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고종은 군함 한 척을 구입합니다. 양무호 (1881년 영국 미드스버그에 있는 알딕슨사에서 만든 화물선.3432톤. 적지않은 크기의 화물선 당시로선..당시 일본의 화물선 평균 톤수가 600톤.이배를 1893년 일본 정부 일본 미쓰이 상사가 석탄운반선으로 영국에서 사온 배.원래 영국에서 만든 화물선 이름은 타라스. 일본에 가지고 와서 붙인 이름은 승립환.인수 가격55만엔 그러면 이 55만엔이란 군함구입비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1903년 당시 국가예산 규모를 알아봤다. 세출총계(군부소관 예산-412만 당시 환율이 2대 1. 양무호 구입비 55만엔은 우리 돈으로 110만원이다.대한제국은 국방예산의 30%를 투자해 군함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 배가 바로 그 군함, 양무호입니다. 우연히도 이 배는 현제의광개토대왕함과 똑같은 3천4백톤급입니다. 당시 초대형급인 이런 군함을 도입했다면 그건 분명 대단한 국책사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이 배는 베일에 싸여 그 존재조차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해지는 모습도 사진 한 장뿐입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었던 양무호는 왜 역사속에 묻혀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먼저 이 배는 어떤 배이며, 고종은 어떻게 이 배를 구입했는지 고종과 이동인 비자금 (금덩어리가 그런 고종의 생각을 대변해줍니다. 고종은 양무호를 구입하기 20년전인 1881년 황실에 전해지던 이 금덩어리를 은밀히 군함 구입 비자금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애기로는 손가락만했다고도 하고, 목침만한 크기라고도 하는데요. 이 비자금은 어떻게 쓰였을까요. )과 함께 고종의 첫 번째 비밀 지령을 받은 사람은 승려 이동인이었다. 그러나 이동인은 군함 구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만다. 누가 암살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죽음은 군함 구입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외교수완이 뛰어났던 이동인이 고종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일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막아야했다.조선이 근대식 군함을 갖는다는 것은 일본에게 큰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영국측에서 봤을 때 국제정세에 너무 밝아 그건 방해대상 일본에서는 이동인 한 번 써보고 싶은생각. 투자 많이 했어. 하지만 너무 자세히 잘 알아.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이동인은 어디 의지할 때가 아니다 이동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군함을 구입하려는 고종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고종의 비자금 또한 이동인과 함께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kbs 역사스페셜 고종x파일 군함을구입하라중~) 당시군자금의행방이 묘현 한가운데 고종의둘째아들인 의친왕대에 또다시나타나기시작한다 당시엔해방후라 이승만정권 산하에 왕족들이 홀대받기시작한시기 경북궁에 갇혀지네는왕족들 남북이 분단돼어잇던시기 의친왕은 고종당시의군자금을 통일자금으로 생각하고 일체의언급이없엇다,1950년6월26일 한국전쟁발발 다음날 왕족일가도 피난길에오른다 당시의친왕께서는 안방에잇던 병풍 을 가장 믿는 하인에게 등짐을부탁하고 피난길를나선다 하지만,그 하인은 서울역에서 등짐을 들고 도망을간다 의친왕 이말씀하시기를 당시그 병풍엔 왕족의보물지도및 고종황제군함구입자금이 묻힌곳등이표시된 지도가 잇던것이라고 서거전에 이석씨에게 유언하엿다한다 이자금은 해방후 남북이 분단돼엇던 당시에 통일자금으로쓰여달라고햇다 모방송국 1997년토크쇼프로에서 이석씨증언(고종황제의 둘째아들 의친왕의 열한번째 아들이자 대중가요 '비둘기집'을 불러 히트시킨 가수다) 그후이자금을찾기위해 백방으로수소문후 지난1995년가을쯤에 금괴의 매장처를알게 되었다.현제는 남한이나 북한두아닌 비무장지대에위치 그역시 통일자금으로 쓸생각임 1997년발표후 정부와 국사위원회 고미술 수집상등이 이야기의 진위를 파악후 매장장소를 일부확인하엿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정부는 비무장지대를 발굴하려하엿으나 유엔산하 비무장지대발굴를 추진하지못하고 북한에 의사타진차 정부고위관료를 중국으로 파견 북한의 고위층과 접촉시도를 한다, 당시국내는 외환위기중이라 금모으기 행사등을 모의한다 남북한회담전 비밀접촉은 남측인사 박00(前비서실장) 조00(前대통령비서실비서관)서00(前통일부국장)정00(통일부 차관)등이 배석한가운대 북한대표부 전00(前정무책임참사관) 이00(대외경제위원회 국장) 이00(광명성경제연합회 부회장) 김00(광명성경제연합회 실장) 이00(광명성경제연합회 중국주재 대표부 대표)등이배석한가운대 중국 북경의 한음식점에서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게된다 친서의내용은 경의선중간지점에 남한의 문산역에서 북한의 봉동역사이에 있는 장단역 인근에 마산(馬山)이라는산에 있는 고사찰에 고종의 비자금의 매장처에따른 동시발굴 제안서였다, 이에 북한측의 회답은1998. 4. 11 남북한 당국회의에서 북한측의 입장을 전해듣는다, 남측의친서내용중 대외적으로 비밀에부치는 내용에대해 남북한모두 유엔의 감시하에있는 비무장지대에서의 발굴에대해 합의점을찾는다 회담 명분은 대북 구호물자 전달을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접촉 (1997.11차남북회담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경의선 복원사업이 논의되었으며, 2002년 9월 18일 경의선 복원사업의 시작이다 남.북모두의 결의내용은 경의선 복원공사라는명분을 내세워서 발굴조사에 합의하고 남한은 북한의 식량원조에대해 답한다 (경의선은 선사시대에는 우리 민족 3대 이동경로 중 하나였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백제 연합세력을 연결하는 군사적 간선도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고려시대에는 한수 이남 지방의 통치로로,조선시대에는 통치로 및 명나라와의 무역로로 쓰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63년에 국도 1급 노선으로 지정되었고, 오늘날 에는 경부축과 더불어 국토의 대동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도 1호선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총연장 942km로서 남측 구간인 목포에서 판문점까지 498km이며 북측구간인 판문점에서 신의주까지 444km 이다) 이시기 에 미국역시 진의를파악하기위해 CIA당시 아시아.태평양책임자를 동원해 진위 파악에 나선다. 1997년12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외무부 소속이던 시0000 마0루 (일제 전범재판에서금고형을선고받고 후에 일본 외무부장관)를 만난다, 시00쓰 마0루 는 1930년대말부터 황국신민화운동회(皇國臣民化運動) 간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의독립및왕족 감시임무를수행중 일전의 이동인 암살사건의배후로 지목되엇던인물이다, 미국은 시00쓰 마0루 를 만난자리에서 한국측의 정보와는 다른정보를듣게돼는데 당시 이동인을 암살전에 정보를수집하던 일본은 고종의 자금이 조선의 12군데에 묻어잇는사실를 확인한다 당시보물의 매장위치는 남한에4곳 북한에4곳 비무장지대3곳 이라고 밝힌다,그는 당시에 보물발굴에대해 12곳중 남한2곳 북한에1곳은 발굴했고나머지 를 찾아헤메던 중에 패망을맞아서 근대까지 발굴에강한 집착을보이는데 그리고는해방후 에도평생을 보물찾기에매달리는데. 그중 남한분에1곳은 이미1981년에 도굴당한것으로 파악했다,당시발굴성과에대해서는 경기도 광주 성터에서 금괴15Kg은괴20Kg ,경남진주 00사찰에서금괴24kg은괴33kg, 북한의평양성에서금괴31kg은괴18kg을 발굴하여 본국으로 전쟁자금으로 넘겨주엇다는 증언을듣는다,그리고 발굴당시 자신이 빼돌린 금괴한뭉치(1.5kg)와 은괴(2kg)을보여준다 이에 미국역시 한반도내 고종황제의 비밀자금내용을 알게되는데 미국은이에 한국정부와 비밀접촉을시도하는데 이에 함구와 비밀에부치던 우리정부는부인하고 미국의 협박과 회유에 대해국가 위기의 돌파구로 고종의 통일자금 프로젝트 에대해 일말의 희망을건다, 국내의경제와 국민여론이 안좋던 한국정부는미국의조종으로 외환위기가 닥치고 I.M.F의 구제금융을시청하게돼는데 뒤이어 한국정부는 고종 비자금의 발굴에 한발더나선다, 당시 한0은행 직원의 범국민 금모으기 행사 가 적극적으로 추진돼어지고 이에한국 역시 미국이파악하고있는 한국의 금속 보유여부를 일정부분 파악중이라 발굴과 수출이 순조로이 이루어 지리라 생각하고 범국민 금모으기 행사를시작하는데 1998년부터시작된 범국민 금모으기행사에서 뜻밖의 물건이기증된다 금괴한뭉치가나오는데 태극문양이 선명한 금괴한덩어리(1.5KG) 어디에서두볼수없는문양에 이를 기증받은 행사 본부에선 때아닌 가짜 논란이 일고 감정사들이모여들기시작하는데 기증한사람은 이미없고 행사본부 접수직원이불려온다, 접수직원의말이 나이는한50세전후의 남자가 가방과함께 수고한다고 위로까지했다한다 그리고는 어디론가사라지고 금괴는 진품으로 나타나고 한낮의 부러움은 지나고 이보도를 접한 인사동 고수집상들은 다음날부터 슬렁이기시작하는데 정보부역시 이일로 다시한번 금괴의 출처를 추적하는데 어려움을격을 즈음에 한통의전화제보를받는데 금괴의 기증자를안다는 어느노인의 전화내용이였다, 한편이보고를 전해들은 대통령은 즉시 관계자회의를 주제한다, 이주제회의에서 적극논의된 내용은 현제 미발굴중인 고종황제의 금괴가 어디서 나왔나하는것이었다. 제보자를찾아나선 정보부산하 직원은놀라운애기를 전해듣는데 지리산에서 당시 심마니를하던 노인은 1979년즈음에 한노인이 찾아와서 세상사람들에게는 잊혀진 고사찰를 물어보는데 이사찰은 암자수준의 조그마한 동굴에 지리산을 아는이도 찾기힘든곳에 위치하였다, 김노인을찾아온것은 김노인이 조상대대로 이어온 심마니 집안이기때문이다, 그는 부모대에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삼을 볼수있다는애기를 전해들은터라 지나가는일이있으면 이곳에서 치성을드리곤했다,여름의 한여름 비를피 하는곳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김노인은 산신령님의 노여움을살까봐 모른다고 일언지하 잘라말했지만 이노인은 하루를멀다하고 1년을찾아왓다한다 그리하여 김노인은 그노인과 산행을시작하는데 그해 가을 어느즈음에 동굴를찾고 두노인은 동굴안으로들어가는데 동굴의 깊이는모르던김노인은 이노인의 동굴를헤메는것이 잘아는곳을 찾아가는것 같앗다고한다, 한참을 따라가던 김노인은 자기도 한번도 보지못한 동굴안풍경에 놀라움뿐이였다한다 마치 돌들이 창살처럼 보호하는듣한 곳뒤로 10여평남짓하는 곳에도달하자 아주 호사스러운 뒤주를 발견하는데 이때이노인은 김노인에게 제안을한다,지금까지의비밀을 지키면 평생을 호사스런 삶을 살게하지만 만약 어기면 죽이겠다고 협박을했다한다, 두려움에 김노인이 비밀를지키마하고 이노인과같이 뒤주를 여는데 뒤주안엔 이끼가많이낀 돌덩어리가 가득차 잇었다한다 그리하여이둘은 평생을 비밀에부치기로하고 하산을하는데 갑자기 생활이바뀌면 주위의 의심과 시기를받을수 있으니 묘안을짜는데 김노인은 장뇌삼을 심봤다하고 이를 비싸게사주는 방법을썻다한다 그뒤세월이흘르고 뉴스를보던 김노인은 그때본 이끼낀금덩어리의 문양을 보게되었다고한다, 이런 증언내용을 전해들은 관계자들은 또다른 딜레마에 빠지고 새로운 사실를알게돼는데 일본인 시00쓰 마0루 의 얘기를더전해듣는다,이에 남한관계자는 당분간북한에는 비밀에 붙이기로하고 남한내의 금괴조사에 들어간다, 남한의 마지막금괴 매장처를찾아내는데 강원도 영월 인근에 있다는결론을 내린정부는 대대적인 조사를펼치는데 미국과 북한을 속이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때나옴묘안이 북한이 에너지난을해소하고자 금강산물길를 막아 수력발전을 한다는정보로 남한내의 물고갈를내세워서 영월일대에 댐공사를발표한다, 그러나 국민의 방응이없자 환경부와 공모하여 환경 위기론을 부추키는 음모론을 시작한다, 각종언론은 환경파괴라면 극성을피우고 국민의 눈길를 강원도영월로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지질조사라는 명분으로 영월일대 동굴를 조사하는데 영월댐은 첨부터 시행하려하지도않았다, 지질조사8개월만에 강원도지역에매장돼어있던 금괴를 강원도지역에매장돼어있던 금괴를찾아낸다 그곳은 조선왕조대대로 궁궐에 목재을 대오던 출발지이자 왕실의 목재 제공처였다 당시지질탐에참가했던 00대 지질학과 교수인 최00교수의증언은 첨엔 전국의 내노라하는 지질학교수로시작했던일이 어느날부터 지질학과 환경분야와는 무관한 군부대 군인이 동참했다 한다. 조사가멈추기3일전에 한번도 기록에없던 동굴이발견되엇는데 그날이후 조사 작업은 더이상진행안되었다한다, 당시발굴햇던 금괴는 금괴50KG은괴40KG(후에 백금괴로밝혀짐) 그리고 무엇인가 새겨넣은 석판이엿다.(추가매장내용 을새겨넣은 고석판) 당시동굴에는 삼엄한 군경비가 세워지고 석판은 비밀리에 서울로 옴겨진다, 발굴된 금괴는 인천의 한 제련공장에서 서서히 녹여저서 금모으기행사의 금들과 섞여서 해외로수출된다 당시 미국내 금값이 폭락햇다하니 당시금이 얼마만큼 양이였는지 짐작해볼수있다 2000년6월 남북한 정상회담을시작한다,남한은 발굴날짜를 전하고 북한역시 발굴에 적극 나선다, 이에 남한정상은 북한의 추가 비자금의 매장을 알린다, 서로의 의지를 알게된 두정상은 북한과 남한 역시 비무장지대의 금괴 발굴를위해 박차를 가하는데2002년 드디어 비무장지대의 매장 발굴완료되없다, 발굴량 금괴20KG백금괴30KG이다 이발굴에서 북한은 새로운제안을한다 이곳의 발굴 금괴는 남한이 갖고 북한내 매장품엔 북한의 소유를 인정하는 새로운제안이다 이즈음 미국은또다른 음모를 꾀하는데 공동 발굴제안을 한국이 부정하자 한국내 경제를 뒤흔들 묘안을짜내는데 당시 외환위기 탈출이 한국의의 중대한사한이던 시기에 미국과 국제 통화기금은 당시 금모으기를 주도하던한0은행을 공격 대상으로삼는다 IMF는 한국을 상대로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한국전이후 처음 격는 국가위기에 일부에선 미국의 요구를들어주자는 친미파도 등장 하는데 한국내 의견이 대립할즈음에 2000년6월미국내 사설펀드 회사인 카알라일사와ip모건은 한국내 한0은행을 인수하게된다. 당시 한0은행은 금모으기를조도하던 대표은행이었고 끝없는 구조조정요청에시달리던시기 당시인수가는2800억원 터무니없이 낮은가격에 인수를하는데 당시한0은행을 인수한 카알라일 사는 조지부시(전미국대통령)이고문으로있는 회사로서 당시한국카알라일 지사를설립하고 한국지점고문으로 박0준(전 국무총리)과 박0준씨의 사위를 지사장로 선임하는데 한국정부와 접촉을위해 적직 고위관리를 체용하는데 최근 카알라일사는 한0은행을 씨티은행에 매각함으로서3년만에7000억원 120%의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데 후에 조지부시와 미국은그후 국내 경제사냥을 본격적으로나서는데 미국 텍사스에 근거를 둔 론스타는 한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사모펀드다. 금융기관인 외환은행을 비롯하여 건설업(극동건설), 부동산(스타타워) 등 14개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국내자본의 경우 금융업과 비금융업종의 겸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외국 자본인 론스타에게는 이런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kbs스페셜"대한민국은 외국 투기자본의 천국인가"발췌~ 이는 정부관리와 일부 친미성향을가지던 국내인사 박 0원(전비서실장) 김0필(전국회위원)과 박0준(전국무총리)의 합작으로시작하는데 한때 박0준의 외삼촌은 조선왕실의 하급벼술의 한사람 으로 의친왕의 피난당시 병풍을메어던 하급관리였다, 지리산 비자금 도굴사건의 이노인의 윤곽이들어날즈음 정부는 IMF탈출를선언하고 성급한 축배를 터트리는데 북한역시 그시기에 자강도 희천과 량강도 혜산에서 금괴발굴를하게되는데 남북한은 비무장지대의 발굴협의를위해 또다시 의견을조률하는데 양국은 발굴를위해 또다시 대규모 육로 연결에합의를하는데 고성 과금강산 사이의 매장발굴를위해 육로연결공사를시작한다, 미국의 계속되는 혁박과 회유에 한국정부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미국은 또다른카드로 북핵과 미군철수(군비축소) 라는 카드를내세우는데. 고종의 비자금발굴에 어느정도의확신을가지던 일본은 시00쓰 마0루(전외무부장관)의 증언을 토대로북한과 공동발굴를제안하는데 북한역시 부정으로일관할즈음 미국정부로부터 한 제안을받는다,한국내 경제상황을 뒤훈들 이 음모는 당시 반도체와 전자부분의 세계점유1위인 일본으로써도 맹추격을하고있는 한국을 잡아놀 기회로보고 미국과함께 한국의 대외원조를거부하게이른다 이로서한국은 외환의기를맞는다, 후에 일본고000총리가 잔여분 발굴를위해 북한을방문하게 이르는데 별다른성과없이 회담이 끝날즈음에 일본은 북한에게 제안을하나한다 방북성과가필요하니 일본인 납치문제라도 회담의성과로 넣어주면 북핵문제에있어 북한의 편에설것을 약속하고와원유를 지원하고 경제협력을약속한다.당시 전력과에너지난이 심했던북한으로서는 손해보는 거래가 아니였으므로 이제안을수락한다, 또한 일본은 엄청난제안을하는데 독도분쟁에대한정보였다,만일 독도를 일본영토로만들기힘들다면 남.북 일 삼국의 공해로 인정하자는제안이다,독도에 매장되어있는 제2의 석유, 하이드레이트(하이드레이트는 일단 에너지 효율성이 높고 매장량이 석유의 3배인데다가 지구의 온난화 현상을 없앨 수 있는 청정에너지이기 때문에 꿈의 에너지로까지 불린다는데.. 현재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이미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강국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왔다) 1997년, 하이드레이트를 연구해 온, 백우현 박사가 러시아의 과학원을 방문했을때 우연히 알게 된 사실! 그것은 바로 독도의 하이드레이트의 존재 여부를 일본은 이미 알고 있었고, 독도뿐만 아니라 전세계 하이드레이트 분포 지역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sbs백만불의미스테리 독도분쟁, 그숨겨진진실중~ 당시 러시아로부터 독도에 하이드레이트 매장에대해 들엇던 북한은 독도문제는 거부의사를 밝히는데 그후에도 고종의비자금 발굴를 집요하게요구하는데 북한과 남한을 오고가던 일본은 남한 박0준씨를 만난자리에서 국내비무장지대의 발굴에대해 정보를듣고 미국과 또한번의 묘안을짜낸다,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자, 한국은 빠른성장을이룩한 한국은 올림픽. 월드컵등 세계대회를유치 하였지만 그러나 노벨상에서는 외면당하던 한국을 대통령의 공적으로 남기기위해 노벨상수상을 제안하는데 이는 한국의 박0원(전문광부장관)의 협조요청도 있던터라 자연스레 진행이되었다 이시기 금강산부근에서 금괴가발견되고 당시 발굴주체였던 현대0산개발 를 내세워 발굴 금괴의 절반을 북한에전달하는데 당시 북한은 경제재제로 수출이 자유럽지않은 북한은 발굴물은 남한이 그에상응하는 금액지불를요구했다,(후에 거대재벌의총수의자살로 더이상의 문제제기를않는다) 일본과 공조를 하려던미국은 비무장지대 마지막 매장지를 찾아내는데 이곳은 남.북한이 파악한 비무장지대아닌 남한내에 있던것이엇다 이로서미국은 그매장지에 대해 소유권을주장하는데 이즈음 한국역시 매장지에대한 일부의정보를 입수한다, 덕수궁내였던것이다 한국은 미국소유토지에대해 반환을 준비중이고 미국역시 발굴를위해 이부지를지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데 한국 정부가 반환에 힘쓸즈음 주한미국대사가 서울시장을 만난다 이자리에서 미대사는 서울시장에게 차기 대권에 대해 미국의 입장과 지원을 약속한다, 또한 건물신축허가를 부탁하는데.이유를 모르는시장은 정부와의 협의없이 자체적으로 공사를 허가하는데 뒤늦게 사태 파악에나선 정부는 서울시에대해 허가 반려를 요구하는데 너무촉박한기간대문에 정부는 부지내에 고목 한구루를 이유로내세운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의 반발이늘어날즈음에 300년된회양 나무가 불에타 고사한 사건이터진다 (미 대사관 건립이 추진되던 옛 경기여고 부지에서 자라고 있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고사위기에 처한 사실이 확인됐다. 구경기여고 자리는 구한말 고종황제에 의해 덕수궁 터의 일부로 편입됐으며, 1922년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공립고등여자학교가 이곳에 세워졌다가 1980년대 후반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미국 소유로 바뀌었다. 회화나무는 이곳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지름 1.2m, 높이 15m 가량에 수령은 200~250년 가량으로 추정된다.특히 덕수궁의 경우 고종이 을미사변 후부터 1919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하던 곳이어서 회화나무는 격변의 우리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지켜본 의미 있는 나무라고 황 소장은 밝혔다. 황 소장은 또 “현재 회화나무는 불에 그을려 말라죽어가고 있으며 일부 나뭇가지에서만 새순이 나오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작년 6월 ‘덕수궁터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위해 이곳을 둘러봤던 정영호 단국대 박물관장은 작년만 해도 회화나무는 잎이 무성할 정도로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소장 황평우)는 6일 서울 정동 덕수궁 선원전이있던 옛 경기여고 부지 내 회화나무가 불에 타 고사 직전임을 확인했다며관련 사진 3점을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chpri/ .org)를 통해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사진을 보면 나무 밑둥의 갈라진 틈새에 방화 흔적으로 추정되는 숯덩이가 발견됐다. 문제의 회화나무는 5월까지 잎을 피우지 못하고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덕수궁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는 이 나무를 자연문화재로 지칭하면서 식생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밝히고 있었으나 현재는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황평우 소장은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회화나무를 고사 시킬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분명하다”며 “경찰 등 관련 당국은 조속히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대는 미 대사관 건립을 둘러싼 논란이 일면서 경찰이 주변에 대해 24시간 방범 활동을 벌이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해왔다. ~한국일보 2004-05-06 ~기사발췌)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사는감행되고 미국 역시 금괴 발굴를 성공하는데 극비로부처진 발굴에서 미국은 또 다른사실를알게되는데 신축 대사관 지하주차장 터파기공사에서 새로운석굴이 나오는데 왼편석축에용문양 오른쪽석축에 호랑이가 새겨진석축의 위용은 당시현장의 인부들과 관계자의 눈을 의심 할정도였다.이에미국은 현장 접근을 차단하고 관련인부10여명을 미 대사관 비밀회의실로 모이도록하는데 이곳에서 인부들에게 미국이민과 생활보장을약속한다 각서와 일체 비밀유지를약속한 인부들은 귀가하는데 다음날오후 인천공항에 일단의 일본인무리들이 입국하는데 고령의무리틈에 젊은 사람이하나포함돼엇는데 방문목적이 경제투자자문단 이라고밝히고는 곧장 미대사관으로향하고 해질 무렵에 미대사관 발굴 석축안으로들어가는데 깊이를알수없는 인공굴를지나 20여m를지나자20여평의 공간에도달한다 화려한문양의 궤를 발견하는데 궤의숫자가40여개 한자로적은 석판이한쪽면을장식하고 물이차는것을방지하는2평정도의 배수로가 발견된다외부 공기와의 차이로 석판에는 물줄기가흐르고 그물은 배수로에 모여지고있엇다 이들은 사진을찍기시작햇다 일체의 물건엔 손대지말것을 지시하는젊은사람의 지시로 필름이 모잘라질대까지 이들의 촬영은계속되었다 밤을샌 발굴은 다음날과다음날까지계속되엇다, 이즈음 한국정보부에 한통의전화제보를 보고받은 실장은 대통령에게보고 하고 진위파악을 지시하는데.제보자는 당시굴착기기사인 장0현이다 미대사관공사현장 상황을보고받은 정부는 대책을 세우고 발굴공사중지를 미국에 요구하는데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한국정보부역시 현장유물 유출를 정밀 감시하는데 발굴8일째 미대사관비밀 회의실로옴겨진 유물은 미국.일본 발굴팀의 유물의내용을 파악하는데 궤에서나온문서는 일성록(日省錄)(국정에 참고하기 위해 정부의 일처리를 국왕의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내밀한 개인 생활을 제외하고는 국왕의 언행을 남김없이 기록하였다.) 필사본이엿다, 석판의 해석도나왔다. 작성한 기관은 규장각(奎章閣)이었다. 규장각에서는 1760년부터 1910년까지의 150년 간의 기록을 2,329책에 담아 놓았다. 요즘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방대한 기록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규장각은(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규장각이라는 기구는 폐지되었고,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취조국으로 이관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도서는 조선총독부 취조국,고종이 거처하는 덕수궁,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 그리고 조선 총독부 각 부서로 분산되었다. 덕수궁과 창덕궁으로 분산되었던 도서는 나중에 장서각 도서로 변화하였고, 조선 총독부 취조국으로 이관되었던 도서는 총독부 학무국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져 해방 이후 서울대가 관리하게 되었다. 총독부 각 부서에 행정 참고 자료로 보관되었던 도서 자료들은 규장각 도서로 편입되거나, 총독부 도서관을 거쳐 현재의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곳에 왕실토지가 있고 그 토지에 딸린 문서는 소유권 관련 문서(토지문서, 소지, 매매문기), 추수기, 세금 관계 서류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정조(正祖)는 1776년 3월에 할아버지 영조(英祖)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5세의 청년 군주는 즉위 다음날 창덕궁 후원에 터를 잡아 선왕이 지은 글들을 보관할 전각을 건립하라고 명하였다. 정조 자신의 초상화, 글과 글씨, 인장과 기타 기념물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주위의 봉모당(奉謨堂) 에는 역대 국왕이 남긴 글·글씨·그림과 각종 문서들,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하고,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 등을 두어 조선과 중국의 서적을 보관하였다. 또 이안각(移安閣)이라는 부속 건물을 두어 귀중한 소장품들을 관리하는 데 이용했다. 세조 때 양성지에게 국왕 및 왕실의 재산과 전국의 중요유물 사가의중요자료도서들을 관리할 기구를 만들것을명하여 전국의주요자룔를수집 보관처를 적어놓앗다, 정조 5년에 이르러서는 관제를 정비하여, 국왕의 비서와 사관(史官)의 역할을 담당하는 젊은 신하들로 하여금 규장각의 관직을 지니게 하였다. 그들은 국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논의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의 일터도 국왕의 처소에 가까이 두게 되었다. 인정전의 서쪽 가까운 곳에 이문원( 文院)과 대유재(大酉齋)·소유재(小酉齋)를 두어 정조가 신하들을 만나고 규장각 신하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장소로 삼았다 미.일 양국 관계자는 유물의 밀반출를 모의하는데 이시기 한국의연구기관에서도 대대적인 왕실조사를 하는데 역사학자 진0영 교수를 필두로 발굴를시작하는데 왕실연못의정밀탐사에들어간다 언론을통제한 비원 연못 준설공사라는 발굴에서 비원 연못에서 길이1m50cm의 금속용상이발견돼는데 순금으로되어있는 용상은 세월의풍파와 퇴적물로 색을알아보기힘들었으나 세척처리결과 순금으로 판명되고 곳곳에서 유물이나오기시작하는데 한국 정보부에서는 미국대사관을 빠져나오는 트럭두대를 알게돼고 정보부산하 직원이검문에들어간다 다수의일본인과 운전자는미국인으로서 다른나라로 근무지 를옴겨서 이삿짐이라고둘러 댄다 그러나 확인결과 발굴 유물이들어있는것을 확인 한국정부는 그들모두를 체포하는데 이에미국은 강력히 항의하는데 한국정부는 이들에게 문화재 반출혐의를적용해 국내법으로 처리하기에이른다, 이에미국은 자국내 언론에 협조요청해 당시 사건을 본국언론이일체의 언급을 하지말것을요구하고 이는기사화되지못한다, 이사건이후 미국은 자국민 석방을위해 한국과의 협의하에 당시미국에서 스파이혐의로 복역중인 로00 김씨와 맞석방을 제의하는데 한국측은 미군소유토지를 넣어줄것을요구한다 미국과의 토지반환문제로 마찰를빚는데 김영삼-미테랑의 정상회담에서 구두로 합의된 ‘상호 교환 방식이시기 한국은 프랑스대통령의 방한으로규장각도서반환에 희망을걸지만 프랑스는 반환을 거부한다 한국-프랑스 협상 대표 한상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과 자크 살루아 (Jacques Sallois) 사이에 작년 7월 25일 작성된 ‘합의문’은 외규장각도서 문제를 ‘상호 대여' (reciprocal loan) 형식에 따라 해결할 것임을 명시한다 이에정부는 필사본의발견으로 일부반환의사를 철회한다. 한편 우리 민족 정기 바로알기 협의회 서울본부에서는 일단의 무리들이 발대식을하고 청년부 간사인 이0복 은 일장의연설를시작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살그먼-히 눈을 감으면/ 어느새 그내는 내 앞에 나타나
깊흔 잠속에서도/ 나는 그대를 잊지 않었고/ 그대도 나를 버리지 않었다
꿈, 꿈, 꿈일지라도/ 그대는 내 마음속에/ 꽃봉오리처럼 아름다히 피어올라
젊은 내 심장을 격분시키노니/ 오, 내 사랑이여/ 영원한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반가운 소식을 들을 때/ 삼천리여, 나의 조국이여!/ 나는 하늘만큼 깃버하노라
그 긴 겨울밤이 물러가고/ 새벽의 고요한 짬에도/ 너는 내 눈앞에 어리어지드라
해방 직후에 최원오(崔元吾)가 지은<가슴에 손을 얹고>
*최원오는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이후 북한 정부에서 재정상을 지낸 최창익(崔昌益)의 손자로서, 이 시를 지을 무렵인 1949년에는 중앙아시아 타시켄트에서 농대에 재학 중이었다.
"이 편지가 들어 있는 노획 북한 문서철(RG 242 Records Seized by US Militiary Forces in Korea)은 한국전쟁 중 미군이 북위 38도선 이북으로 전진하면서 노획한 문서들을 하나의 문서집단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이 문서철에 소장된 자료들은 문서·포스터·지폐·사진·설계도·동판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한데, 문서만 하더라도 6,893종 192만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들 자료 가운데 대다수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나온 각종 공문서, 책, 신문, 잡지 등이다. 이 자료들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이다. 이 시기에 관한 한 현재 북한에서도 이만한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을 것 같지 않을 만큼 방대한 분량과 광범하고 다양한 종류를 자랑한다. 이 문서철은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는 북한 역사 연구를 위한 보고로 통하며 , 전세계 학자들의 주목 또한 끌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관에 있는 노획 문서철이 미군에 의해 전투 중 노획된 경우라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圖書)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약탈된 경우에 해당한다.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350여 종의 한국 고도서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조선왕조 왕실 의궤(儀軌)들은 본래 강화도의 왕실 서고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1866년에 프랑스 극동함대 해군이 천주교 탄압에 항의하여 이 섬을 점령했을 때, 즉 병인양요 때 약탈한 것들이다. 파리 국립도서관의 외규장각 도서들은 반출 과정부터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병인양요 자체의 불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방화와 파괴 행위를 자행했으며, 왕실 서고인 외규장각의 6,000여 권에 달한 책들 가운데 외형상 값지게 보이는 것들을 반출 대상으로 뽑은 다음 나머지는 모두 건물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이에 우리들은 빼앗긴 우리의유산을 찾기위해 대의를 내세워 찾아오려한다" 전운이 감도는사무실에잇는대다수가 눈시울를 붉히고 있었다 프랑스 황립도서관(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규장각도서를반환받기위한 우리 민족 정기 바로알기 협의회소속 젊은이5명이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실는데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우리 문화제를 훔처오기 위해 몸을실는다 한편 압수한 발굴 유물에대해 정밀 분석에들어간다. 김0원(고서), 김0하,이0문(도자기), 양0숙(공예품), 진0만(그림), 김0식(화폐),군사유물에 박0광위원, 장0섭(고지도),이0묵,최0석(풍수지리)등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분석3개월째 처음으로 발굴할 곳이정해졌다,수종사(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운길산) 중턱에 자리에 자리한사찰이다 1890년(고종27) 풍계 혜일 스님이 고종에게서 8천 냥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하고,이듬해 4천냥과 금백홍사를 시주받아 사존불을 개금했는데,이 때 방광(放光)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39년 경내의 석조부도를 중수하면서 조선초기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 었지만 기록에나와 있는 곳을 찾아나섯다 경내의 관광객을 통제하고 대웅보전의 앞마당을 지나 몇 걸음 옮기면 허름한 불이문이 나오는데,그 안으로 고개 숙여 들어가면 세조가 중창 기념으로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높이 40여m에 둘레는 7m가 족히 넘을 것 같은 이 나무는 전설 속의 나이로 라면 550년을 훌쩍 넘은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나무 앞쪽에있는 작은 부도를 들어내자 제법 널다란 석판이나 나온다1평반정도의크기에 주지스님의 얘기로는 이곳이 예전에 우물터인데 언제만들어 졌는지는기록에 나와 있지않다는 것이다 드디어 석판을들어내자 스님의 증언대로 물이가득한 우물이나왓다, 물를퍼내기위해 대형펌프가 인근 군부대에서 지원돼고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뽑아내는 물량 만큼의 물이차는것이었다 다시 한대를 더 가동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관계자들은 점점 지처가고 있을쯤 사찰의 주지스님이 김0원(고서)위원을 찾아온다 그의손에들려진건 오래된 고문서로 해석이 난해하여 해석을요해왔다.고서를 해석해가던 김위원은 작업중지를하고 관계자를 불러모아서 회의에들어간다 삼정헌을 찾아야했다 ,세조의 발걸음을 멈추게한 토굴를 찾아서헤메던위원들은 마당한쪽에있는약수터를 발견하고 그 물줄기가 토궁에서나온것이라는 확신으로 약수터위10여미터위에서 작은굴를 발견한다, 기록에 의하면 토굴안에두개의 작은받침있는데 그곳에 아홉단을 쌓아야 소원을 들어준다는것이다 1939년 석조부도 를 중수할 때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항아리와 그 안에 있던 금동제 구층탑,은제도금 육각감은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급히공수해온 두개의 유물를 각각 올려놓자 신기하게도 토굴에서 훌러나오던 물이멈추고 우물터의물도 더이상 차지않앗다 드디어 우물물를 모두다 제거하고 발굴 선발대2인이 우물로 둘어갔다 우물바닥에도착 하자 위에서 보는 것과는틀리게 남쪽으로 통로가나왓다 5m정도를지나자 덕수궁터처럼 왼쪽엔용문양 오른쪽엔 호랑이문양이 들어낫다,입구 석판을 들어내자 많은양의궤가 나오고 주변엔 석판이 출토되엇다 궤짝의수는 35개 그토록찾아해메던 금괴가나온것이었다 궤는 조심스러이옴겨지고 석판은 사진으로남기기 위해 촬영을마쳤다,그리고는다시모여서 토굴입구에서 치성을드리고 금동제 구층탑,은제도금 육각감를 들어내자 다시물길이터지고 서서히 우물 물이차올랐다, 분석9개월째 중간회의때 처음으로 난관에봉착하는데 단순 해석과 대충의기록은나오는데 매장위치확인을 의해 도자기전문위원인 이0문 위원의 건의로 한노인을 찾는다 국내 도굴계의1인자인 정0석씨를 찾는다 7년전 백제고분 도굴사건으로 체포되어 대전 교도소에 복역중인 정0석씨가온다, 정부의협조요청에 완강히 반발하던 정0석씨는 잔여형기 면제의 조건으로 제의를수락한다, 이른봄날 정부의 노력과는 반대로 정노인은 유물를 찾아나설 기미를안 보인다,그이유를묻자 겨울 도굴은 땅이얼어서 찾아내기도 힘들구 땅이녹는 늦봄과 풀이자라는 여름을택한다고한다 6월초 유물탐사를 나선 전문가들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 있는 야트막한 산기슭을찾는다, 이곳은 15~16세기 관요를 굽던 분청사기 가마터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인동현(가산면의 옛이름)의 자기소’전문가도 혀를 내두를정도의 솜씨 대충의 위치만나온 지도를보며 한곳을지목하는데 모두 어리둥절할줌에 정노인이 말문을연다 도굴의기본은 풍수에능하고현대풍수는(변형이많이돼어서 ) 말고 그시대 풍수를 이해해야하고 그담이풀이올라온 정도를 본다한다땅속에 물건이나 시신이있을땐 주변의풀과 자라난 길이가틀리다 그후 꼬챙이를 땅속에밀어넣었다 이일를반복한 즈음에 정노인 이말문을땐다 이자리다, 발굴인원40명 주위보완요원170명 조용한시골마을이술렁였다.발굴품은분청사기인화문접시70여점, 청자상감포류문대접43점,청자상감국화문고배형제기6점분청 음각 어문병 청화백자철회 산형 연적, 백자육각형 ,순백자 항아리,백자 장군병,흑유병 영조어인,분청 음각 어문병,분청자선각엽문병,분청자귀얄문병등 많은양 이 출토되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