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주보에 2주째 광고로 넣었다. 지방회 기관 행사도 아니고 다른 교회 행사를 2주 연속 광고에 올리는 일은 흔치 않다. 그만큼 나와 친근한 행사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김천서부교회가 '담임목사 취임식 및 원로 목사 원로 장로 추대식'을 거행하기로 한 날이 바로 어제(12월 4일) 주일 오후 4시였다. 오후 2시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을 수송하고 서부교회에 도착하니 행사 20분 전이었다.
교회 주변 주차 공간은 벌써 차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떡? 교회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늦게야 서부교회 교인들의 손님에 대한 배려의 결과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행사에 참석하는 외부 손님들을 위해 서부교회 교인들은 차를 가급적 교회 밖에 댈 것을 권유한 것 같았다. 서부교회 장로님들과 몇몇 집사님들이 차량 주차를 도와주었고, 친절하게 식장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이럴 때면 행사에 참석한 손님들은 시작부터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하영봉 장로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뒤 따라 오더니 봉투를 하나 전달해 주었다. 저녁식사까지 대접하는 줄 아는데, 무슨 봉투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받았다. 아마 시내 밖에서 오는 목회자들에게 교통비 명목으로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몇몇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2층 예배당으로 올라가니 윤창숙 집사가 예쁜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맞이하면서 따로 마련한 선물을 건네주었다. 행사 후가 아니라, 식전 미리 받는 선물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식장으로 들어섰다. 예식 전임에도 사람들이 차곡차곡 자리를 채웠다.
주석현 목사님 취임식과 양규식 목사님과 조동환 장로님의 은퇴식을 겸하는 행사여선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얼굴이 골고루 보였다. 모두 이 자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다. 주석현 목사님은 젊은 목회자로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로 인해 서부교회뿐만 아니라 김천 지역의 구령 열이 가열 차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부교회뿐만 아니라 교단의 정체를 깨뜨리는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다. 청소년 사역 전문가인 그가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중소도시 특징 중 하나인 노년층도 충분히 배려하는 목회로 그의 사역 지경을 넓혀 나가기를 바란다.
양규식 목사님은 주위에 '선비'로 통한다. 고고한 성품도 그렇고 즐기는 취미도 그렇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호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지조도 그를 선비로 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후배 목사들에겐 좀 어려운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금만 교제해도 사랑과 인정이 넘쳐나는 분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나도 양 목사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무연고지 경북서지방에 와서 어려운 목회를 잘 감내해왔다. 내가 덕천교회로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양 목사님은 몸체만한 화장지를 사들고 직접 사택을 방문한 적도 있다.
마침 이사를 하고 정리까지 마쳐놓고 거창에 볼일이 있어 대덕쯤 가고 있는데, 양 목사님이 지금 어디냐며 전화를 하셨다. 운전도 못하고 당연히 승용차도 없는 분이 후배의 새 출발을 격려하기 위해서 방문한 그 이면엔 순수한 사랑이 맺혀 있음을 나는 잘 안다. 사택과 너무 떨어져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 헛걸음을 친 셈이 되었지만 아직도 나의 뇌리엔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 뒤에도 목회에 도움 받을 일이 있을 때면 사택으로 찾아가 조언을 듣고 사모님이 손수 만들어 주시는 식사를 맛있게 먹곤 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아마 금년 5,6월 쯤 되지 않나 싶다. 양 목사님이 전화로, 책을 정리하려는데 필요한 것이 있을지 몰라 전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목사님 사택으로 달려갔다. 짐을 듬성듬성 꾸려놓고 있었다. 한쪽에 신학 철학 관련 도서를 쌓아놓고 필요할 것 같으면 가져가라는 것이다. 삼성판 '세계사상전집'과 크리스챤아카데미 출판 '한국기독교 100년' 등 100여 권의 책을 가려서 차에 실었다. 진보적 시각으로 집필된 '한국기독교 100년'은 오래 전 절판된 책으로 한국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꼭 구하고 싶었던 책이다. 헌책방 여러 곳에 수소문해 보았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책이라 더 반갑고 고마웠다. 지금 생각하니 이때 이미 은퇴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양 목사님은 빈틈이 없는 분이다. 가끔 좀 부족한 듯한 모습을 보여야 가까워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법인데, 그렇지 않으니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고들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분은 설교 준비도 완벽할 정도로 철저히 준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나는 책을 받아 오면서 한 쪽에 묶여 있는 공책 무더기를 발견하고 무엇인지 물었다. 설교 준비 노트라고 했다. 남기기도 뭣하고 해서 불에 태우기 위해 묶어 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가 참고하고 보관하겠다며 억지로 받아왔다. 노 선비는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공책을 넘기는 나에게 그의 정성과 성실 그리고 진지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사람들의 글쓰기는 처음과 중간이 다르고 중간과 끝이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정성들여 가지런히 써나가다가도 그것이 점점 기준이 흐트러지고 필체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양 목사님의 설교 준비 노트는 첫 장과 중간 장 그리고 끝 장이 너무나 같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중간 중간 잘못 쓴 글자에는 화이트로 지우고 새로 써넣은 것에서 그분의 완벽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양 목사님이 목회 여정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시종일관 어디를 가든 말씀에서 출발하고 성령께 의지한 그분의 외길 목회 여정 말이다.
양 목사님은 4년 6개월 정년을 앞두고 조기 은퇴를 하는 것이다. 흔치 않은 결단이다. 교회를 생각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의 결정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모든 것이 젊어져 가는 시절, 교회도 젊어져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그가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아직 주님의 일을 위해 열정과 애정이 많이 남아 있는 분이 목양지를 젊은 목회자에게 넘기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는 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욕심 내지 않고 새롭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 할 양 목사님의 목양행전이 기대된다.
원로는 경험 많고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많은 분을 일컫는 말이다. 로마 제정 시대 땐 원로원이라는 곳에서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했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국가 최고 기관이다. 국가 경영에는 연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이 지긋하고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특별히 원로원 멤버로 앉혔다. 그들은 개인사를 초월해서 국가 경영에 매진, 많은 일들을 해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사회가 급격히 변한 지금, '원로'라고 하면 일선에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며 했던 일을 뒤에서 말없이 도와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원로 목사 원로 장로도 그런 의미가 강하다.
조동환 장로님은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 목회를 시작하고 경북서지방에 자리를 잡고 난 뒤, 조 장로님은 나의 멘토 역할을 자임했고 나도 그렇게 여기며 지내왔다. 일반대를 나오고 교육계에 투신, 정직과 성실로 교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분이다. 성격이 곧기는 칼과도 같고, 원칙을 지키는 데는 어떤 타협도 불허하는 분이다. 교육계에 전교조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조 장로님은 전교조 교사들이 가장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원칙에 어긋남이 없는 그를 교사들이 좋아했고, 그러면서도 정이 가득한 그의 성품에 많은 후배 교사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조 장로님은 1남2녀의 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그 절반 이상이 부인인 김우용 권사님의 공이겠지만 나는 그것에 덧붙여 그분의 진실한 신심이 자녀들을 통해 축복으로 돌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서울대학교를 나와 금융감독원 4급 공무원으로 있다. 지금은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두 딸은 모두 의사와 결혼 다복한 가정,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어 보기가 좋다. 조 장로님과 김 권사님의 믿음은 옆에서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이다. 특히 목회자를 섬기는 모습은 성도의 목회자 사랑과 존경의 끝이 어디인가를 늘 생각하게 한다. 양 목사님도 서부교회 담임을 맡아 사역하면서 이런 조 장로님이 큰 언덕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쉬 짐작하고도 남는다.
건강한 사회는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되는 사회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유년부-초등부-중고등부-청년회-장년부-노년부' 이런 각 단계가 결루(缺漏) 없이 인수인계가 잘 되는 교회가 건강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된다. 이것은 교회 임직자들도 동일하다. '평신도-집사-안수집사-권사-장로' 이런 계통이 잘 연결되어야 한다. 목회자도 젊은 목회자에서 중년 목회자를 거쳐 노년 목회자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하고 은퇴하면서 젊은 목회자로 후임자를 잘 세워야 교회가 발전할 수 있다. 양 목사님이 조기 은퇴하면서 젊은 후임 목회자를 세운 것과, 조 장로님이 은퇴하면서 비교적 젊은 장로들에게로 교회 운영의 중심축이 이월된 것도 서부교회 부흥을 위해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서부교회 행사 말미에 김종국 목사님이 축도를 맡아 먼 걸음을 하셨다. 우린 취임 및 추대 예식 뒤 서부교회 지하 식당에서 정성스럽게 마련한 저녁 식사를 든 뒤 자리를 떴다. 구미중앙교회 김종국 원로목사님과 장병일 목사님 그리고 우리 내외 이렇게 넷이서 직지공원 입구에 있는 전통찻집 '자명'으로 가서 걸쭉한 대추차를 시켜 마셨다. 이야기 속에 김천서부교회의 앞날을 축복했으며, 지나온 우리의 목양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주님의 일은 무척 힘들고 어렵지만 그럴수록 더 충성되이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승리의 면류관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찻집을 나오는데 이 성경 말씀이 귓전을 몇 번 때렸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