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마라타 전쟁은 마라타 연합의 내분에서 시작되었다. 페슈와 - 국무총리, 수상 - 바지 라오 2세는 마라타의 공식 지도자였으나 가장 힘있는 군주는 괄리오르 지방을 다스리는 다울라트라오 신드히아와 인도르 지방을 지배하는 야슈완트라오 홀카르였다. 푸나 전투(1802년 10월 8일)에서 바지 라오는 홀카르에게 패배했다. 패전 직후 바지 라오는 도주후에 영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바사인 조약을 통해서 인도 총독인 웰슬리 경 그리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 동맹을 맺었다.
총독은 페샤와를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웰링턴은 1803년 5월 13일 무렵에 바지 라오를 다시 수상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4월 초에 신드히아에게 협상을 했으나 실패했다.
총독은 신드히아와 베라르의 라자 부대가 연합한 두개의 마라타 주력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이동했다.
아서 웰슬리, 1대 웰링턴 공작
웰슬리 경은 2개 부대를 결성했다, 북쪽은 제라드 레이크 장군이 지휘했으며, 남쪽은 그의 동생인 아서 웰슬리 소장이 지휘했다. (이후 웰링턴 공작으로 잘 알려진다.) 웰슬리 장군과 함께 싸우는 동맹군은 스티븐슨 대령의 지휘를 받는 9,400명 규모의 하이드라바드 분견대였다. 거기에 더하여 연합군인 마이소르와 마라타 경기병을 합쳐서 웰슬리 장군이 보유한 부대는 약 5,000명 가량이었다.
9월 20일 무렵에 마라타 군을 쫓아서 웰슬리 장군과 스티븐슨 대령은 2개의 좁은 길을 이용하여 베드나푸르에서 갈라졌다. 스티븐슨은 웰슬리 부대 대열에서 서쪽으로 약 23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계곡을 지나서 행군했다. 그와 웰슬리 장군은 9월 24일경에 보케르두논에서 1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 부대를 합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웰슬리는 9월 23일에 신드히아와 라고제 본슬레의 부대와 맞닥뜨려야 했다. 마라타 군대는 40,000에서 50,000 정도 규모로 강력했으며 정규군 보병 3개 여단이 포함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부대는 예전에 동인도 회사에서 상사로 근무했으나 현재는 마라타 군을 지도하는 하노버 지역 출신의 안톤 포흘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마라타 군은 카티나와 자우 강 사이의 후미를 차지했으며 마라타 군주들은 이 위치에서는 영국군이 카티나 강을 건너서 정면으로 공격해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웰슬리는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웰슬리는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방어 위치를 구축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스티븐슨의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7 대 1이라는 놀랄만한 숫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마라타 병사들의 약한 사기와 느슨한 규율을 고려한다면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진격하는 74 하이랜더 보병연대
전투가 시작되자 웰슬리는 강을 건널 장소를 탐색하며 자신의 소부대를 진격시켰다. 이 부근에는 강을 건널 장소가 없다는 원주민 길잡이들의 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웰슬리는 아사예 마을 가까운 곳에서 여울을 발견했다. 웰슬리는 곧바로 마라타 군주 부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강을 건너는 동안 그의 부대는 흩어졌기 때문에 이 작전은 실패했으며 뛰어난 규율의 사례인 인도 군대는 방향을 돌려서 다시 영국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2개의 용감한 스코틀랜드 부대인 74 하이랜더 (이번 전투에서 장교들이 대부분 전사하였다.), 78 하이랜더 연대가 선두에 서면서 마라타 연합군은 흐트러졌으며 군주의 부대원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라타 측의 사상자는 약 6,000명이었으며, 정면공격을 고려한 막대한 사상자를 감안하고서도 영국군에서는 대략 1,5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영국/인도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39 킬로미터에 걸친 행군 이후에 전투를 치뤄야했기 때문에 웰슬리의 탈진한 군대는 패배한 적을 뒤쫓을 여력이 없었다.
이 전투는 34살인 웰슬리가 거둔 최초의 주요 업적이었고, 그가 나중에 이룩한 승전 기록과 비교해서도 웰슬리는 언제나 마라타 전투를 가장 가치있다고 평가했다. 일화에 의하면 은퇴 이후 세월을 보내던 웰링턴은 심지어 워털루 전투에서 거둔 그의 훌륭한 승리보다도 아사예 전투를 자신이 이루어낸 가장 뛰어난 전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티푸 술탄
콘그리브 로켓
영국군이 428명 전사하고 마라타 군이 1,200명 전사한 사실은 마라타 내부의 파벌과 불일치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또다른 가설은 영국군은 압도적인 군사 기술을 보유한데 반해서 마라타군은 시대에 뒤진 전술(수입한 대포와 다른 화기가 있음에도 여전히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을 사용했으며, 이웃인 마이소르 왕국 (영국 VS 마이소르 전쟁에서 패배)이 영국군보다 발전된 로켓 기술을 보유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후 영국은 티푸 술탄의 무쇠 원통 로켓을 기초로 한 콘그리브 로켓을 발명했다.)
마라타의 군사 구조와 전술 또한 그들의 승리를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마라타군의 전술은 치고 빠지기(간니미 카바)식이었기 때문에 유럽식의 정면공격에 대항하지 못했다.
또한 마라타 군대는 단일 사령관이 없었기 때문에 혼돈과 무질서로 인해서 마라타군의 전열은 쉽게 분열되었다. 식량 보급을 위해 인도 상인과 계약을 맺어서 1만 마리의 거세한 숫소가 끄는 수레에 보급품을 싣고 이동한 영국군과는 달리 마라타군은 병참과 보급 체계가 전무한 상태였다.
마라타군은 장교와 부사관들의 숫자가 부족했으며, 존재하는 장교와 부사관들 또한 영국 방식의 전투에 대항할 능력을 갖출 정도로 훈련을 받지못한 상태였다. 마라타 부대는 군인으로서 행동하며(1개 부대의 일원으로서 동료들과 같이 행동한다.)싸웠던 영국군과는 반대로 전사처럼 행동하며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홀로 싸웠다.) 전투에 참가했다.
19세기 무굴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인도 전역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소왕국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일종의 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이었죠. 이 시기를 노려서 무역에만 전념하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적대관계에 있는 지역군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면서 인도 전역을 서서히 식민지화 시켜나갑니다.
첫댓글 Made in War에서 본 아서 웰즐리 시절에 마라타 전쟁중에 아사예 전투로군요. 레드코트의 근성을 잘 보여준 전투죠.
저두 서점에서 그 책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웰링턴이 아사예 전투를 워털루보다 더 자랑스럽게 기억하는군요..
지도에서 무굴제국이 안보이는데 당시 무굴제국은 완전히 쪼그라 든 상황이었나요?
19세기 무굴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인도 전역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소왕국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일종의 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이었죠. 이 시기를 노려서 무역에만 전념하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적대관계에 있는 지역군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면서 인도 전역을 서서히 식민지화 시켜나갑니다.
워털루 전투일줄 알았는데 의외라능~. ~
티푸술탄은 직접 방어하려고 자기가 직접을 총을 들고 싸웠고 전사했습니다.
대게 서양쪽에서는 저런, 이후에 거대한 정복으로 이어지는 전투를, 대불전쟁 같은 수호전쟁보다 더 자랑스러워 하는 듯.
지도를 보니 역시 영어권에서는 Empire를 아무데나 막 붙여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