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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강연원고 171109 송고
죽산 정신의 진정한 계승
이 원 규/소설가. 《조봉암 평전》 저자
1. 왜 오늘 다시 죽산인가
오늘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시민토론회에 나오게 되어 매우 고맙고 기쁩니다. 발제를 하실 두 분, 양윤모 박사님은 백범 김구 연구로 학위를 받은 분이고 독립운동사 관련 인천 최고의 지성입니다. 오유석 박사님은 1999년 정태영 · 권대복 두 분 원로와 함께 6권짜리 《죽산 조봉암 전집》을 엮어낸 분입니다. 사회자 이민우 선생님과 황보윤식 선생님을 비롯한 다섯 분 토론자들도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들이십니다. 두 분의 발제와 다섯 분의 토론이 죽산 선생의 업적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넓혀줄 것입니다.
저는 근현대사 지식이 일천한 일개 소설쟁이입니다. 감히 죽산 선생의 평전을 쓰겠다고 덤벼들어 수많은 자료를 읽고 원로들 인터뷰를 하며 힘든 고비를 넘었습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썼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죽산 선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을 보고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국격과 국가양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적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다면 도대체 아프리카 우간다나 짐바브웨 같은 나라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2011년 대법원이 재재심(再再審)을 열어 무죄를 선고한 것은 땅속에 묻어두었던 국가양심의 회복, 국격의 회복과 다름 아닙니다.
둘째는 60년이 지난 지금 죽산 선생이 주장했던 이념이 더 절실해졌다는 것입니다.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세 가지 이념은 지금 하나도 실현되지 않고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아니, 또 하나가 있습니다. 진보당 강령에는 오늘 제대로 풀어가지 못하고 있는 교육에 대한 이상적 방안도 있습니다.
셋째로 죽산은 신념을 향한 주저하지 않는 전진, 두려움 없는 전진을 하다가 쓰러진 실천가입니다. 강화에서의 3·1만세운동이 그랬고 한국인공산주의자 대회가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책임자인 부하린의 신임을 받아 모스크바공산대학에 들어간 것, 상하이에서 투쟁하다가 만주로 잠입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만든 것도 그랬습니다. 8·15 광복 후에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제 필요 없다’ 하고 전향한 것, 그리고 모두 입을 다문 그 무서운 시대에 평화통일을 외치며 진보당을 창당한 것이 그렇습니다.
넷째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위무와 진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산의 생애는 민족의 운명을 걸머지고 분투하다가 쓰러진 영웅서사시처럼 비극적이어서 우리 가슴을 늘 먹먹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많은 분들이 아마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봉암 평전》 출간 이후 20여 차례 강연에 불려나갔습니다. 죽산선생 강연은 몸이 아파도 갔습니다. 지난주에는 웬 서울 중랑구 복합청사에 가서 스터디그룹 18명을 상대로 강의하고 왔습니다. 가는 데 두 시간, 오는 데 두 시간 걸렸습니다. 40대-50대 공부하는 분들이 얼마나 진지한지 피곤을 몰랐습니다. “내일 오후는 선생님이 쓴 평전을 비롯한 자료와 강의노트를 놓고 두 시간 토론을 합니다” 하고 제게 그분들이 말했습니다.
지금 사람들 대부분은 죽산 선생을 모릅니다. 백범 김구를 모르고 몽양 여운형을 모르듯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죽산 선생은 이렇게 조용한 움직임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분이 남긴 위대한 족적, 억울한 죽음에 대한 위무, 그분의 주저하지 않은 지사적(志士的) 용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새얼문화재단이 추진해온 동상건립 성금 모금이 8억 원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새얼재단 지용택 이사장님이 말씀하신 일가족 전체의 성금기탁이 생각납니다.
8천여 명이 돈을 보내 7억여 원이 모였어요. 어느 날 젊은 부부가 돈을 들고 왔어요. 남 편 몫, 아내 몫, 큰아이 몫, 작은아이 몫으로 나눠 내며 이름을 모두 넣어 달래요. 아이들한 테 정의(正義)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알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했어요.
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며 훌륭한 삶을 살았던 근현대사의 인물들은 많습니다. 죽산 선생은 가장 억울하게 죽었고 죽은 뒤에도 가장 억울한 대접을 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존재감이 살아나며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분이 입안한 농지개혁의 위대한 성과, 그분이 순교자처럼 부르짖었던, 억울하게 죽어 실현하지 못한 평화통일과 정의로운 경제, 인간다운 삶 에 대한 아쉬움이 사람들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2.죽산이 실현한 꿈
죽산선생의 업적은 1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소작제도를 단번에 끝나게 한 농지개혁입니다. 죽산은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공부할 때 평등지권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초대 농림부장관이 된 1948년 국민소득은 46달러로 세계최빈국이었습니다. 당시 농업이 주요산업이었고 전체 농가 200만호 중 완전 소작농이 49%, 반소작농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였습니다.
북한은 이미 토지개혁을 끝낸 상태였고,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군의 승리로 끝난 원인이 토지의 몰수분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심의 향방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죽산은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확신으로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절묘한 선택을 하고 그것을 농지개혁법으로 관철시킴으로써 신속히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균등성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토지소유의 제한이 농지에 한했고 임야나 도시지역 택지는 제외된 터이긴 하지만 그것은 혁명이었습니다.
조봉암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입안한 농지개혁법은 이 나라를 ‘소작의 나라’에서 ‘소농의 나라’로 변신시켰습니다. 자기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가슴 벅차할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고, 남한의 농민들은 북으로 간 박헌영과 김일성이 기대한 대로 공산군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철저하게 평등지권 이론을 공부한 죽산에 의해 남한의 농지개혁이 가장 이상적으로 가장 빠르게 이뤄졌습니다. 김일성의 뜻대로 적화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주지 않는 훈장 사실, 이런 것들 만으로도 훈장 여러 개를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주대환의 논문에 의하면 ‘토지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이것은 지금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장상환의 논문에 의하면 대학교와 대학생 수는 1945~60년 사이에 19개 대학 7,819명에서 63개 대학 97,819명으로 급증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바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이 된 농민들의 소득 수준 향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 소유 평등도를 갖추게 된 때를 1960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죽산 선생이 자유당 정권에 법살을 당하고 1년이 지난 뒤 그분이 추진한 토지개혁의 성과가 찬란한 꽃으로 피어났던 것입니다. 1956년 5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온갖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는데도 죽산이 216만 3천여 표를 획득했습니다. 농지개혁 성과의 꽃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법살당하지 않고 1960년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면 이승만이든 누구든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승리했을 것입니다.
농지개혁 말고 또 있습니다. 6·10 만세 사건은, 3·1운동, 광주학생의거와 함께 일제강점기 가장 빛나는 저항입니다. 6·10 만세 사건은 죽산이 상하이에서 원격 지휘했습니다.
3. 실현하지 못한 꿈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죽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강령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 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외친 평화통일과 평등과 정의의 사회는 현 정부는 물론이고 보수세력 정권의 모토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트집으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자유당정권은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국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화통일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 하여 국가변란이요 반역이라 밀어붙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영원한 종신 대통령, 국부가 되기를 원했고 216만 표를 얻는 죽산을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분단과 냉전 상황을 이용해 정권 지속의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마녀사냥을 감행할 태세로 개미귀신처럼 함정을 파고 기다렸습니다. 죽산 선생의 생애를 보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비상한 판단과 돌파력으로 고비를 벗어나며 오히려 더 크게 솟아올랐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마도 미국을 믿었거나,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거나 정의에 대한 확신 때문에 간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죽산은 죽음의 문턱에 섰고 동지이자 손아랫동서인 윤길중 변호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못한 일을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 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저는 지금도 이것을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는 죽산 선생이 실현하지 못한 꿈을, 그가 순교자처럼 죽어가며 뿌린 평화의 씨앗을 가꾸고 거둬야 합니다.
4. 정반합론, 그리고 포용력
죽산선생은 앞뒤가 콱 막힌 외골수가 아니었습니다. 생애를 보면 큰 고비를 만날 때마다 한계를 뛰어넘는 판단과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이제 유효하지 않다 판단되면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론적 판단으로 뛰어넘었습니다. 첫 번째가 상하이 망명시절에 펼쳤던 민족유일당 운동입니다. 둘째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창당 승인을 얻기 위해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며 모스크바로 밀행했던 그가 공산주의를 버린 일입니다. 물론 1939년 감옥에서 나와 인천에서 왕겨조합장을 하며 투쟁을 접고 유휴의 세월을 보낸 탓으로 조선공산당의 당권경쟁에서 박헌영에게 밀려나 있던 것, 그것을 노려 미국이 전향공작을 편 것이 직접적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도 신념이 움직여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포용력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상하이 망명시절에 만주로 잠행해 가서 이미 터를 닦아 놓은 신민부, 정의부 등 민족족의자들과 겸손히 대화하며 양해를 얻었고 광복 후 정치인이 되어 정쟁을 할 때 극한투쟁으로 가지 않고 상대를 포용하며 양보할 것은 양보했습니다. 정치가 당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평전을 냈을 때 《한겨레신문》 길윤형 기자가 서평을 쓰면서 죽산의 득표 1/3도 따라가지 못하니 한국의 진보는 아직도 ‘넘사벽’(넘지 못할 4차원의 벽이라는 뜻)이라고 썼습니다. 새가 날아가려면 좌우 날개가 같이 움직여야 하고 수레바퀴도 양쪽이 사이좋게 의논하며 굴러야 합니다. 죽산이 추구한 진보는 극한이나 맹목과는 거리가 먼 포용, 다수 대중이 원하는 희망을 받아 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진보진영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죽산 선생은 ‘설득의 천재이자 조직의 명수’라고 불린 분이고 창랑 장택상은 ‘벼룩에 굴레를 씌워가지고 경마(競馬)하러 다닐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따님과 영화를 자주 보러가셨는데 하도 소리 내어 울어서 딸이 창피해서 팔을 잡아당기면서 “아버지, 이제 그만 가시지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분, 늦둥이로 얻은 아드님과 아들 친구를 숲으로 데려가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을 즐긴 소탈한 분이었습니다.
동료의원들에게도 그랬고 국회본회의 사회를 볼 때는 내 쪽보다 저쪽을 더 존중하여 반대파의 고함은커녕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죽산 선생처럼 포용과 이해 속의 선의의 경쟁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죽산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 완전한 명예회복으로 가는 길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은 독립유공훈장을 추서 받아야 완결됩니다. 아래 글은 2007년 대통력 직속 진실화해위원회의가 내린 결정문을 압축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야당정치인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표적수사에 나서 극형 인 사형에 처한 사건으로 민주국가에 있어서는 안 될 비인도적 반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 사건이다.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명예회복을 위하여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봉 암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있으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
이번 글은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의 전원합의부가 재재심을 열어 판결한 판결문과 주문입니다.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며 우리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판결로 그 잘못을 바로 잡는다.
원심판결과 제1심 판결 중 유죄부분을 각 파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양이섭 관련 간첩의 죄는 무죄, 제1심 판결 중 진보당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검사의 항소는 기각한다.
진실화해위원회 규명결정 10년, 대법원 재재심 판결 6년이 넘어 7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족의 서훈신청을 국가보훈처가 반려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기사 두 건입니다. 하나는 1940년 1월 5일 ‘흥아신춘’ 광고에 성관사라는 정체 모를 회사명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고 하나는 1941년 12월 23일자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납부기사입니다.
신춘광고는 관의 요구를 받은 기업인들이 묵시적 승낙 혹은 반강제로 당시 일본의 국책인 ‘대동아공영’을 축원하는 광고에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사전 통고 없이 광고를 내놓고 광고비를 받으러 다니는 것이 관례였고 지금도 대강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관사라는 이름의 상사(商社)는 자료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관보(官報)의 등기기록에 없고 인천의 상공업 편람에도 없습니다. 동업자로 함께 이름을 올린 방원영이라는 사람도 《인천상공인명록》에 없습니다.
국방성금은 납부된 게 사실이라 해도 죽산의 의지와는 다르게 미곡업계의 거물이자 헌신적인 후원자였던 박남칠이나 김용규, 혹은 사무실을 빌려주었던 고향 친구 정수근이 대신 내 준 것이거나 죽산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경찰의 공작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타계하셨지만 제 아버님을 비롯해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출생한 인천의 원로들은 인천의 거물이었던 죽산에 관해 아주 사소한 신변사항까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죽산의 국방성금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당시 죽산의 주소가 서경정이 아니라 소화정(현재의 부평동)이었음이 일제 관헌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1945년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될 때 김조이 여사가 남동생 김영순에게 한 말과, 부산 임시수도 시절 죽마고우인 조광원 성공회 사제와 해후했을 때, 신의주형무소 형무소 시절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조합장 자리를 만들어진 친구가 내 줬다고 한 말, 그리고 “그 양반 150원은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라고 한 김영순 선생의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죽산이 국방성금을 냈다면 선전도구가 되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 다녔을 것입니다.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8‧15 광복 후 박헌영 일파가 그를 축출하려 맹공격할 때 온갖 트집을 잡아 험담을 하면서도 그 기사들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1939년 7월 신의주형무소에서 석방돼 인천에 온 죽산이 줄곧 100% 반일행동으로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지하투쟁으로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일제와 묵시적인 타협선을 정해 놓고 살았고, 《매일신보》 기사들은 그런 과정에서 불거진 사고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국가보훈처가 ‘흥아신춘 광고와 국방성금 납부가 죽산이 한 게 아님을 증명하는 자려를 내놓아라’ 했지만 그 때문이 아님은 다 아는 일 아닙니까? 공산당 했던 죽산, 진보당 했던 죽산이니까 못준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진영 논리 아닙니까?
죽산이라면 괜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6·25 전쟁 중에 피해를 입은 분들, 반공을 신념으로 가진 분들입니다. 죽산이 공산주의 활동을 한 건 광복 전 일입니다. 죽산은 전향한 뒤 언론에서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1 운동 이후로 많이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독립을 위한 사회주의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 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을 불고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 한 일은 없습니다.
죽산은 광복 후 이게 아니다 판단해 전향했고 반공주의자로 살았습니다. 공산당 때려잡는 수도경찰청장 지낸 창랑 장택상 선생과, 이승만의 강경파 반공주의자 측근이었던 윤치영 선생이 조봉암은 간첩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용공주의자도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지난 7월 망우리 묘소 추모제에 대통령의 조화가 놓인 걸 보았습니다. 머지않아, 아마도 2년 뒤 탄생 120년, 서거 60년이 될 때까지는 서훈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훈처에서 이미 검토를 시작했다는 비공식적인 말도 들립니다. 오늘 부평에서 일반 학술대회가 아니라 시민토론회가 열리는 것도 작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죽산이 출생한 강화군, 죽산이 주로 활동한 중구가 못하는데 부평구, 적절한 때에 참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천 시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할 때입니다. 새얼문화재단은 죽산이 어둠 속에 누워있던 권위주의 시대부터 심포지엄, 강연회, 계간지 《황해문화》의 기획특집 등을 펼치며 죽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종을 울리며 노력해 왔고 죽산의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민사회는 아직 결정된 일이 아닌데 떠들지 말고 조용히 죽산의 정신을 현양하고 계승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평전을 쓸 때 열심히 찾았지만 놓친 것도 많습니다. 소장 향토사가들은 죽산과 관련한 사진 한 장, 서류 한 장 등 인천의 작은 자료와 일화까지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천에서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연구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죽산 정신의 진정한 계승의 하나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이 토론회를 연 부평지역의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발제를 맡으신 두 분과 토론자 선생님들, 그리고 좌석을 메워주시고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신 청중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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