표현되고 있는 수단 곧 문장을 지워 버리면 그 인물은 영구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따라서 표현되고 있는 인물이란 사실의 존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그림자를 문학적 용어로는 '비유적 존재'라 한다. 혹은 상징적 존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문학 혹은 예술적 창작 행위에 '창작' 혹은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 같은 용어의 사용이 매우 부적당함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언어 표현술의 한계임을 또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의 창조 행위란 사실상 신적 창조의 모방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분명한 사실은 예술 창작이란 본질상 비유의 창작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한 예술 창작의 방법이다. 앞으로 더 나은 혹은 새로운 창작방법이 발명되기 까지는 모든 예술은 비유적 창작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양하의 <나무>는 무엇을, 혹은 어떤 비유적 존재를 창작하고 있는가? 본고 서두에서 필자는 '이양하의 <나무>는 나무의 삶의 양상을 통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최선의 덕, 혹은 현인상을 보고 그 감동을 나무를 의인화 하는 수법을 통하여 형상화 해 낸 수작이다' 라고 하였다. 이양하는 나무 뿐만 아니라 달과 바람과 새 등도 의인화 시켜서 표현해 내는 일에 성공하므로 나무의 의인화를 더욱 풍부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 위에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와 같은 시적 정감의 산문적 형상화를 통해서 창작성을 더욱 풍부하게 살찌게 하고 있다. 이 같은 풍부한 의인화와 산문시적 형상화의 문장이 작품의 일 부분이 아니고 서두에서부터 종결어에 이르기 까지 전체 작품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양하의 <나무>는 흠 잡을 데 없는 창작수필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졸고 <나의 창작문예수필 이론>을 집필하면서 조사 연구한 작품들 중 이양하의 <나무>를 통해서도 배운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두어가지 문제점을 통해서다. 그 첫째는 서두문장과 종결어 문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이양하는 "나무는 덕을 가졌다."는 문장으로 서두 문장을 열고 있다. 그 서두 문장을 받는 다음 문장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라는, 누가 보아도 당장에 나무의 의인화 문장임을 알아 볼 수 있는 문장이 시작 되어 이하 종결어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의 문장이 의인화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는 "나무는 덕을 가졌다."는 문장은 의인화의 문장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그것이 의인화의 문장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무는 덕을 가졌다"의 문장의 화자는 직접 작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이하의 의인화의 문장에서는 화자로서의 작가는 의인화된 나무 뒤로 숨고 의인화 된 나무가 화자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의인화 수법의 작용이며 또한 그것이 의인화 수법을 차용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무는 덕을 가졌다"의 첫 문장의 화자가 필자가 본대로 직접 작가를 시시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나무는 덕을 가졌다"는 문장은 의인화의 문장이 아닌 평문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이양하는 왜 전체 작품이 의인화로 채워진 작품에서 첫 줄 한 문장만을 의인화의 문장이 아닌 평문 문장을 썼을까? 필자는 그 대답을 종결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작품의 종결어 문단은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이하의 문장이다. 이양하의 나무는 이 종결어 문단에 이르기 까지 나무의 의인화를 줄기차게 그리고 아름답고도 성공적으로 창작하여 오고 있다. 그 동안 한번도 작가가 얼굴을 내민 일도 없고 서두 문단의 첫 줄에서 보여준 평문 문장이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종결어 문단 말미에 이르러 느닷없이 작가 자신이 얼굴을 불쑥 내밀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이양하의 <나무>에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화자 '나'가 나오는 곳은 이곳 한 곳 뿐이다. < 나무>의 독자는 서두 문단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첫 문장을 평문 문장으로 읽은 직후 의인화의 문장이 곧장 시작되고 있는 점에서 움찔하고 시선에 한번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너무나도 아름답게 전개되고 있는 나무의 의인화 세계를 감상하며 즐거운 문학 세계를 여행 할 수 있다. 나무의 친구들인 달과 바람과 새에 이어 독자 자신도 나무와 친구가 된듯한 느낌마저 받을 정도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자기, 처음부터 한번도 직접적인 '나'라는 얼굴로 등장한 일이 없던 작가 자신이 작품 말미에 이르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므로 독자가 이때까지 빠져 있던 아름다운 작품 감상을 깨트리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뒤에,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라는 전혀 그 문장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족(?)까지 달고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서두의 "나무는 덕을 가졌다."와 종결어 문장,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의 전체문장이 없었다면 어떨까? 이 두 부분의 문장이 없었다면 이 작품 <나무>가 미완성의 작품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 두 부분이 없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였을 것이다. 필자가 본 이 같은 비평이 맞는 것이라면, 그러면 이양하는 왜 이 같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일까? 필자는 이 같은 의문을 통해서 우리 수필문학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즉 우리는 지금 창작이론이 전무한, 그러므로 수필 작가들이 전혀 학문적 지원을 받은 일이 없는 상태에서 수필 창작을 1백년 동안 계속 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된다는 점이다. 전체 작품의 거의 99프로가 의인화의 문장으로 된 작품에서, 그리고 그 같은 의인화의 문장을 통해서 작품의 주제를 충분히 형상화 하고도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창작한 작가가 무엇 때문에 서두 문장 단 한 줄만은 평문 문장으로(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는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보다 더욱 더 큰 의문은 의인화의 문장 그대로 끝을 냈어도 작품에 아무 손상을 입히기거나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로 주제의 형상화가 충분이 이루어져 <나무>의 '나무'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나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이양하만의 <나무>로 충분히 독자적인 생명을 얻고도 남음이 있는데 왜 처음부터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얼굴을 내민 일이 없었던 작가가 갑자기 얼굴을 내밀고 튀어 나오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필자는 우리 수필문학은 한번도 객관적인 창작문예수필 이론이라는 학문적 지원을 받은 일이 없는 상태에서 작가 개개인의 독자적인 내재적 작법에 의해서 씌어져 온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 해 본다. 만약 필자의 그 같은 견해가 맞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우리는 서둘러 창작문예수필 이론은 정립해야 되지 않겠는가? 두 번째로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점은 문단 나누기다. 작품 <나무>는 전체 작품이 다섯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하나 하나의 문단이 긴 편이다. 특별히 두 번째 문단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이하의 문단은 전체 작품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가 사용한 텍스트는 범우문고 2001년 판에 실린 작품이다. 혹시 다른데 편집되어 있는 작품은 다른 모양이 아닐까 해서 삼성출판사 편 '한국현대문학전집' 수필선집 편에 보았는데 그곳에서도 문단이 똑 같은 모양의 다섯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양하는 왜 하나의 문단을 이렇게 길게 묶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몇 번을 되 읽으며 그 이유를 찾아 보았지만 문학적인 바른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양하의 다른 작품들은 어떠한가 하여 같은 책에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의 문단을 살펴본 결과 다른 작품들의 문단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문단보다 길게 묶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양하 만이 문단을 길게 묶어야 할 무슨 특별한 문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문단 나누기는 문장 공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 항목이다. 문학이란 언어를 재료로 삼는 예술활동이다. 언어란 말이다. 말은 끊을 때 끊을 줄 알고 이을 때 이을 줄 알아야 뜻이 바로 통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를 글자로 적은 문장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같은 기초적인 실수들이 왜 아무 지적도 받지 못한 채 1백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고 있는가? 만약에 시인이 그렇게 글을 썼다면, 소설가가 그렇게 글을 썼다면 시와 소설 평론가들이 가만이 있었겠는가? 말 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시와 소설은 평론가들이 계속 그 같은 문제들을 놓치지 않고 지적해 오고 있다. 그런데 왜 수필은 꿀 먹은 벙어리인가? 말 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집을 바로 짓든 꺼꾸로 짓든 객관적 설계도가 없는데 누가 무슨 말을 어디다 기대어서 할 수 있겠는가? (李寬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