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초대
제자들의 초대가 5월 스승의 날을 전후하여 거의 해마다 있다. 내가 군대 생활을 마치고 복직을 한 학교가 화순군 동면국민학교였다. 1963년도부터 1968년까지 6년간을 근무했다. 1963년도에 5학년을 맡고 다음해 1964년부터 1968년도까지 연속 6학년을 5년간이나 담임을 했다.
당시는 농촌은 가난하여 오후 수업이 있어도 점심을 못 싸오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소풍가는 날에도 점심은 고구마를 몇 개 싸오는 어린이도 있고 그것도 없이 맨 몸으로 오는 어린이도 있었다. 소풍 날 점심때가 되면 싸리나무로 젓가락 너 댓개를 미리 만들어 둔다. 점심 싸온 아동의 밥으로 십시일반을 만들어 점심 안 가져온 아동이 점심을 같이 먹도록 하는 젓가락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이 싸간 밥은 점심 안 가져온 아동에게 주고 아동들의 점심식사가 끝난 뒤 놀이를 하는 자유 시간에 우리 선생님들은 소풍지 가까운 마을 주막에다 두부찌개를 시켜놓고 두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를 미리 주문하여 가져다 달라고 하여 점심을 대신했던 때이다.
이 때 가르쳤던 제자들은 내 모교의 12년부터 16년 후배이면서 제자이다. 2008년 3월. 1968년 3월 25일에 졸업한 동면교 39회 졸업생들의 특별한 초대였다. 졸업 40주년 기념 동창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옛날 졸업생들이 다닐 때의 건물은 하나도 없이 사라졌고 새로 말끔히 지어진 교실, 강당, 넓혀진 운동장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추억을 더듬을 곳이 없는 모교의 모습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강당에는 연단을 놓고 그 위에 꽃이 놓이고 마이크를 설치하고 노래방 기기들도 보였다. 강당 무대 위에[“경 : 제 39회 졸업생 40주년 기념 동창회 :축”]이란 현수막도 걸었고 무대 옆에는 품바 복장을 한 각설이도 보여 대대적으로 행사를 준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행사에 초대된 분들을 보니 동면학교 총동문회장 이두업 선배님, 총동문회 총무님, 동면 청년회장, 당시 담임을 맡았던 살아계신 스승 조판수 선생님 그리고 나였다.
강당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아직은 쌀랑하여 난로가 강당 중앙에 피워져 있었다. 총동문회장님은 후배들과 난롯가에서 환담을 하고 계셨다.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도 선배님 옆 난롯가에 앉았다. 미리와 있던 제자들이 앞으로 와 인사를 한다. 악수를 하느라 바빴다. 수도권에서는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내려 왔고 광주, 화순읍, 동면에서 거주하는 동기생들이 약120여명 참석했다. 졸업생 70%가 참석한 것이다.
한 참 제자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데 졸업 후 처음이라 어른이 되어 오십 중반을 넘어선 제자의 얼굴에서 어릴 적 얼굴이 기억에서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게 나타나고 이름도 잊어버린 한 제자가 “선생님 절 받으십시오.”하고 신발을 싣고 다니는 강당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내는 일어서라고 하면서 어깨를 잡아도 막무가내다. 그대로 큰 절로 인사를 한다. 나는 서서 그냥 절을 받았다. 일으켜 세워 손을 잡고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주위에 있는 총 동문 회장을 비롯하여 초대되신 분들 과 다른 제자들 무두가 놀란 표정으로 “KBS TV사랑을 싣고” 프로그램에서 있는 것 같은 이 광경을 지켜본다. 또 한 제자가 큰 절로 인사를 하려는 것을 말리어 서서 인사를 하도록 하여 인사를 받고나서
“나 자네 이름을 잊었어, 미안하네, 이름이…?”
“선생님, 저 너멍굴 살았던 오종남입니다.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선생님이라고 다 찾아봐, 마음속에서 잊지 않은 것만도 고맙네.”
이 제자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장기 결석을 하여 졸업 사정에서 졸업을 시킬 수 없었는데 내가 제자의 형편을 얘기해서 졸업을 시킨 제자였다. 졸업장도 내가 집까지 갖다 주었다고 한다. 제자는 국민학교 졸업장이 있어서 취직을 할 수 있었고, 오늘에 자기가 있다며 지금은 삼성 애버랜드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 오시면 꼭 찾아주라는 말과 함께 명함도 주었다. 제자가 강당 맨바닥에서 절을 할 때 내 가슴이 뭉클해 왔다. 내가 40년 전 가르쳤던 제자의 가슴속에 이렇게 각인돼 있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때 제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내 가슴은 봄 햇살 같이 따뜻하면서 행복했다.
동창회 의식이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국민의례가 끝나고 동창회장 인사말 다음에 은사의 덕담 순서가 되었는데 나더러 덕담을 하여 달라고 한다. 나보다 선배 되신 조 선생님을 놔두고 나더러 덕담을 하라는 것은 내가 모교의 선배여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연단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인사를 하니 박수를 친다.
[39회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을 대하니 40년 전 여러분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가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참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살기 힘든 때였습니다. 특히 내가 담임을 했던 비진학반이 떠오릅니다. 집은 가난하지 남들은 중학교에 간다고 진학 반에 편성되어 공부할 때 비진학반으로 편성되었을 적에 마음 아픈 상처가 오죽했을까! 선생님들 아무도 비진학반을 맡으려 하지 않아서 반을 편성해둔 교장 선생님도 걱정을 하고 계실 때 내가 자진해서 비진학반을 맡았었습니다.
아! 지금 진학 반 비진학반 할 때가 아닌데 이런 말을 하여 미안합니다. 동면학교 16년 후배여러분! 오늘 나를 잊지 않고 초대해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함석헌 옹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시는 여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연이 있습니다.
“만 리 길 떠나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 요즘 세상에 이 시에 나오는 그 사람을 갖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향이 같고 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동창생이요. 죽마고우요. 고향친구들입니다. 친구의 허물이 보이면 감싸서 고쳐주고, 좋은 점은 찾아서 많이 칭찬하고 격려하며, 모든 일에 서로 도와 협조하는 진실한 친구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모교의 발전에도 도움을 아끼지 마십시오. 제자 여러분, 후배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락 시간이 시작되어 품바가 사회를 맡아서 흥이 절정에 달해가자 사회자가 노래를 한 곡하라며 내게 마이크를 맡긴다. 나는 “다 같이 불러요.” 하고 “고향의 봄, 시작!”했더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백 명이 넘는 수가 함께 부르는 노래 소리는 강당천정이 떠 날아갈듯 했다. 점심을 먹고 승용차를 타고 오면서 제자들의 초대에 사흘 굶은 나그네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여준 사람같이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혼자서 나에게 이런 제자들이 있음을 행복해 했다.
첫댓글 옛추억이지만 그 사절 모두즐 열심히 가르쳤던 생각들이 주마등 처럼 떠오르는 좋은 글 잘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