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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을에 사는 여성 4명이 독극물이 든 막걸리를 마셔 2명이 숨졌다. 중태에 빠졌던 1명은 의식을 찾았고, 복통 증상을 보이던 1명도 증세가 좋아졌다. (본지 7월 7일자 보도)
전남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 용림마을은 고요했다. 117가구 260명이 사는 마을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었고 들리는 것은 닭 울음소리 뿐이었다. 마을 입구부터 곧게 뻗은 폭 3m의 비포장 도로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100m정도 올라가자 우측에 커다란 은색 대문의 집이 보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2주 전인 지난 6일 새벽 5시30분 이 집에서 비극이 벌어졌다. 기자가 마을을 찾은 시각도 그때였다.
◆남편
백모(64)씨는 사고 당일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곡성의 야산에서 제초작업을 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백씨의 아내 최모(59·사망)씨가 노는 남편을 보다 못해 주민에게 부탁해 얻은 일자리로, 일을 시작한 지 닷새째였다.
남편은 경찰에서 "사고 날 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집의 개 두 마리도 짖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마을에 산 지는 올해로 38년째다. 작년까지 오이농사를 짓다 기름값이 올라 10년 만에 농사를 접었다.
그에게는 현재 4100만원 정도의 빚이 있다. 마을 주민 김모(45)씨는 "그는 하우스를 그만둔 후 주민들의 농사를 군말 없이 도와주고 농기계도 잘 고쳐주던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길 나서기 전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그는 "화장실 맞은편에 세워둔 흰색 1t트럭 뒤에 검은 봉지가 있었다"고 했다. 두 번 묶여 있던 봉지를 풀어보니 흰색 막걸리 두 병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상표인데다 병뚜껑이 열려 있었다.
평소 누군가 막걸리를 놓고 간 적이 없었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일하러 가는 사람이 놔두고 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막걸리가 든 봉지를 거실 앞에 두며 "누가 막걸리 놓고 갔네"라고 했다.
부엌에 있던 그의 아내는 "알겠다"고 답했다. 집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같이 일을 나가는 나모(46)씨를 만나 곡성으로 향했다. 일을 시작한 지 2시간 반쯤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던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인
최씨는 남편을 보내고 일 채비를 했다. 그는 6월 2일부터 정부에서 실시하는 희망근로를 나갔다. 마을 주변의 황전천에서 풀을 베는 일이었다. 작업은 오전 8시 시작돼 오후 5시 끝난다.
그는 아침에 남편이 말해준 막걸리 두 병을 자전거에 실었다. 작업장은 마을에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그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가는 도중 그는 수퍼에서 막걸리 한 통을 더 샀다. 사람들과 나눠 마시기 위해서였다.
최씨는 평소에도 남에게 뭔가를 나눠 주기 좋아했다.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도 목숨을 건진 장모(74)씨는 "최씨는 뭐든지 남에게 주려는 성격이라 살구도 가지고 와 나눠 준 적도 있다"고 했다.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난 오전 9시10분쯤 첫 휴식시간이 됐다. 술을 좋아하던 최씨는 "누가 고맙게 문 앞에 막걸리를 갖다 놨다"며 "더운데 한 잔씩 하자"고 했다. 막걸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모(76)씨는 "평소 마시던 막걸리와 모양이 달랐다"고 했다. 병뚜껑이 열려있었지만 최씨는 눈치채지 못했다. 금세 종이컵에 4잔의 막걸리를 따라 주위에 있던 이씨, 장씨, 정모(68)씨에게 건넸다.
막걸리는 흰색이 아닌 은은한 갈색이었다. 이씨는 "색깔이 이상해 '술이 왜 그렇대, 고급 술인가 보네'라고 말했다"고 했다. 장씨는 "새로 보는 거라 칡 막걸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정씨와 최씨가 먼저 막걸리를 마셨다. 이씨와 장씨는 "술 맛이 이상하다"며 바로 뱉었다. 5분 후 정씨와 최씨의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쓰러졌다. 장씨와 이씨도 뒤이어 의식을 잃었다.
◆경찰
문제의 막걸리에서는 11.85g의 청산가리(치사량 0.38g)가 검출됐다. 봉지에 같이 담겨 있던 다른 막걸리도 뚜껑이 열려있었지만 청산가리는 나오지 않았다. 막걸리는 용림마을에서 팔지 않는 상표다.
경찰은 "이 막걸리는 7월 2일 만든 것으로 누군가 이 부부를 살해하려고 순천 시내에서 사온 것 같다"고 했다. 마을은 외지인의 출입이 뜸한 편이다. 순천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12번 있고 외지인도 많아야 하루에 10명 안팎이다. 경찰은 수사진 40명으로 팀을 꾸렸지만 2주가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주민 중 평소 최씨와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이 있는지, 원한이나 치정(癡情)관계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지만 별 소득이 없다. 경찰이 알아낸 것은 막걸리 색깔로 보아 청산가리를 사고가 일어나기 2~4일 전인 이달 2일부터 4일 사이에 넣었다는 것뿐이다. 막걸리 병과 비닐봉지에서 나온 2점의 지문도 뭉개져 알아볼 수 없다.
경찰은 사망한 최씨와 불편한 관계였다고 알려진 A씨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의심 가는 주민의 통화내역을 조회했고 행적도 추적했다. 하권삼 순천서 형사과장은 "주민들을 전부 조사해 한명씩 배제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수사에 지쳤다. 하루 6시간씩 조사받고 최씨와 관계만 있다고 알려지면 압수수색을 당했다. 한 주민은 "경찰에 4번이나 불려가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받았다"며 "범인이 잡히기만 하면 찢어 죽이겠다"고 화를 냈다.
최씨의 남편 백씨도 경찰에 나가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았다. 마을에는 신고보상금 2000만원이 찍힌 '막걸리 구매 및 소지자 수배' 전단지가 붙었다.
◆용의자
주민들은 "백씨와 최씨는 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정모(60)씨는 "각자 농사일이 바빠서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남 이야기 안 하고 참견도 안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평판이 좋지 않은 B씨를 의심하고 있다. 사소한 일로 마을 사람들과 자주 다퉜으며 거짓말을 잘하고 죽은 최씨와 자주 술을 마시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순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 CCTV에도 B씨가 커다란 짐을 싣고 온 장면이 목격돼 '혹시 막걸리를 숨겨 온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주민 중에는 "우리 마을에 범인이 있다면 B씨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사건 당일 병원에 입원한 C씨도 의심을 받는다. 그는 평소 정신상태가 건강하지 못해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마을 사람들과도 교류가 없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 중 상당수가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숨진 최씨의 가족 중에는 '불미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경찰은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주민 가운데 차량을 소유한 48명도 조사를 받고 있다. 은퇴 후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D씨도 계속해서 의심을 받고 있다.
하 과장은 "아직도 ▲왜 다른 지역에서만 파는 막걸리를 사용했는지 ▲왜 쉽게 구하는 농약이 아니라 청산가리인지 ▲왜 청산가리를 탄 지 이틀 후에 범행을 저질렀는지 같은 의문점이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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