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동 성제묘]
을지로4가역 4번 출구를 나서면 배오개길을 만난다. 그 길의 북서쪽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는 고개가 있어 사람들이 그 고개를 배오개[배나무고개, 이현(梨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그 고개의 숲이 울창하여 혼자 넘기 무서워 백 명이 모여 넘었던지라 배오개[백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 고개에서 이어지는 길의 이름이 배오개길이 되었다. 청계천의 배오개다리를 향해 걸으면서 길 오른쪽 골목들을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 십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여온 음식점 간판들을 찾아 본 것이다. 그들 중에는 먼 지방 음식으로 명성을 쌓은 음식점들도 있다. 맨손으로 집 떠난 각 지방 젊은이들이 배오개시장에 몰려들어 광장시장, 방산시장, 중부시장을 만들며 늙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수 십 년 동안 그 음식점들을 사랑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미싱’, 타월, 포장재, 테이프, 옷감을 팔고 있을 것이다.
문화옥 간판이 보이고, 우래옥의 파란 간판도 조금 보인다.
배오개길. 멀리 동국대학교가 보인다
배오개 다리. 이 다리를 건너가면 광장시장이 있다 항상 화공약품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방산시장
가게들을 천천히 기웃거리며, 청계천 상류를 향해 마전교까지 걸어간 후 남쪽으로 길을 건너 포장재 가게들을 따라가니 곧 조아패키지와 경북수출포장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였다. 중구 방산동 성제묘(聖帝廟)였다. 성제묘는 관성제군(關聖帝君) 즉 관우의 혼을 모시는 신당이다. 같은 관우 사당이지만 숭인동의 동묘와는 달리 성제묘는 국가가 세운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관우가 살아생전에도 그랬지만 억울하게 죽은 후에도 원한 때문에 아주 힘이 센 귀신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의지하여왔다. 그러면 누가 이 성제묘라는 공간을 만들었을까?
방산동 성제묘
[훈련원]
성제묘 골목을 나서면 큰 길 건너로 이국적인 붉은 벽돌집이 보인다. 그것은 미군 극동공병단 건물이다. 조선 군대의 훈련원이 그곳 어디쯤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비록 외국의 것이지만, 같은 군사시설이라 공병단이 그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공병단 앞에는 훈련원 공원이 있었다. 그쪽으로 길을 건너, 공병단 건물들을 기웃거리며 담장을 따라 남쪽으로 도니 이국적인 모습에 외국어를 쓰는 청년들이 바퀴달린 판자 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공원 한 구석에 1921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가 그곳에 세워졌던 것을 알리는 새김돌이 서 있었다. 훈련원 공원에서 그곳에 군사시설인 훈련원이 아닌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표석을 만나니 조금 의아했다. 공원은 훈련원 터가 아닌 것일까?
성제묘에서 큰 길 건너편 풍경 훈련원공원. 작은 숲 너머 왼쪽이 병원 건물
훈련원공원. 사범학교 교지비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공원 옆 국립중앙병원으로 가 보았다. 국립중앙병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남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단정한 건물은 꽤 오래 되어보였다. 건물 현관 앞에 새김돌이 있는듯하여 다가가보니 그곳이 훈련원 터로 1392년에서 1894년 사이에 군사의 훈련과 지휘관 선발 시험 즉 과거를 주관하던 관아가 거기에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옛날에는 메디컬 센터라고 했던 병원
병원도 훈련원터에 지어졌음을 알려주는 표석
그 표석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넓은 잔디밭을 가운데로 하고 나무도 많이 심어져있는 멋진 공간이 나왔다. 잔디밭 남단에 국립중앙의료원 합동건설기념비가 서 있었다. 그것을 보면 이 병원은 단기 4291년 즉 서기 1958년에 465 병상 규모로 준공된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의료 지원을 했던 스칸디나비아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세 나라가 힘을 모아 당시로선 국내에서 가장 선진화된 의료기관이 탄생하였단다. 그때는 운영도 그들이 맡았단다. 그러다 개원 10년 후인 1968년, 병원 운영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넘어왔고, 2010년 4월에 정부는 국립의료원을 법인화시켜 ‘국립중앙의료원’을 만들었단다. 스칸디나비안 클럽이라는 건물도 있었다. 아름다운 건물들을 돌아보고 돌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스칸디나비안 클럽도 기웃거렸다. 망한 나라 군대가 사라진 공간에 들어선 남의 나라 교육기관의 터와 외국 군대 공병단을 보고나서인지, 아름다운 병원을 돌아보고 난 뒤끝이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박사 대통령 리승만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뒤 잔디광장 너머로 스칸디나비안 클럽이 보인다.
안면재건복원센터가 다행히도 이 예쁜 건물에 있다. 휴전되고 5년만에 만들어지 병원의 아름다운 정원
병원 건물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장충동 관성묘] 병원을 나서서, 을지로 5가 사거리로 걸어가서, 주방기구상가 쪽으로 길을 건넌 후, 남쪽을 향하여 걸어서, 오장동 사거리를 건너고, 형형색색의 고무보트들이 잔뜩 붙어있는 쪽으로 퇴계로 5가 교차로를 건너서, 동북고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태광산업 건물을 왼쪽으로 두면서 오르막길을 걸었다. 중간에 일부러 육교에 올라가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전망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주방 기구 가게 퇴계로5가 교차로 풍경
육교 위에 서면 건물들 사이로 북한산과 북악산이 보인다 찻길을 내려고 인위적으로 만든 고갯마루, 건너편으로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이 보이는 곳에, 중구 장충동 2가 관성묘(關聖廟)가 있었다. 이 또한 관우를 모신 당집인데, 방산동 성제묘와 같이 정면 1칸 측면 2칸 맞배지붕에, 당집 안에 모셔진 신격들도 유사한 듯하였다. 관성묘는 목멱산[남산]이 기세가 죽지 않은 채 북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꺾어져 급히 흘러내리기 시작한 지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에서, 광희 사거리와 장충체육관 앞 교차로 사이, 지금은 족발집들이 즐비한 장충동 쪽을 굽어보며 당당히 서 있었다. 그러나 관성묘 뒤 산의 흐름은 큰 길을 내느라고 많이 깎여나가 있었다. 큰 길 가의 문은 방산동 성제묘 문처럼 세 칸짜리도 아닌 한 칸짜리 문으로, 길이 생기자 어쩔 수 없이 낸 뒷문인 듯하였다. 문 옆 담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기와지붕이 친근해 보였지만 왠지 공간 전체가 좀 어색해 보였다. 문의 왼쪽으로 돌아 급경사의 길을 조금만 내려가니 오른쪽 짧은 골목 안에 문이 하나 더 보였다. 그 문 또한 한 칸짜리 곁문에 불과하였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방산동 성제묘 앞에 늘어서 있던 돌사람 같은 것은 없고, 냉장고와 전기밥솥 등 가재도구가 당집 앞 토방에 옹기종기 올라앉아 있었다. 당집 옆 소나무가 홀로 철갑을 두른 듯 단정하고 우람했다. 관성묘 정문 자리도 ‘하나 룸’이라는 주거시설 주차장을 기웃거리다가 엉겁결에 찾았던 것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관성묘의 정면, 문이 있었을법한 자리는 사정없이 깎여나간 후 가파른 축대 위에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성묘 바로 코앞을 남쪽에서 가로막았던 집이 헐린 흔적도 보였다. 남쪽 기슭에도 집들이 잔뜩 들어 선데다 노란색 교회건물이 삐죽 솟아 있었다.
장충동 관성묘의 한 칸짜리 뒷문
장충동 관성묘 뒷모습
곁문 틈새로 보이는 관성묘 소나무, 냉장고, 취사도구 관성묘 세 칸짜리 정문이 있었을 자리
관성묘는 누구의 공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성묘가 굽어보던 곳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훈련원과 훈련도감이, 남쪽에는 남소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소영은 조선 후기에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사기지이다. 그러니 아마도 관성묘가 굽어보던 장충동 일대에는 조선의 군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훈련원도, 훈련도감도, 남소영도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도 사라진 후, 장충동 일대는 식민지 조선 경성의 신흥 주택단지가 되었던 것 같다. 동네 여기저기에 아직도 오래된 일본풍의 집들이 남아있었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일본식 주택. 누군가 이 앞에서 세레나데를 불렀을런지도 모른다
장충단비 뒷모습
관성묘를 뒤로 하고 길을 걸어 내려와 주황색 타일을 붙인 호텔 신라가 보이는 쪽으로 빠져나가니 장충체육관 앞 교차로가 나왔다. 남산공원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이는 쪽으로 길을 건너 공원 속으로 들어가 장충단비를 보았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왕비를 일본 습격대들로부터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 대한제국 황제가 된 왕비 아니 황후의 남편이 남소영에 장충단을 세웠다는데, 지금은 그 비석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망국의 황태자 순종이 썼다는 멋진 비석 글씨를 보니, 방산동 성제묘, 훈련원 터의 공병단, 사범학교 터, 국립중앙의료원, 장충동 관성묘를 돌아보면서 거듭 떠올랐던 “이곳은 누구의 공간인가” 하는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왕비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들. 지금은 신작로 변에 초라하게 남아있는 장충동 관성묘에서 가장의 안녕을 빌었을지도 모르는 백여 년 전 조선 군인들의 가족들. 그들을 기억해 주고, 그들이 소중히 여겼던 공간도 기억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사진 이유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