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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어머니 심부름으로 동네 점방(구멍가게)에서 탁주 한 되를 받아올라치면 집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짧은 길은 돌아오는 사이 막걸리는 거지 사분의 일은 우리 배속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와 대소가 어른들 또는 동네 어른들이 막걸리를 들이키는 모습이 참 멋있고 맛있어 보였다. 안주래야 멸치 한 줌과 김치 한 접시 정도였지만 노오란 양은 주전자에서 쌀 뜨물 같은 막걸리를 주발 가득 부어서 드시던 어른들을 바라볼라치면 나도 모르게 군침이 줄줄 흘렀다.
막걸리 한 되 정도는 어른들 두서넛이 모이면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막걸리가 떨어질라치면 어머니에게 ‘술 업데이’ 한 마디만 하면 되셨다. 그럼 어머니는 신속히 물주전자를 비워내고 그것을 내 손에 들려주면서 동네 점방으로 나를 보내셨다. 우리의 유년기에는 막걸리가 지금처럼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지 않았다. 한 말이 들어가는 희고 커다란 술통에 배달되어 술독에 보관되었다. 그래서 막걸리를 사려면 주전자를 들고 가서 퍼담아 와야만 했다.
그 날도 마침 집에 아버지 친구분이 오셔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 막걸리가 도데체 얼마나 맛이 있기에 어른들이 저렇게 사족을 못 쓰도록 좋아하시는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어른들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은 막걸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내 마음속에 만들어두었다. 어른들이 공연히 아이들은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은 막걸리가 어른들만 먹어야 할 만큼 맛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머리속이 휘리릭 돌아갔다.
마침내 그날, 어른들의 야단치는 상상과 막걸리로의 진한 호기심 사이를 왕복하던 나는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어귀에서 드디어 주전자 끝을 입에 물고 한 모금 쭉 빨아당기는 엄청난 모험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첫 술맛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떠했든 맛이 어떠했든 처음 술을 입에 댄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은 어른들만 마시는 것이다. 좀 억지를 부리자면 그런 술을 아이들이 마시는 것은 어른을 흉내 내는 한 방편일 것이다. 금기시된 어른 놀이...그런 술의 첫맛..., 바로 그 어른이 되는 순간의 첫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두 살 아래인 동생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희야 마싯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주전자 주둥이를 동생 입에다 갖다댔다. 결국 동생은 나보다 무려 두 살이나 빨리 어른 놀이를 하게 된 것이다.
“마싯제..?”
동생이 눈을 꿈벅거렸다.
“함 더 무 바라”
동생이 다시 주전자 끝을 물었다. 이번에는 아주 꿀꺽꿀꺽 들이킨다. 나는 급히 주전자를 떼내고는 누가 볼세라 얼른 또 한 모금을 빨아당겼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막걸리의 냄새는 썩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시금털털한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결국 그 짧은 길을 돌아가면서 나와 동생은 골목 어귀에 선 채 막걸리 주전자가 눈에 띄게 가벼워질 만큼 마시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양 모른 척하고 돌아와 주전자를 어머니께 내밀었다.
“하이고 되를 이래빠이 안 주더나....얼라들 갔다꼬.....!”
아이들이 가니까 술을 적게 주었다는 어머니의 볼멘 소리였다. 어머니의 이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범죄는 완벽한 뒤처리가 된 셈이었다. 대신 애꿎은 동네 가게 아주머니는 졸지에 인심이 야박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분이 늘어지게 좋아진 것이 범죄의 성공에서 얻어진 쾌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땐 당연히 몰랐다.....! 술이 취하는 것인 줄 알고 마셨어야지...!!
그 뒤로 막걸리 심부름을 할라치면 동생과 나는 응당 막걸리 서너 모금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쓱싹'하기를 반복했다. 어머니는 술이 적다는 타박을 하시면서도 종내 아들내미 둘이 그런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셨다. 다만 판돌이네 구멍가게의 인심 야박한 것에만 혀를 차셨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마침내 우리의 완전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2. 술빵과 막걸리
술빵....! 오전에 밀가루 반죽을 내고 거기에 술 한 되를 통째로 들이 붓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면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데도 놀러가지 않고 오로지 반죽이 얼마만큼 부풀어 오르는지에 관심의 총력이 모아졌었다.
주전자 주둥이에 침을 좍좍 발라대고 이유 없이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었던 두 개구쟁이의 범죄는 그러나 채 몇 번도 시도되지 못한 채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 사건이 터진 것은 어이없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술빵을 찌던 날이었다. 인과의 법칙은 참으로 묘하기만 했다.
술빵은 당시의 우리들에겐 특별한 정도가 아니고 '아주아주 특별한' 음식이었다. 술빵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밀가루에 이스트 가루를 넣어서 적당히 술과 물을 붓고 약간 묽게 반죽을 한다. 다음, 이를 큰 들통 같은 것에 넣어 아랫목에 이불을 쒸워 묻어 둔다. 예닐곱 시간쯤 지나면 반죽 속에 조금씩 기포가 생겨 원래의 반죽 크기보다 1.5배 정도 부풀어 오른다. 이때 찜통에 받침을 대고 무명보자기를 받침에 덮은 다음 반죽을 부어서 찐다. 곧 먹음직스럽게 부실부실한 술빵이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강낭콩 같은 것을 드문드문 흩어놓으면 한층 모양도 나고 맛이 좋았다. 이렇게 술빵을 쪄서는 설탕을 듬뿍 찍어서 한입 가득 베어 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하얀 설탕은 문자 그대로 흰눈과 같아서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사라진다. 가뜩이나 맛있는 술빵에 설탕까지 찍어먹는데 그만한 희열이 또 있었을까...!
어머니가 술빵을 찌겠다고 선언한 그 기분 좋은 날도 나와 동생은 노란 색 양은 주전자를 들고 판돌이네 점방에서 탁주 한 되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평소에 들고 다니던 한 되짜리 작은 주전자가 아니고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크게 보이는 두 되짜리 커다란 주전자였다. 평소에 들고 다니던 작은 주전자에 구멍이 나서 큰 주전자를 주신 모양이었다.
그날의 실수는 순전히 큰 주전자에 적응을 못한 탓이었다. 똑같이 한 되를 받아왔지만 넓은 주전자 주둥이를 통해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 막걸리는 작은 주전자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게다가 주전자의 기본 무게를 생각하지 못한 두 개구쟁이는 주전자가 묵직한 것만 믿고 마주서서 계속 술이 입안에 흘러들어오는 대로 양껏 마시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을 하면 이미 수 차례의 경험을 통해 술맛까지 익힌 터이니 동생이나 나나 제대로 술발을 받은 것이다.
“아고야꾸라.....술이 와이래 업노.....!!”
어머니의 말씀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얼라들이 갔다꼬 쪼매만 주는갑다....”
영악스러운 둘째 아들내미가 어마 뜨거워라고 앞질러 가는 소리를 했다. 어머니는 일순 내 말에 수긍하는 듯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동생을 물끄러미 보시고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하셨다.
“느거 술 무겄나....?”
끝내 가슴이 ‘와장창’ 하고 무너졌다. 동생 얼굴을 바라보니 이 녀석이 왜 그런지는 얼굴이 벌게진 것이 가쁜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 역시 왠지 모르지만 땅바닥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이상하게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우리가 무진 술을 묵노....”
나는 딱 잡아 땠다. 이미 마셔버린 것에 흔적이 있을 리가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상책이었다.
“니, 입 한번 아- 해바라”
그날 나는 어린 녀석이 몰래 술을 퍼마신 것에다가 더 어린 동생에게 술을 먹인 죄에다가 무엇보다도 거짓말한 죄까지 삼중가중처벌을 받아야 했다. 주전자에 술 대신 물을 담아 쳐들고 있는 벌을 받았다. 동생은 내가 벌을 받건 말건 얼굴이 벌개진 채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벌을 받는 중에 하염없이 졸리던 나 역시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실컷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띵한 것이 몸이 마치 몸살에라도 걸린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인데 동생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목이 타는 듯이 아프고 뱃속이 아리아리 아팠다. 몸이 아팠지만 낮에 어머니 화를 돋우어 놓았으니 뭐라고 하소연하기도 무서워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하시다 말고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뜨뜻한 물에 설탕을 두어 술 넣어서 마시라고 주셨다. 잘한 것도 없는데 어머니가 설탕물을 타주시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응석받이 솜씨가 나와 머리가 아프느니 목이 아프느니 칭얼대기 시작했다. 물론 돌아온 소리는 ‘그라이 앞으로는 술 묵지 마래이’ 하시는 말씀 뿐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왜 몸이 아픈데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술빵을 넉넉하게 쪄서 우리 오누이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저녁상에서 주당이 되었던 아들내미 둘의 영웅담을 쏟아놓아 아버지를 한 바탕 포복졸도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즐거운 모습에 영문도 모른 채 기분이 으쓱해져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사람처럼 의기가 양양해졌다.
그러나 정작 술이 왜 무서운 것인지를 안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3. 우물 파기와 막걸리
우물도 집집마다 다 있지는 않았다. 마을에는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지만 우리 집과는 거리가 멀었고 바로 옆에 담을 터고 살던 큰집 우물로는 물을 길러 가지 못했다.
장마가 끝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우리 집에 대역사가 펼쳐졌다. 우리 집 마당 한 쪽에 우물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우물을 파는 일을 경험해보지 못해서였겠지만 그때 우물 파는 작업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 우리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우물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 집 바로 옆이 큰댁이었는데 우리 집과 큰댁 사이의 담을 터서 내왕을 하고 다녔으므로 일부러 우물을 따로 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큰댁 우물은 보호석이 없이 우물 입구만 조금 돋운 것이라 어린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여겨졌다. 덕분에 나는 우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지만 우리 집에서 물을 길어먹기에는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부터 어머니가 자꾸만 큰댁으로 놀러가는 것을 막았다. 특히 누나들에게는 아예 큰집 출입 금지령이 떨어지게 되었다. 물을 길러 가는 것은 초등학교 상급생이던 형이나 어머니가 도맡아 놓고 다닌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당시에는 구체적인 이유를 몰랐지만 어머니의 말을 따르면 ‘요석궁 가시나’들 때문이었다. 그즈음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시 교류를 시작하면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낮에는 유적지 관광을 하고 밤에는 고급요정에서 술을 마시는 이른바 ‘기생관광’을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서울과 경주를 주요 관광대상지로 삼았던 시절이다. 경주는 일본 관광객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우리 마을은 고급요정으로 유명한 요석궁이 있어서 날마다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있었다. 당시 요정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동네 전체에 퍼져 하숙을 하고 있었다. 집이 넓고 방이 많았던 큰댁에서도 그녀들을 상대로 하숙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딸이 세 명이나 되는 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큰집 우물가에는 요정에 다니는 ‘누부야’들이 윗통을 벗어젖히고 멱을 감았고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가씨들을 보고 질겁을 하셨다. 특히 우리 누나들이 요정 아가씨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심각히 걱정하셨다. 그러다 보니 큰집 출입금지령이 떨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내가 그 '누부야'들에게 무슨 과자라도 하나 얻어 먹었다가는 어머니에게 불같은 호령을 들어야 했다. 물론 그 이유를 어린 내가 알턱이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얻어먹는 거는 걸비 짓이다’는 궁색한 핑계로 어설픈 이유를 대실 수 밖에 없었다.
동네에는 큰댁 이외에 마을 공동 우물터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윗마을에 있던 그 우물은 우리 집에서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큰댁을 두고 다른 집으로 가서 물을 길어먹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었다. 이래저래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 때문에 어머니가 겪는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물을 파게 된 이유였다.
우물을 그냥 겉에서 보면 폭이 한 일 미터 남짓 정도 되고 깊이가 한 10여 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물의 겉을 보고 우물 파는 것을 섣불리 상상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우물 파는 공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공사였다.
우물을 만들기 위한 기본 폭은 최소한 4미터가 넘었다. 그리고 그런 넓이로 10여 미터를 파서 지하수가 나오기 시작하면 한쪽으로는 물을 퍼 올리면서 암반이 될 만한 바닥이 나올 때까지 계속 파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암반이 나오면 굵기가 아이들 머리만한 돌들을 밑에서부터 우물이 될 가운데 부분만 남기고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이렇게 하면 지하수가 돌 사이를 빠져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걸러지게 되는 것이고 또 그게 일종의 보온 작용을 하여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게 하는 모양이었다. 돌을 다 쌓고 나면 널직널직한 판석으로 주위를 덮고 하얀 회를 섞은 흙으로 판석의 틈새를 마무리하고 우물 입구에 안전을 위한 원통 보호구를 올리고 흙이나 자갈 등으로 주위를 다지면 작업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굴삭기같은 중장비가 없던 때이다. 우물을 파는데는 마을사람들과 친척분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우리집 우물은 사흘에 걸쳐서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나흘째에 가서야 마침내 물이가 터져 나왔고 공사를 시작한 지 열흘 가까이가 지나서 겨우 판석을 덮고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막걸리에 대한 나의 무서운 추억은 바로 이 우물 판석을 덮는 마지막 작업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후 서너 시 무렵에 새참이 나왔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문적인 일꾼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네 어른들과 대소가 어른 및 사촌 형들이었다. (아버지가 막내이시므로 사촌형들은 나보다 적게는 열두어 살부터 많게는 2-30살이 많았다) 이제 우물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러 일도 얼마 남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가 막걸리를 한껏 내놓으셨는데 거기서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짓궂은 사촌 형들이 사촌 동생 한 녀석과 나를 붙들어 놓고 술 시합을 벌인 것이다. 아이들의 모든 시합과 싸움은 언제나 ‘니 꼬치 있나?’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 ‘노래 부릴 줄 아나?’로 이어진 것이 ‘술 묵을 수 있나’까지 가고 만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꼬치도 보여주었고 당시에 유명한 가수였던 한 모씨의 노래 “사랑해 사~랑해요” 를 구성지게 불러 어른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마침내 사촌 동생과 ‘목숨을 건’ 술시합까지 벌이게 된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네 사발쯤에서 어른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가물가물하고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같다. 그리고 다섯 사발을 마신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뒤는 아무 생각이 없이 깜깜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이 이슥해서였다. 그 사이에 내가 잠든 채 토했는지 어땠는지 따위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다만 그 다음 날까지 꼼짝도 못한 채 누워서 무슨 열병 같은 것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술을 마신 철부지 아이보다는 장난을 친 어른들이 원망스러워 내 누운 모습을 볼때마다 억울해하셨다. 그리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아들내미에게 몇 번이나 꿀물을 타주셨는데 그때마다 도리질을 치는 아들내미에게 뜬금없이 눈을 부라리셨다. 어린시절 막걸리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 이렇게 짙은 고통을 싸안은 채 정리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막걸리에 이골이 나서일까 나는 요즈음도 다른 술은 몰라도 막걸리만 만나면 마치 물만난 고기처럼 반갑다. 그리고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의 그 짜릿짜릿했던 맛을 주던 양은 주전자가 생각 난다. 물론 우물을 팠던 그 여름 날의 무서웠던 숙취의 띵-한 기억도 술잔 속에 떠올라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막걸리는 영원한 내 추억의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