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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10. Muditā 더불어 기뻐함
Sympathetic joy
남의 성공, 행복, 번영을 함께 기뻐해주는 감정을 무디따muditā라고 한다. 사악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인기를 누리고 승진을 하고 재산, 교육, 지위 등을 얻으면 시기, 질투, 탐욕 등이 생겨난다. 하지만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는 그러한 사건을 보거나 들으면 기뻐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들은 삶을 이렇게 숙고한다. '아! 그들은 과거에 선업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지금 재산, 권력, 성공, 인기를 얻는구나. 이제야 자신들의 정당한 수확을 하고 있구나!' 이것이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이다.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muditā이란 자신의 친척과 친구의 행복을 극도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기쁨은 더불어 기뻐함과 닮았지만 사실은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이다. 눈물이 흐를 정도까지 이르는 그러한 극도의 기쁨은 갈애taṇhā와 탐욕lobha과 결부된 희열의 정신적 기쁨piti-somanassa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기쁨과 희열을 거짓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그 가운데는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더불어 기뻐함muditā을 보내는 방법
무디따muditā는 남들의 성공, 번영, 성취를 함께 기뻐해주는 것으로 이타적인 기쁨이다. 이는 남들이 자신들의 재산, 지위, 진보, 행복, 명성 등을 계속해서 누렸으면 하는 진실한 바람이다. 더불어 기뻐함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미 성취한 성공과 행복을 계속해서 누리기를'이란 의미의 빠알리어 게송 'yathāladdha sampattiyo mā vigacchantu'를 의식적으로 염송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행복을 접하면 더불어 기뻐함을 방사해야 한다. 빠알리어 게송을 그냥 염송만 해서는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이 생기지 않는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113~117, 법보시자 위데히(2023)
타인의 성공에 대해 질투하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질투로 인해 파멸하겠지만,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내 질투에 대해 아무런 영향 없이 오히려 더 번영하고 성공할 것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혐오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은 오히려 그 질투(issā)라는 심소법 그 자체이다.
9. Issā 질투
Envy
...질투하고 중상모략을 함은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질투하는 사람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 평가한다. 질투하는 사람은 윤회saṁsāra를 하면서 사악처에 떨어지겠지만 정작 질투를 받는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질투issā는 여러분 모두가 혐오하고 제거해야 하는 해로운akusala 마음부수이므로 그것을 혐오하고 제거해야 한다.
... 남을 중상하고 질투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한다. 즉 스스로 어려움만 당하고 정작 자신이 중상하고 질투하고 비아냥거렸던 사람은 더 잘 산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73~74, 법보시자 위데히(2023)
성내고 질투하는 것은 불쾌하고 더러운 느낌만을 스스로에게 남길뿐이다.
우리는 질투심의 불이익을 앎으로써 스스로 자연스럽게 질투를 자제하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질투의 반대인 함께 기뻐함(muditā)을 일상에서, 명상으로 닦아 점차적으로 이것을 우리의 습관과 성품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물론, 질투의 완전한 제거는 위빳사나를 통해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여 오염원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질투(issā)
...우리는 습관처럼 성을 내왔기 때문에 성냄은 오문과 의문인식과정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성냄에 뿌리한 마음은 언제나 불쾌한 느낌을 동반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다른 이들이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일어납니다... 질투는 언제나 불쾌한 느낌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타난 대상을 좋아하지 않는 성냄에 뿌리한 마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쾌한 느낌을 싫어하는 것만으로는 유익한 마음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특징과 역할, 나타남과 가까운 원인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우리가 오염된 마음들의 추함과 위험을 알게 되면 오염을 제거하는 유일한 수단인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질투의 가까운 원인은 타인의 성공입니다. 질투심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함께 기뻐함'(mudit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좋은 보시를 받는 것을 보면, 혹은 누군가가 그의 지혜나 훌륭한 성품 때문에 명예가 높아지고 칭찬받는 것을 보게 되면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은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이나 선한 성품들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질투는 위험합니다. 강한 질투심은 해로운 업의 길입니다. 그래서 질투는 악처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질투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이 비록 미세한 질투라도 마음을 챙기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칭찬받기를 원하지 나 말고 다른 이들이 칭찬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자아도 없고 오로지 정신(nāma)과 물질(rūpa)만이 있습니다... 수다원은 실재들에 대한 바른 지혜 때문에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는 자아나 즐거운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실재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경험하는 것들은 단지 조건지워진 실재로써 머물지 않으며, 자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에게는 질투심이 없습니다. 이미 그것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질투심의 불이익을 보게 된다면 질투하는 마음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것은 질투를 자제하는 조건이 됩니다. 질투의 반대는 함께 기뻐함(muditā)입니다. 함께 기뻐함은 누군가의 성공과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수행의 초기에는 다른 이의 행복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함께 기뻐함의 유익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함께 기뻐함이 일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다른 이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우리의 성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많은 순간 '함께 기뻐하는' 습관이 형성된다고 하여도 이것만으로는 질투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마(nāma)와 루빠(rūpa)에 대한 바른 통찰지만이 질투를 제거합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276~279,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3.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신 빠라구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내가 질투하던 대상이 반대로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대상이 되면 질투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도와주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므로 연민은 질투하는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필자는 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은 '지금 여기서 볼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68. ..."법은 세존에 의해서 ① 잘 설해졌고 ②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③ 시간이 걸리지 않고 ④ 와서 보라는 것이고 ⑤ 향상으로 인도하고 ⑥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A.iii.285)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509, 초기불전연구원(2004)
타인의 성공은 그가 뿌린 선업의 씨앗이 조건을 만나 개화한 것이다.
현명한 자는 '타인의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질투(issā)는 버려야 할 법이고 함께 기뻐함(muditā)는 일으켜야 할 법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중생은 각자 그 자신의 업의 주인(sabbe-satta-kamma-ssaka)임을 알아 그는 그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선업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하였다.
따라서 스님의 말씀대로 질투하던 대상이(= 성공하던 대상이)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대상이 될 때까지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① 즉각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② 직접적으로 바로 그 대상에 대해 질투라는 해로운 법이 아닌 감사함이라는 유익한 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왜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 대상이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연민의 대상은 '타인의 고통', '불행한 중생'이지 지금 이 시점에서 목도하고 있는 '타인의 성공'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대상이 다른 마음이 일어나려면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그 마음에 맞는 대상의 성질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야할 수밖에 없다.
꽤나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과정이다.
92.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때 선한 사람의 가슴이 동요하기 때문에 연민(karuṇā)이라 한다. 혹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하고, 죽이고, 부스러뜨리기 때문에 연민이다. 혹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흩어져서 가득 채움으로써 확장되기 때문에 연민이다...
94. 연민은 중생에게 일어난 고통을 완화하려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해코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고통에 압도된 자들에 대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잔인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근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2권 pp.177~178, 초기불전연구원(2004)
연민의 대상은 '타인의 고통'이며, 질투의 대상은 '타인의 성공'이다.
이 둘은 대상이 다르다.
연민은 대상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성공하는 대상을 측은하게 여길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성공하는 대상에게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졌으면' 하는 연민의 마음을 방사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위의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같은 대상을 향해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타인이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시기적으로도 실패하는 것이고, 인과적으로도 실패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9. Karuṇā 연민
Pitta, compassion
연민karuṇā은 불행한 중생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은 불행한 중생을 구하려는 마음과 남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애를 쓰며 속을 태울 것이다. 이는 진정한 연민이 아니고 선량한 사람의 마음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측은한 마음에 기반을 둔 정신적 고통domanassa일 뿐이다. 이것이 비록 해로운 법akusala인 정신적 고통일지라도 큰 악은 아니다. 사실 유익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이러한 마음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연민
때로 여러분은 곤경에 처한 친척이나 친구를 측은히 여긴다. 사실 이 마음부수는 근심soka으로 진정한 연민이 아니다. 진실한 연민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반면 진실하지 않은 연민은 근심과 걱정을 일으킨다.
선한 사람의 마음
선한 사람은 불행한 중생을 직접 목도할 때 연민karuṇā을 느끼지만 자신의 친구, 친척, 가족에게만 자애mettā를 보낸다. 하지만 십바라밀을 닦고 있는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나 이미 십바라밀⁷⁰⁾을 완성한 성자, 특히 보살은 마치 불쌍하고 고통받는 친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처럼 모든 중생들이 사악처apāya에 떨어질 위험과 해로운 행위로 인해 받는 불선업의 과보에 대해 매우 염려하는 큰 자비심을 지녔다. 그들은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중생에게 자애를 확산할 수 있다. 그들은 못된 아이까지도 평등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 비유될 수 있다.
⁷⁰⁾ 바라밀의 원어인 빠라미pāramī, 또는 빠라미따pāramitā로 중국에서 바라밀로 음역되었고 영어로는 perfection이라 한다. 성불의 수기를 받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윤회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덕성을 말한다. 보시, 지계, 출리, 지혜, 정진, 인욕, 진실, 결의, 자애, 평온
자애mettā와 연민karuṇā은 바라밀pāramī을 완수하는 동안 윤회 속의 보살의 정신과 물질의 연속체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으며 정등각의 순간에 완전히 성숙한다...
오늘날 유익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보살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유익할 때에만 선할 것이다. 나는 오직 선한 사람에게만 유익함으로 보답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비록 그들은 해롭지만 나는 오직 유익함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다. 그들이 유익하든 유익하지 않던 나는 그들에게 유익하게 굴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이에게 진정한 자애와 연민을 보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
연민karuṇā을 방사하는 방법
연민karuṇā의 마음부수cetasika는 불행을 당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중생들을 지금 처해있는 불행으로부터 구해주고자 하는 진정한 바람이 그 핵심이다. 그러므로 연민을 방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란 의미의 빠알리어 게송 'dukkhā muccantu'를 염송한다. 진정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졌으면 하는 심려 깊은 바람이다. 그의 고통이 빨리 끝나라고 'OO가 빨리 죽기를'이라고 바라는 것은 진정한 연민이 아니고 사실은 악의라는 해로운 행byāpāda-ducarita이다.(악의는 생각으로 하는 해로운 행이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111~117, 법보시자 위데히(2023)
연민은 타인의 실패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지만(= 근심하지 않지만),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에 대한 잔인함을 쉬게 하는 결과도 가져온다.
연민(karuṇā)
...앗타살리니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연민(karuṇā)의 가까운 적은 '일상사에 바탕을 둔 큰 슬픔'이다. 이것은 사람이나 어떤 즐거움 같은 '세속적인 삶'에 대한 탐욕으로 조건지워진 성냄이다. 연민(karuṇā)의 멀리 있는 적은 잔인함이다.(Vis. IX. 99) 잔인함이 있으면 연민(karuṇā)의 마음은 일어날 수 없다.
연민(karuṇā)의 가까운 적이라고 하는 슬픔이나 성냄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실재로는 화(dosa)를 내고 있으면서 이것을 연민(karuṇā)이라고 착각합니다. 누군가 비참한 상황에 빠진 것을 보면 연민이 아닌 다른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연민(karuṇā)이라는 유익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해로운 마음도 일어나기 쉽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완화시켜 주기 위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연민(karuṇā)입니다. 하지만 그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보고는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민(karuṇā)과 성냄(dosa)은 다른 마음부수입니다. 이것들은 연이어 일어나기 쉽습니다... 바른 지혜가 있다면 그것들의 다름을 압니다.
연민(karuṇā)은 자애(mettā)와도 같지 않습니다. 자애(mettā)는 성냄없음(adosa)이라는 마음부수로 모든 아름다운 마음들과 함께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며 다른 이들을 친구로 대합니다. 반면에 연민(karuṇā)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완화시켜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애와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다릅니다.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괴로워하는 중생들이므로 정신적 기쁨(소마낫사)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 기쁨이나 무덤덤한 느낌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완화시켜 주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민(karuṇā)으로 명상을 하는 것은 잔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함입니다. 선정에 들기 위하여 연민(karuṇā)을 닦을 때에는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모든 중생들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민(karuṇā)을 증장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롭게 하면 안 됩니다.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가지고 잘못된 말과 잘못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붓다께서 사왓띠에 계실 때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승들에게 해로운 업을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연민(karuṇā)의 이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육체적인 고통을 줄여주는 기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말을 듣거나 혹은 행동을 보게 되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지은 행위의 과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런 행위의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화를 내는 대신에 그에 대한 연민(karuṇā)의 마음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업과 과보에 대한 지혜는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입니다.
붓다께서 법을 설하신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연민(karuṇā)의 마음입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중생들이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가진 붓다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494~500,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따라서 우리는 범천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4가지 마음의 대상과 그 역할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brahmavihāra은 각기 다른 방사력을 지니고 있다. 자애mettā는 모든 중생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방사한다. 연민karuṇā은 불행으로 괴로워하는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과 동정심을 방사한다. 더불어 기뻐함muditā은 성공으로 기뻐하는 중생을 그 대상으로 하여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을 방사한다. 평온upekkhā은 모든 중생은 다 업의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고 보며 그들에게 평온을 방사한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118, 법보시자 위데히(2023)
4.
아신 빠라구 스님이 인색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니, 이 기회를 삼아 인색에 대해서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인색의 대상은 '자기의 성공'이다.
(10) 인색(macchariya):
'인색'으로 옮긴 macchariya는 특별히 알려진 어근이 없다... 『위방가 주석서』 에서는 인색(macchariya)을 경이로움을 뜻하는 acchariya에 견주어서 '이런 경이로움이 내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기를(mā)'이라고 한다고 해서 mā+acchariya로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초기불전에는 앞의 질투(issā)와 같이 많이 쓰인다.
[청정도론 XIV]: "173. 인색한 상태가 인색(macchariya)이다. 그것은 이미 얻었거나 얻게 될 자기의 성공을 숨기는 특징을 가진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움츠림으로 나타난다. 혹은 쓰디쓴 상태²⁴⁶⁾로 나타난다. 자기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추한 모습으로 보야아한다."
²⁴⁶⁾ ...여기서는 너무 인색하면 자기 재산 등이 줄어들 때 속이 쓰림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고 인색하면 항상 긴장해서 애간장을 태우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도 되곘다. 그래서 PED에는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the shrinking up of the heart)'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50, 초기불전연구원(2017)
그러나 아신 자나까 비왐사가 말씀하시는 인색에 대한 설명은 범위를 달리한다.
Macchariya에 대해 '자기의 성공' 뿐만 아니라 남들에 대한 인색함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즉, macchariya는 자기의 성공을 나누어가지지 않고 숨기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도록 하는 관대하지 못한 이기적인 생각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10. Macchariya 인색
Jealousy, selfishness
해로운 마음부수인 인색을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요즈음에 일부 사람들은 남에게 뭘 주거나 보시하기를 꺼려한다. 이러한 것이 인색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인색은 남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길 바라는 것을 뜻한다. 인색한 사람은 남을 질투하고 남이 재산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인색은 남이 승진, 돈, 명예, 미모 등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질시를 뜻한다. 삼장에는 다음 다섯 가지 인색macchariya을 설명한다.
1. 거처의 인색avāsā-macchariya: 집, 거처, 사원, 학교, 침대 등과 관련된 인색이다. 일부 비구는 자신이 소유하게 된 사원에 다른 비구가 와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자신이 머무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인색이 아니다. 남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바로 인색이다. 거처에 대한 인색을 가진 비구는 죽어서 자신의 거처에 아귀peta로 태어나거나 지옥niraya에 떨어진다.
2. 가족의 인색kula-macchariya: 신도와 친척 등에 대한 인색이다. 어떤 비구는 자신을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신도가 자기 외에 다른 비구를 후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자신의 친구와 친척과 사귀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인색이라 하지 않는데 불선한 비구는 그들의 믿음과 도덕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인색은 자신의 친척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속이 뒤집히고 내장의 출혈과 설사를 일으킨다. 그러한 사람은 내생에 무일푼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3. 탐욕의 인색labha-macchariya: 물질적 이익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악의가 바로 탐욕의 인색이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적당하지 않은 곳에 사용할 필수품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과 선한 비구가 필수품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의 인색이 아니다. 탐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오물 지옥gūtha-niraya에 떨어져 똥을 먹어야만 할 것이다.
4. 계급의 인색vaṇṇa-macchariya: 미모와 명성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이러한 인색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자신보다 더 아름다워지거나 더 유명해지는 것을 못 본다. 그러한 사람은 윤회를 하면서 내생에 추하게 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다.
5. 법의 인색dhamma-macchariya: 배움, 학문, 교육, 지식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남과 지식이나 정보를 나누지 않는 사람은 법의 인색의 죄를 짓는 것이다. 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학문에서 남이 자신을 능가할까봐 두려워하고 질문에 답변해 주고자 하지 않으며 기꺼이 남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을 잘못 이용할 해로운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법의 인색에 해당되지 않는데, 이는 그러한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멍청이나 머저리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뜨거운 재로 된 지옥kukkula-niraya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것이다.
고려해야 할 문제
다섯 가지 인색macchariya과 관련하여 누가 이러한 해로운 마음에 가장 많이 노출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십중팔구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보시에 의존하는 비구와 비구니가 이러한 해로운 성향을 답습하기 쉽다. 재가자의 경우에도 남이 자신보다 더 좋은 집이나 땅을 가진 것을 배 아파할 때 자신이 더욱 부유해지고 아름다워지고자 권력, 지위, 지식, 지혜 등에서 남을 능가하고자 할 때 인색이 생긴다. 그러한 인색을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하지만 인색과 관련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은 인색한 마음을 내는 자신이지 그 상대방이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죽어서 아귀peta로 재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색을 철두철미하게 단속해서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76~78, 법보시자 위데히(2023)
인색한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속이 좁고, 오그라드는 것이고, 쩨쩨한 것이다.
마음이 오그라들면 몸도 오그라들고, 움츠려 들어 펴지지 않는다.
인색의 반대는 무엇일까?
① 성품으로 보자면 '관대함'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마음부수로는 탐욕 없음(alobha)로 말할 수 있겠다. Alobha는 관대함, 보시와 동의어이다.
③ 행위의 측면에서 우리는 보시와 봉사를 통해 관대함을 증장시킬 수 있다.
인색(macchariya)
...인색함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한 성냄도 함께하므로 불쾌한 느낌입니다.
앗타살리니에 인색(macchariya)이란
이미 획득한 자신의 성공이나 획득하게 될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의 성공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나눔으로부터 움츠려듬 혹은 쩨쩨함이나 속이 쓰림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적인 추함으로 여겨야 한다.
청정도론(XIV, 173)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인색함은 속이 좁은 마음의 상태이다. 남에게 선물을 하기 위한 손을 뻗지 못한다. 인색함의 가까운 원인은 자신의 성공이다. 인색함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갖게 될 것)을 남과 공유할 수 없다.
인색함의 대상은 다섯 가지입니다. 담마상가니(1122)에 인색이라는 족쇄의 정의가 나옵니다.
다섯 가지는 주거, 가족, 보시(선물), 명성, 담마에 대한 인색함이다. 이런 모든 종류의 마음들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싫어한다, 비열한 마음이다, 인색하고 수치스럽다, 쩨쩨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의 관대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색이라는 족쇄이다.
...이러한 인색은 오그라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오그라들면 몸도 오그라들고, 움츠려 들어 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쩨쩨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관대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마음을 닫아걸고 움켜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보시(선물) 등을 한다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서비스)하기 위하여 손을 내밀지 않는 것입니다.
...인색의 대상으로 다섯 가지에 대한 설명이 앗타살리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었을 때 잘못 사용하게 될 사람에게 그것을 나눠주지 않는다 하여도 인색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승가에 치명적인 불명예를 가져올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하여도 이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합니다.
'주거에 대한 인색'은... 마음에 드는 방이나 혹은 앉을자리 같은 곳(명상하기 좋은 곳)에 우리는 인색할 수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인색'은 수도원에서 일하는 재가 도우미의 가족이나 그 사람들의 친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색한 비구는 다른 비구가 그 도우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는 공양물을 다른 이들과 나눔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물뿐만 아니라 칭찬에도 인색합니다... 다른 이의 덕행을 칭찬하는 것은 보시에 해당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칭찬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순간에는 마음에 인색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담마에 대하여 인색합니다... 수다원은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를 깨쳤고, 모든 형태의 인색함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담마를 모든 이들이 알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범부들은 담마에 대하여 인색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담마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담마를 욕보이기 쉬운 사람, 담마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 혹은 자기의 지식 때문에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담마를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담마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인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담마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관점에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마(nāma)와 루빠(rūpa)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실재들이 나에게 속해 있고, 그것들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속해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인색하여야 합니까?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짧은데 인색함 때문에 유익한 행위를 행할 기회를 많이 놓칩니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아도 없고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실체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은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은 사실 나타나는 대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마음순간일 뿐입니다. 이 순간이 사라지고 난 직후에 다른 마음 순간들이 일어나서는 이어집니다. 형상이라고 하는 대상 혹은 딱딱함과 같은 대상은 우리들이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단지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은 물질(rūpa)들입니다. 통찰지가 개발되면 인색함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수다원은 나마(nāma)와 루빠(rūpa)를 있는 그대로 봅니다. 자아가 아닌 무상한 것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그에게는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색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소유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보시를 안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것들은 우리가 행한 업의 과보입니다...
구두쇠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보시를 않네.
주지 않음이 위험인 것을.
배고픔과 목마름 이것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네.
바로 이렇게 마음을 쓰는 어리석은 이는
이곳 혹은 다른 세계로 떨어지네.
그러니 인색함을 가라앉히고
자선하는 마음으로 오염을 극복하는 보시를 하라.
틀림없이 미래에는 어떤 선처에
이 선행의 보상으로 좋은 몸 받아 태어나리.
다섯 종류의 인색함은 악처에 태어나게 하거나 혹은 바로 그 생에서 과보를 받게 만드는 해로운 업을 짓도록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과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 모든 인색함들은 습관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른 통찰지를 닦아 나가면 점차 관대해집니다... 인색한 마음은 언제나 불쾌하고 어떠한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인색함은 이렇게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나눔을 원치 않기에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에 대하여 취착하고, 인색하면 자아로부터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관대한 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들은 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보시행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익한 모든 행위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유익한 마음에 인색함은 없습니다. 인색함은 나타나는 실재들이 어떠한 것이든 바른 통찰지를 개발하게 되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280~290,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5.
사무량심의 이익은 너무나도 크고 광대하다.
우리는 그 과보로 편안하고, 사랑받고, 보호받고, 고요하며, 내생에 태어날 곳의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
중지부에 사무량심인 자애를 닦은 결과가 나옵니다. 사실 다른 사무량심인 연민, 함께 기뻐함, 그리고 평온도 이것의 이익과 같습니다. 사무량심의 이익은
① 잠을 편안하게 자고
② 편안하게 깨어나고
③ 악몽을 꾸지 않고
④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⑤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도 사랑받고
⑥ 천신들이 보호한다.
⑦ 불, 독 혹은 무기로 해침을 받지 않고
⑧ 마음이 쉽게 집중이 되고
⑨ 얼굴빛이 밝고 (그의 몸은 고요하다)
⑩ 혼란 없이 죽고
⑪ 출세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범천에 태어난다.
청정도론(IX 97)에 사무량심 가운데 자애(mettā)는 악의를, 연민(karuṇā)은 잔인함을, 함께 기뻐함(muditā)은 성냄을 그리고 평온(upekkhā)은 탐욕이나 적의를 잠재우기 위하여 닦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오염들은 실재들의 진정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조건지워진 실재들은 심지어 가장 훌륭한 성품들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입니다. 중지부에 한 수행승이 사무량심을 개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가슴에서 나오는 자애와 연민, 함께 기뻐함과 평온은 수승하다. 이것은 수승한 생각이다. 그때에 그는 알게 된다. 비록 이것이 지금은 수승한 것, 수승한 생각이라 하여도 이것은 종말이라는 본성을 가진 무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확고한 그는 오염을 파괴하고 승리한다. 그 상태는 완전하게 사라져 버리고 그 세계로부터 결코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고, 아직 법(현상 - 역자)들에 대한 욕망이 있고, 법(현상 - 역자)들을 기뻐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이 세계에 속한 다섯 가지 족쇄들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506~507,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고, 이익을 주면 이익을 받는다.
사부대중이 사무량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익을 향유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사무량심을 닦아 일상의 행복과 내생의 성공, 고요함의 이익을 얻기를!
모든 중생들이 이 수승함을 기반으로 삼아 법을 조사하고 완전하게 파악하여 오염을 제거하고 열반을 실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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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