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세상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도, 아무리
높은 명성을 드날리던 사람도 숨 끊어져 죽어버리면 그 존재
를 냉혹하리만큼 지워버리는 거대한 바다였다. 생전에 큰 위
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어도 세상은 아무런 이
상도 탈도 없이 태연하고 무표정하게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하물려 전향한 장기수 하나쯤이야..... 그 허무감 앞에서 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하는
회한이었다. 그런 감정의 반복과 교차가 어리석은 것인 줄 알면서도
떼칠 수 없었고,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사상적 삶'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했었던 자기 겪을 수밖에 없는 비애였다. 분명한
목표는 분명한 성과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65)
이 아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윤혁의 가슴 속에는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경희와 기준이는
푸른 초원만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었고,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이기도 했다. 가슴에 그토록 생명감
넘치는 황홀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 감각이
샘솟는 것을 오로지 경희와 기준이 남매가 준 선물이었다. 찌들고
메말라버린 가슴에서 그런 감정이 새롭게 살아오른다는 것은 스스로도
몹쓸 정신신경증에 걸리즌 않았을 것이다. 죄수번호 위에다가 또 네모난
빨간 헝겊까지 붙여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독방 신세였다.
한 평이 미처 못 되는 독방은 천상 시체가 눕는 관처럼 협소했다.
71)
요 귀여운 것들이 없었더라면 내 세상살이가 얼마나 팍팍했을 것인가.....
이 생각과 함께 문든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 박동건도 이런 아이들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신은 이 애들 남매를 사흘거리로 만나며 삶의 새로운
활기를 얻었던 것이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이들 남매와 정을 나누면서
웃음 절로 벙그는 기쁨과 즐거움만 맛보는 것이 아니었다. 자꾸 정이
깊어가면서 두 아이의 친할아버지 대하듯 감겨오고 의지하는 것을 느끼며,
내가 오래 살아야지, 하는 생각까지 불현듯 하고는 했었다. 이 아이들을
알기 전에는 오래 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칙칙한 안개가
낀 우울한 나날이 이 아이들을 알고부터 햇살 화창한 나날로 바뀐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박동건을 잡아간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낸 것은 이 아이들이
발휘해온 마력의 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박동건에게도 이런 아이들을
갖게 해줄 것을... 뒤늦은 후회가 일었다.
96)
"예, 그 비판은 학자들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비판합니다. 그 일당독재는 부르주아 계습의 발호를 차단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제멋대로 독주하는 당에 대한 무비판과 무견제가 당의
절대권력화를 촉진하게 되고,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한다는
보편적 진리에 따라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정치가
됐으려면 최소한 양당제는 했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억지로 실천하려고 한 오류를
비판합니다. 인간은 인가의 정치적 이상에 맞추어 개조할 수 있는 존재이기
이전에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본능적 존재이며, 인간의 이기욕이란
식욕과 성욕에 뒤지지 않는 중대한 본능인데 인간을 개조하려는 정치적 욕심은
그 본능을 무시함으로써 인간을 개조하려는 정치적 욕심은 그 본능을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노동 욕구를 파괴했고, 그 비극은 사회 전체의 파멸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당이 인민들의 균등한 행복을 위한다며 당의
일방적인 계획대로 직업을 배치하고 행동을 통제한 어리석은 자만을 비판하였습니다.
인간이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모두가 제각각 개성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성품이 다른데, 인간을 마치 기계나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해서 자율성을 박탈하고
창조성을 파괴함으로써 성취욕을 꺾음과 동시에 노동의 질적 저하, 게으른 타성을
만연시켜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권은 평등하되 능력은
평등할 수 없는데, 그 간단명료한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당의 무오류'라고 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은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서 이미 확실하게 입증된 사실인데, 아무리
두뇌 명석하고 이론 탁월한 사람들이 모여 공산당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당은 무오류'
라고 선언한 그 당당함이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적으로 입증한 오만이 아닐 수 없고,
그런 당의 절대 신성시 위에서 당은 봉건권력화했으며, 당원들은 그 우산 아래서
반인민적인 관료주의에 취해가며 부패와 타락의 길로 치달아갔으니 몰락은 필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11)
책은 두꺼운 만큼 묵직했다. 7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 그만큼 호치민의 생애가
파란만장하고 극적이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베트남의 형편은 어떤가.
사회주의 혁명을 하고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경제는 파탄지경이라고 알려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주의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나라마다 그 지경이
되는 것일까. 사회주의는 애당초 인간 사회를 이끌 수 없는 이념이고 체제였을까.
그 체제가 건재할 수 없는 것은 사회주의의 결함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의 결함 때문일까.
사회주의의 결함 때문이라면, 그 결함은 도대체 무엇일까?
119)
역사, 그것은 인간의 삶이었다. 이데올로기, 그것도 인간의 생산물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이데올로기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그런데 그 발명품은 당초의 목적대로 쓰이지를 못했다. 흡사 칼이라는
발명품처럼, 똑같은 칼을 주부가 들었을 때와 도둑이 들었을 때......
결국 각국의 공산당원이란 칼이라는 유익한 도구를 잘못 든 도둑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인간...., 인간....,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원들의 부패와 타락의 뿌리는
이기주의다. 이기성이라는 본능의 힘은 무섭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미덕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리고 남도 위할 줄 알는 이타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자고한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타락하고, 사회
권력을 형성해 횡포를 자행하고, 심지어 산을 내세워 살인을 합리화하는
전쟁까지 불사해온 것이 인류사였다. 그 막대한 해독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찍이
종교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이기심이라는 본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당원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 인간이란 본능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럼 인간의 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족 존재이며,
이성의 힘은 능히 본능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가. 그 이성의 힘에 의해
마르크시즘이 탄생했고, 그 이상세계를 반드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내가 3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그냥 당원으로 살았다면 나도 인민들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인가. 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이성이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그 '인간의 한계'가 사회주의 몰락의 절대 원인은 아닐까........
164)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강대국들에게 억압당하고 짓밟혀온
역사나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베트남에 비해 좀더 억울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베트남전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국제사회의 비판이 이루어져 미국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6.25 는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한 전쟁이었는데도
그냥 묻히고 말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비교하면, 베트남은 8년 전쟁 동안 백80만이
죽었지만, 우리의 6.25는 단 3년 동안에 3백만이 죽었습니다. 물론 6.25의
잔혹성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묻힌 것은 우리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1950년대만 해도 세계의 인식 수준이 1970년대만큼 국제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베트남은 민족통일을 이룩해
강대국들의 억압에서 벗어났는데, 우리는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여전히
분단되어 강대국들의 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 또 죄가 됩니다."
182)
"제 생각으로는 사회주의는 아까운 세월을 허송만 했는데, 딱 한가지 공을 세운
게 있습니다. 그건, 자본주의를 강화시켜준 역할입니다."
출판사 사장의 말이었다.
"거 무슨 유식한 소리야?"
강민규가 출판사 사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유식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그 쉬운 말도 못 알아들어? 냉전시대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한테 안 먹히려고 사회복지제도를 얼마나 강화시켜왔어.
만약 그런 노력 하지 않고 돈 놓고 돈 먹기로 자본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라면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더 먼저 무너져버렸을 거다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