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2일, 청천병력과도 같은 암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췌장암 이란다. 흔히들 세드무비의 대명사 이자 전형적인 주인공들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그런 익숙한 화면속의 주인공의 삶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질병이 췌장암이인데...ㅠㅠ.. 그때 당시론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눈물콧물 다짜내며 울었던것 같다. 그동안 음~~ 내생활은, 내생활이 무엇으로 어떻게 점철되어 왔는지 막상 생각해보면 아릿하며 허무함 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내 표현이 잘못된것 같긴 한데, 지금보다 더 지난 과거로부터 2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난 그때 국회의원 보좌관이라는 직업을 통해 또래보다 일찍 여러경험과 주목을 받는 생활을 하고있었던것 같다. 그러던중 어느날 새벽, 아버님께서 고1때 돌아가신 이후 하나뿐인 외동아들 건강하고 잘되라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하루도 멈추지않던 새벽기도를 가시다가 뺑소니 사고라는걸 그동안 말로만 들었었는데 아침에 출근하고나서 의원님모시고 국회로 서울로 올라 가던중이었는데..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불효막심하게도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니 일단은 외견상으로는 골절이나 이렇지는 않고.. 부딪혀 넘어지시면 머리를 땅에 부딪혔는데 뇌진탕은 아직 나타나지않는상태고해서 의원님께 말씀 드리고 얼른 서울모셔드리고 의원님차를 그대로 가지고왔다. 다른일정소화는 선배보좌관 께 부탁드려놓았고.. 그렇게 어머니의 교통사고는 이후 7년이라는 투병생활과 간병, 파킨슨과 알츠하이머, 역시나 고르게 나타나는데... 그렇게 간병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어머님 투병 4년쯤 둘째아이가 태어났는데 선천적 기형과 동반한 질병, 심장도 정상적이질 못하고 악성 구순구개파열, 아마도 우리아이는 그중에서도 거의 목구멍뼈까지 갈라진 최악성 구순구개파열과 심장기형...! ㅜㅜ... 아무것도 하지않고 있는데 조금만 틈이나서 생각하면 어머님도 둘째아이도 그리고 나도 와이프도 그리고 큰아이도 우리가족모두 각자 저마다의 힘든 질병과 간병과의 싸움으로 지치고 울고싶지않은대도 막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그리고 난또 그시절 가장의 무게를 쓰고 있었으니 막대한 병원비와 치료비, 어머니는 제고향 안동에서 병원에 계시고 아이들 엄마와 큰애, 작은애는 서울대학교병원에 서로 본의 아니게 헤어져 저마다의 간병일을 보살피며 하는데...그나마 내가 아빠니까, 남편이니까, 남자니까.. 첫수술을 백일무렵 했는데..그다음 돌때, 그후로 거의 일년에 한번씩은 대수울, 그중 해마다 수도없이 많은 보조수술.. 4살때까진 의학적으로 살수있다고 확답을 못하니까.. 첫백일 대수술이후 난 4살때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후면 어머님을 돌봐드리고 식사와 목욕과 안마 등을 해드리고 책도읽고 노래도 불러드리고나선 어머님이 주무시는데..그럼 아마 저녁여덟시경쯤, 그러고나선 난 곧장 부랴부랴 서울로 총알택시처러 두시간만에 병원에 도착한다. 면회시간이 지나서 직접볼수가 없지만 유리문 밖을통해 자거나 노는 모습만이라도 보려고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묠라서 그리고 고행하는 아내도 다독여주고 부득이하게 불쌍해져버린 큰아들에게 너무도 많이 미안해서 새벽으로 남대문, 광장시장, 동대문, 이태원 등질ㆍㄷ 다니며 아내맛있는것 사주며 고생의 조그마한부분 이라도 위로해줄려고.. 큰애는 한참 아빠를 찾는데 그래서 갈때마다 유행하는 아이들 비디오테잎과 좋아하는 음식과 간식?장난감등을 사서같이놀다가 아이가 잠들면 아내에게 미안한 인사를 하고서늣 안동으로 돌아온다. 거의 새벽 다섯시에서 여섯시 그리고는 딱 삼십분만 잔다. 어머니까 깨시기때문에... 이렇게 병간호를 25년을 해왔다. 그러던도중 아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어쩔수없이 아내의 원함을위해 이혼을 해주고 혼자서, 뭐 옛날부터도 혼자서키웠지만..점점 작은애 수술및 병원비가 감당이 안된다. 그동안 나는 모시던 의원님께서 낙선하셔서... ... 의원님과 사모님, 본당조직부장 님께서도 서운 한미연구소(현 민주연구소)로 같이 올라가자고... 그때 사모님께서 한미연구소 상임부회장.이셔서 제게 정치의 길을 아주 공고히 강하게 추천하셨는데.. 내 집안의 식구들 사정이 그렇다보니.. 정말 본의 아니게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에 한미연구소 과장으로부터 전해들은바는 원래 도여사(사모님)께서는 처음 부터 강성 적극민주의원 ㅅ이신 노무현대통령 캠프로 보좌관으로 이미 얘기는 다해놓으신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제가 가야할길이 어떻게 틀어지다보니... 그동안 저는 학창시절 운동부출신으로 프로 팀에도 진출해서 뛰어봤고 부상이 심해서 일본까지 가서 수술해서 귀국했지만 회복이 너무 큰 부상이나 구단이 원하는 기간내에 회복이 안되다보니 제가 제스스로 구단에 임의탈퇴선수로 등록해 달라고 요청을하였고.. 그러나 당시 막 감독으로 부임하셩ㅅㅇ던 차범근 감독님께서 재능과 열정이 아깝다고 따로 일년의 시간을 줄테니 재활에 매진해보라며 독일과 가까운 호주등지에서 재활의학과를통한 재활을 건의해주시고 그러시는데. . 우선은 구단으로 부터 ㅎ6개월 환자로 지칭등록되어 월급밖에 다른 수당과 오버페이 등이 전혀 지급되지 않으므로 어쩔수없이 포기할수밖에 없게되었고.. 그리하여 학업만 졸업만하듯 마치고 고향에 내려 오니 교육청에서 긴급하다고 지급으로 제게 특기교사로 임용발령을 내려주시는데..그래서 또 교사와 팀의 지도자 생활을 겸하여 하게되다보니 아내로부터 잦은 숙박과 전국대회출전으로 몇박몇일씩 집을 못들어가고 그러니까..내게 이혼할래 사표낼래.. 그래서 사표를 곧장내고서는..잠시 보름정도 어머님과 큰애하고 전국방방곡곡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것도 먹고..나름 힐링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고선 앞으로 살기위해 우선은 여기저기 시간강사로 강원대하고, 관동대하교, 경기대하교, 용인대학교, 김천대학교, 문경대학교 이렇게 강의를 다니다보니 몸은 너무고되지만 대학교수 봉급만큼은 되니까..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애들과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나이가 들어서라고 할수있는 직업은 교수가 안정적이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다시 학위공부에 목표한 연구논문을 작성하고 이런걸 통해서 김천대학교 이사장님께서 초대이사장님(현이사장님 부친) 초상이 났을때 비단 강사밖에 안되는 사람이 뭘그럴게 뭔가 바랄려는 모습으로 자신들의 초상을 끝날때까지 지켜드리고 추후 조문 인사장을 드리도록 말씀드려서 이사장님께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부분은 이사장님께서 제게 맡겨주시길래 성심성의껏 최선을다해 해드렸는데.. 초상이 지나고 이사장님께서 총장님과 학상처장님과 학과장님만 따로 저를 포함해 부르셔서 뵈었습니다만.. 이사장님 말인즉슨 도와주신건너무나 감사한데 그저 우리 학교에 강사로 나오시는 분한테 이번 초상일에 도왔다고 그댓가성으로 정식계약이나 정규고용직으로 해줄수없는건 아실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그때서야 제가 사실은 안동에서 국회의원 수행보좌관을 했었는데.. 그 의원님이 권정달의원님, 그런데 이번에 작고하신 권영우 설립자이시자 초대 이사장님을 저또한 자주 많이 뵈었으며 권영우 어른으로부터 부탁도 많아받아서 해결해드린 적도많고많아서.. 고인과도 청소모라시면 꼭 저에게 소고기와 쏘가리 찜, 마지막에 골부리 액기스 를 몇박스씩 주시는데..저와의 그런인연도 있었지만 권정달총재님의 또 각별한 부탁이 있으셔서 .. 사실은 그런 부탁들이 아니었어도 제스스로 제맘은 어른 가시는길 여태받은 은혜라면 은혜이고 해서 맘닿는것까지 내마음도 가시는길 함께실어 손흔들어 드린것뿐인데 너무들 오판하신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고 난후 김천대하교에 강의하러 오실때는 이곳이 혁신도시로 만들어진 개발도시로 학교인근에 초등중등학교가 두군데씩네군데가 있는데 스포츠크럽대항 대비 풋살대회 등 어린이 스포츠 보급사업도 재능기부차원에서 해줄수있지않겠냐고 하시는데 난 그저 만마디로 이사장님 말씀이면 네군데 수업 방향 오늘밤에 짜서 들어오겠습니다. 그래, 황교수 현장ㅈ일은자네가 하고 교육청담당은 내가 처리함세.. 그러고선 조금씩 평일 화수요일은 초등두학교 수업. 수목 오후는 중등두학교 수업.. 그러고나서 부리나께 달려와서 본강 누락학생들 학점처리위한 페스토 수업, 난 그런수업일수록 한번도 그냥빼주거나 흘려서 넘기거나 편하게 레포트처리로 절대 하지않았다. 그러나 고생한 친구들에겐 분명히 작은포상이 따른다. 일종이 동기부여다.
이렇게 이곳저곳 대학교의 강사를하면서 논문도 쓰고 초중고등학생까지 재능기부시간을 개설해주고 그때의 아이들은 몸속 머리속 스트레스호르몬인 도파민이 싹 사라지게 만들어진다. 그것도 스스로. 막 엔돌핀이 솟아나는데 감당이 안될정도로 넘지듯 표출되는것을 조금씩 보완하고 다듬어서 세련되게.. 나이브하지않고 날마다 나이스하게 지켜보기보단 직접참여하고싶도록 했더니 점차로 김천전체로확산되어 좋은문화로 자리잡게되어 김천시에서 그리고 의회에서 또 교육계에서 우리학교 이사장님 칭찬이 늘어지고 또 늘어졌다.
그바람인 이사장님께서 이번에대한 서비스 차원이지만 공역과 열성이 정말 프로멘테이지 스터가 되지않응션 아무것도 죽도밥도 안될뿐아나라 이사장님께도 앞으로 경영하시는데 상당ㅅ히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수도있는데.. 제게 과를 사나 신설하고 지금처럼 미달되고 그래서 그냥 집으로 가야되는 교수가 있는걸 여럿보인ㅆ는데... 앞으로 12일까지 시간을 줄테니 만약에 창과 첫해에 미달을 넘기면 넌힛트니까 앞으로 많이 기대할게. 하셨는데.. 첫해 첫 과 개과하고 전국의 온 인력 들에게 날 믿고 공부직접 진짜로 할 아이를 보내주라 그러면 내가 서비스가 아닌 제대로 스포츠지도학과니까 그에걸맞는 퀄리티있는 수업을통해 학상들의 프라이드와 확신을 심어주고 퀄리티를 깨끗하게 끌어올려 제대로 지도자의 길을 현장에서 ㅅ학계에서 그리고 각종 종목별 핏치와 그라운드에서 맘껏 여러분야 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갈수있도록 해줄테니..라는 서문을 모집문에 걸어놓고나서..아뿔싸 큰일이 터졌다. 우리학교 약 과별로61.2%가 미달이 되는데 수시에 모집인원 30명을 훨씬 뛰어넘어 114며신청이란다. 이를 어쩌나. 곧장 이사장닝께서 전화로 배정과를 증설해 줄테니 우선1피스트만 증설하고 각각의 인원은 40명, 그리고 관련교수는 당연히 황교수가 천거추천선출까지 하시오.. 라는 이사장님의 흥분에 찬 명령같은 아니 명령아닌 흥에젖은 신이나시는 목소리.. 그렇게 부교수 첫해에 어쩔수없이 정교수하라는걸 제가 일년만 늦추자고 형펑의 이기도 있을수있기에..그렇게 일년후에 정교수가되고..그러나 난 워크샵이나 동료회식자리도 한번 참여하지못했다. 그건 이사장님과 총장님은 아시고계셔서 이해를 해주시는데.. 갈수록 애 병원비가 더 들어가고 그동ㅈ안 제 월급으론 큰애랑 작은애 학비나 병ㅈ원비 생활비, 집세 등 모든걸 혼자서 감다하는데 그래서 지난 2012년부터 안동의 농산물도매센터에서 일을하면 몸이고단해서 그렇지 돈을붓면이 벌수있다고 하여 시작을 했는데 마침 시작한 시기가 사과철이라 하루에 사과상자 약 40kg이 넘는걸 차에서부터 약 5.000박스,에서 7,000박스까지 저녁 아홉시부터 새벽 여서히까지 쉬지않고 계속하는데..처음 얼마간은 양팔의 팔뚝의 인대가 늘어나서 매일테이핑을하고 하지만 지금도 오늘처럼 날이궂고 차가우면 욱씬욱씬하고 뻐근한 고로움이 항상따른다. 내가 받는 학교에서의 교수 봉급은 보너스, 성과금, 연구비 일부, 그니고 리서치 용역비등은 결국 학교로 들여줘야하는데 그러지않은 연세드신 분들이 있는데..나는 모두다 넣고 일을했다. 그래도 내연봉가지고 우리집 생활은 전혀 되질 않는다. 2014년도 줄기세포 치료를 하게되어서 난 무조건 해보자고 했는데 박사님 말씀이 돈이너무많이드니까 걱정이라시는데.. 아이 줄기세포 추줄해서 배양시켜서 보관하고 다시 수술을 서울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으로 가지고오는데..줄기세포추출비 대략 3,600만원에서 3,800민원 정도 그리고 수술비 1800만원정도.. 또 그리보 수술을 했던 하기전이든 후든.. 검사와 진료, 흡착과정의 흡착률 결손방지 컨트롤 등 줄기세포연구소에 3주마다 다니는데 압구정 이스트만 클리닉하고 두군데 진료비가 3주마다 55만원...그래서 작은애 병원비맛 믄조건 6,500만원... 그리고 가끔씩 수술비 몇천만원씩, 또 큰애 대학교 등록금, 월세 세금, 용돈. 책값 독서실비 등.. 그리고 식량비 아울러 내식량비, 생활비 등등 도대체 1먹이상은 해마다 앞으로도 몇년은더 필요할것 같다고...
여러 선생님,이야기를 소개말을 하다보니 구구절절이 이야기가 너무길어 졌습니다. 그러다가 2017년 제가 췌장암에 걸렸는데.. 동맥, 정맥,췌두부쪽 암으로 3기정도 되는데 수술이 안되고항암도 어려울것 같으니 서서히 정리해보시라고 하는데..뭐가 이런 무책임한 의사가 다있어..약간의 가능성이라도있다면 선택해봐야할것이고 추천해줘야할것이 당연지사일텐데..그래서 억지로 어거지로 아무도 못참고 못넘기던 항암제를 제가 141명째 인 제가 처음으로 시도해서 이겨냈고 일곱가지 약물모두 15%상향조정해서 시도해도 이겨냈으니 그야말로 기적이고 하느님ㅈ의 영과이라고... 그 이후에 정말로 감당못할 항암치료비와 치료비, 검사비, 약값, 항암약값 등으로 10개월만에 1억7천여만원을 쓰고나니 정신이 혼이해지고 바닥이난 상태라 어쩔수없이 퇴원했다가 10월 재발 검사를 해보니 재발이 되었고 약성의 전이도몇군데 있어서 어찌어찌 시골농토를팔려고해도 팔리지를 않아서 시골에게싯 오촌아제와 육촌형님께서 두분이서 그냥 맡으시라고 돈도 있는만큼만.. 이렇게 1억 4천 시가를 두고도 팔리지가않으니 달랑2천만원에 명의 넘겨주고 다시 그돈으로 정말정말 아끼고아껴서 재치료를 항암치료를 하고있는데.. 이제 주머니에 갖고있늣돈 단돈 백만원이 전부인데..이걸로는 더이상 항앙 치료를 계속해서 도하자하시는데 도저히 할수가 없을것 같아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첫댓글 기도해드릴게요ㅡ부디 나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