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회(rebirth), 환생(transmigration)의 개념이 볼교교리에 있다고 해서 동일시하는 것에서 오는 오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윤회나 환생에 대한 문제는 불자나 여러 학자들도 오해하기 쉬운 이론인데, 사실 각자 석가모니께서는 윤회, 환생에 대한 문제 보다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하는것을 가르치는 것에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범부로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후생에 관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각자인 석가모니에게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했으리라 경전의 기록을 통해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이론에서도 윤회에 대한 예기가 체계적으로 전개 되지 않고 또, 그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공부해보자면 윤회를 한다고 가정했을때 "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한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석가모니께서는 윤회의 비유를 들어 "불이 켜진 한 초"가 있고 "불이 켜지지 않은 한 초"가 있는데 불이 켜진 초를 켜지지 않은 초에 가져다대면 그 불은 옮겨가 붙게 되는데 이것을 윤회의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초에서 다른 한초로 옮겨간것은 무엇입니까? 앞의 초에서 불이 옮겨 왔으니 이 두 촛불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없지만, 또 엄연히 두초는 다른것이므로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현상은 있으되 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전에 보면 팔만사천지옥과 천당을 설하면서 그 업에 따라 지옥도 가고 천당도 간다고 하는데 그것은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의 기능이라고 봅니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아이가 불집안에 있는데 그아이는 불이 붙은 것을 보고 무섭다고 나오질 않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한 꾀를 내어 아이에게 나오면 맛있는 사탕을 주겠다라고 꼬셔서 아이는 사탕의 달콤함을 생각하며 불에서 뛰어 나오게 됩니다. 이때 이 어머니의 역할은 아이를 구하겠다는 선핸 행위입니다. 이러한 선행의 기능이 종교에는 필요하다고 보며, 윤회와 전생의 문제도 이러한 계도적 측면에서 설정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정한 시간의 틀속에다가 끼워놓고 금생의 선악업에 따라 다음생의 몸을 받고, 전생의 영향으로 이생의 몸을 받는다는 사실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불교의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의 시간관은 어떤 물건을 기준으로 볼때 그것이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그 모임을 시간의 개념으로 볼뿐 그 실체 또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관에 비추어 본다면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무수한 회수만큼 윤회한 것입니다. 즉, 호흡한번 할 때 마다 세포들이 생명을 이루고, 한번 내쉴때마다 무수한 세포들이 죽음을 이루고하는 것들이 다 생명의 반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호흡지간의 반복되는 모습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나의 참모습을 찾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또 노자의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만일 내생에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무서워 현재 어떤 물질을 주고 기도해서 내생의 업을 소멸한다면 이는 그 옛날 면죄부판매의 폐해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바로 지금(now) 여기(here)에서 참나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가장중요한 것입니다. 이 참나를 발견할 수 있을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없어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언부언하며 글을 맺습니다.
p.s 어디까지나 '불교'에 대해 제가 공부한 견해입니다. 斷見이니 先學들이 보시더라도 많이 나무라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