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르그스키(Modest Musorgsky, 1839-1881)의 생애
의심의 여지 없이 러시아적인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orgsky, 1839-1881)는 프스코프 지방의 카레보 시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전통에 따라 그는 사관학교를 마치고 근위병연대의 장교로 배속되었다.
18세 때 그는 러시아의 국민악파를 세우려는 꿈을 가진 젊은 음악가들의 모임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포함하여 어느 평론가가 그들을 찬양해서 붙인 이름인 "위대한 5인조(The Mighty Five)를 조직했다.
이들의 리더인 발라기레프는 독학으로 이룩한 작곡가였고 그는 4명의 제자들- 보로딘, 큐이, 림스키-콜사코프와 무소르그스키-에게 그들이 러시아인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독일의 대위법을 연습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재능이 더해감에 따라 젊은 장교에게는 그의 직무가 지루해졌고 그의 생활을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제대할 것을 결심했다. 그의 젊은 친구들은 아직도 음악을 본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로딘은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큐이는 군대의 요새 전문가로서 장래 직업을 위해 공부하고 있었으며, 림스키-콜사코프는 해군장교로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소르그스키에게 신중할 것을 권고했으나 자신의 능력을 믿는 열렬한 젊은이를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22세에 퇴역하였다.
이 시점에서 역사가 개입된다. 1861년 농노의 해방은 소지주들을 곤경에 빠트렸다.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자유로워지기는커녕 이 젊은 귀족은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그는 결국 교통부의 관리가 되어 생활비를 벌며 성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였다. 저녁시간은 독서와, 그의 네 동료들과의 음악활동, 그리고 작곡의 첫 시도 등으로 보냈다.
전통이나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독특한 개성은 즉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길은 양보함 없이 사실적으로 인생과 예술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집단의 가장 훌륭한 특성의 근원을 캐고 탐구되지 않은 영역을 결연하게 파헤쳐 그것을 정복하는 일-그것은 예술가의 사명인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정신에 있어서 모욕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또 한 사람의 이해자인 도스토에프스키의 신조(나의 임무는 인간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곳까지 생생하게 묘사하는 일이다)와 매우 가까웠다.
29세의 무소르그스키는 그의 생애의 위대한 과업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조국의 역사인 "보리스 고드노프(Boris Godunov)"에서 훌륭한 주제를 발견하였다. 그는 푸시킨의 희곡과 옛 기록으로 그의 대본을 만들었다. 그가 이 오페라를 작곡하며 보낸 몇 해 동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는 위대한 5인조의 우정으로 지지되었으며 림스키-콜사코프와 특히 친근한 사이였다. 보리스는 황실오페라에 제출되었으나 여자의 배역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무소르그스키는 작품을 개정하고 마리나의 역을 첨가시켜 마침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1874년 공연을 하게 되었다.
평론가들은 비난했으나 대중들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러시아 황제 통치하의 불안정 속에 불만을 가진 지성인들에게 정치적인 영향을 주었다. 황제 보리스에 대한 반항을 묘사한 합창은 곧 성 페테스부르크의 길거리에서 들려 왔다.
오페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검열관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황실 일족을 불쾌하게 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다음 시즌에는 이 장면이 철저하게 삭제되어 상연되었고 끝내는 상연 종목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보리스의 상연중지로 무소르그스키의 생애에 괴로운 시기가 도래했다.
그의 생애 남은 6년 동안 그는 5인조의 동료들로부터 더욱 더 멀어졌다. 그는 음악적으로 성장하여 발라길레프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된 것이다. 이제는 유력한 평론가가 된 큐이는 보리스를 비난하여 그를 배신했다. 림스키와 보로딘은 성공을 위해 그들의 꿈을 모두 팔아 치웠고
무소르그스키만이 끝까지 반역아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외로운 투쟁을 위해서는 단호한 기질이 필요했으나 그는 그렇게 타고나지 못했다. 그에게 자신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과 의기 소침함이 번갈아 찾아왔다. 가난과 인정을 못 받는 것, 그리고 사무적이고 고된 일들이 거기에 한 몫 거들었다.
그가 성년이 된 초기부터 다소간 억제되어 온 술에 대한 갈망은 이러한 도피의 필요성으로 되살아났다. 그의 생활은 점점 방향을 잃어버리고 알콜 중독자의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곡집 <태양이 없이(Sunless)>와 <죽음의 노래와 춤(Songs and Dances of Death)>등 그의 훌륭한 노래들은 이 절망의 시기에 쓰여졌다. 이 시기 주요한 작품은 민족적 오페라<호반사치나(Khovanshtchina)>이며, 이것은 페터 대제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황제 호위병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그 자신이 대본을 썼다.
그러나 그에게 보리스를 완성하게 한 왕성한 창작력은 이미 다 소진되고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침울한 드라마를 여러 번 고쳐 쓰곤 했지만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그의 전 동료들은 사회적으로 점점 계급이 올라갔으나 무소르그스키는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비참한 사람의 편이 되었던 그가 이제 그들의 계급에 합류한 것이다.
활기차고 젊은 근위대의 장교의 모습에서 초췌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추락했다.
(레핀의 초상화 에서...)
그러나 투사로서의 정신은 끝까지 그에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친구들이 그를 구할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음에도 그는 "대담하게 앞으로! 새로운 육지를 향해 나아가자!....끈기있게, 대담하게, 그리고 혼란없이 그것을 찾고, 굳건한 발걸음으로 약속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 이것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임무이다. 사람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 자신을 완전히 바치기 위해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가수들의 반주를 하면서 생계를 이으려 했다. 그는 곧 궁핍에 빠졌다. 어느 음악행사에 참석했다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의 동료들이 그의 곁으로 다시 모였다.
그러나 그는 홀로 살았던 것 처럼 42세 되던 생일날 혼자서 죽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오, 나는 불쌍도 하지!"라고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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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가 일리아 레핀(Ilya Repin)이 그린 말년의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