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 7개월 만에 고국으로
"끝없는 고통 필요한 게 육상… 그걸 안해도 되는 곳이 한국"리오 알만도 브라운(53) 코치는 지난 5월 한국 국가대표 단거리 코치로 대한육상경기연맹과 계약, 한국에 왔다. 자메이카 육상대표팀에서 선수 훈련 프로그램 개발을 맡았던 그는 30년째 깨지지 않는 100m 한국기록(10초34·1979년 서말구)에 도전하려 했고, 선수들에게 자메이카식 기술도 가르쳤다. "한국도 할 수 있다"는 것이 7개월 전 그의 소신이었다. 그러나 연맹은 그와의 계약 연장을 거절했다. 브라운은 16일 고향으로 돌아간다. 세계 최강 자메이카의 육상훈련법이 한국에선 실패로 끝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14일 만난 브라운 코치는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처음엔 인터뷰를 사양했다. 하지만 "누군가 한국 육상의 현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며 어렵게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열대 출신 브라운의 한국 생활 7개월은 '자메이카와는 날씨만큼이나 다른 한국적 현실'과의 투쟁이었다. 브라운은 한국선수들이 '영광스러운' 대표팀 차출을 기피하고,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해서도 갖은 핑계로 훈련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기권하려는 행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브라운은 "자메이카에서는 우사인 볼트라 해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대표에서 탈락시킨다. 규율을 위해선 올림픽 금메달도 희생할 수 있다"며 "그러나 한국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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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육상 지도를 위해 자메이카에서 온 브라운 코치 는 7개월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는“누군가 한국 육상의 현실을 말해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브라운은 "열심히 훈련하지 않고도 대표가 될 수 있고, 풍족한 월급을 받는 한국의 시스템이 문제"라며 육상선수와 코치들의 정신자세가 바로잡히지 않으면 한국 육상의 꿈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요지로 말했다. 한국 선수들이 기록 경신에 도전하지 않아도 전국체전에서 괜찮은 등수에만 들면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대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세계와 경쟁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브라운 코치는 "한국은 육상선수의 천국"이라고 했다.
육상계 일부는 브라운 코치에 대해 "(한국대표팀을 이끌기엔) 사람이 너무 순하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브라운의 중도하차를 그의 자질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브라운의 패배가 아니라 한국 육상의 패배"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대표팀보다는 자신들을 우대하는 시·도팀을 우선시하는 한국의 선수와 코치들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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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을 찾은 브라운 코치는“출발선에 서는 선수는 고독하다. 그들에게 성원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한국육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팬들의 관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였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자메이카에서 온 브라운 코치는 육상은 결코 재미난 스포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육상은 끝없는 고통을 동반합니다. 형벌을 견디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걸 안 해도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입니다.” 브라운의 눈에는 한국 육상이 세계 수준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보인다는 얘기로 들렸다.
브라운은 “일국의 대표선수라면 ‘달리다 죽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며 자메이카의 일화를 들었다. 1980년대에 자메이카 대표팀이 트리니다드 토바고 원정 경기에 출전했을 때, 50여명의 선수단은 경비 문제로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하다가 경기 시작 2시간 전에야 대회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다고 한다. “한국 선수들이라면 그렇게 했겠어요? 금메달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거죠. 한국 최고라는 선수들이 기록을 위해 다른 나라 선수들만큼 노력하나요? 그저 국내 1위에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는 ‘대표선수는 이래야 한다’는 말을 이어갔다. “대표선수가 국가를 위해 뛴다면 육상은 저절로 발전할 겁니다. 대표가 된다는 건 그런 겁니다. 뒤에 숨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겁니다.” 자신이 7개월 동안 지도한 한국의 대표선수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한 눈치였다.
브라운은 한국 선수들이 때로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자메이카에서 온 흑인이기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브라운은 털어놓았다. 하지만 브라운은 한국 육상을 걱정했다. “육상이 궤도에 오르려면 일단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의 100m 같은 주요 종목 결승전에 한국 선수가 진출해야 합니다.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주요종목의 결선에 ‘한국의 ○○○’이라고 선수의 이름이 소개될 때, 한국인 모두가 전율을 느낄 겁니다. 그 순간을 위해 코치와 선수들이 뛰고 또 뛰어야 합니다.”
브라운은 “한국 스포츠가 양궁·태권도·탁구 같은 종목에선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데 육상만 안 되는 건 뭔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선수들의 행태 이외에도 대한육상연맹 집행부도 좀 더 선수와 코치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브라운에게 ‘당신은 왜 문제 있는 선수를 탈락시키거나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는 훈련을 돕기 위해 고용됐을 뿐, 선수를 채찍질할 권한이 없는 외국인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브라운의 마지막 인사는 “한국은 매우 아름다운 나라이며 나는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 한국 선수와 지도자들도 국가대표 마크를 더 사랑하고 존중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실패’하고 떠나는 자메이카 코치는 한국의 선수와 지도자들에게 “제발 대표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오히려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