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9. 4. 05:54
■ 이화종(李和宗)
[생졸년] 미상.
[역과]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1위(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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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태지(泰之). 아버지는 관상감참봉(觀象監參奉 : 從九品) 이상행(李商行)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에 역과에 합격하였다.
중국어에 정통(精通)하였고 자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관직이 2품에 이르렀다. 뛰어난 재치로 어려운 외교업무를 수행하였고 그에 대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燃藜室記述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韓國精神文化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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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譯官李和宗赴京時得螭背脊中有六大珠]
譯官李和宗少嘗從止亭,陰崖赴京時。武宗南巡。和宗乘驛往行在。至南京而還。至高郵水渚。馬倦卸坐。沙中有露骨。摸出之。六節而屈曲。色白如雪。謾藏之馬幨中。及到北京。牙儈陳貨量價。和宗出白骨。誇而紿之。有一商見而拜曰。此螭背脊也。中有六大珠。眞無價也。亟鋸之。果有六珠大如桃核。卽以段疋滿千兩價而易去。和宗曰。此天賜也。豈可自專乎。悉分其段。自上通事至奴僕。俱均給之。兩公嘉歎。作詩以贊之。<끝>
[국역]
역관(譯官) 이화종(李和宗)이 소싯적에 지정(止亭)ㆍ음애(陰厓 이자(李耔)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런데 마침 무종(武宗)이 남방(南方)을 순행 중이므로 화종은 역말을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갔다가 남경(南京)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우(高郵) 물가에 이르러 말이 지쳤으므로 앉아 쉬고 있었는데 모래 속에 삐죽이 나온 뼈가 있었다.
그래서 파내보니, 여섯 마디인데 꾸불꾸불하고 눈같이 희었다. 실없이 짐 속에 챙겨가지고 북경에 도착하니 장사꾼이 물건들을 벌여 놓고 값을 논란하고 있었다. 화종은 그 뼈를 꺼내어 자랑하며 속였다. 한 장사꾼이 보더니 절하면서,
“이것은 뿔없는 용의 등뼈인데 큰 구슬 여섯 개가 들어 있으니 참으로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입니다.”
하였다.
급히 톱질해 보니 과연 복숭아씨만큼 큰 구슬 여섯 개가 나오는 것이었다. 곧 천 냥 값에 해당하는 비단을 주고 바꿔갔다. 화종은 ‘이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니 어찌 내가 독차지할 수 있느냐.’ 하고, 그 비단을 죄다 나누었는데 상통사(上通事)에서 노복(奴僕)까지 고루 주었다. 양공(兩公)도 아름답게 여기고 시를 지어서 칭찬하였다.
성소부부고 제24권 / 설부(說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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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17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강목(綱目)을 사 오다.
《상서고사(象胥故事)》에 이르기를, “중묘조(中廟朝)의 역관 이화종(李和宗)이 연경에 갈 때 홍문관에서 《강목》을 사 오도록 하였는데, 금령이 엄하여 감히 책 가게에는 물어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부(禮部)에서 연회를 베푼 날 이화종이 대당(大堂)에 글을 올리고 이어 말로 진달하면서, 고금(古今)에 통하지 않으면 마소에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다는 말을 인용하여 반복해서 논열하였는데 말이 청산유수와 같았다. 이에 대당이 크게 칭찬하고 곧 제본(題本)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였다.
[原文]
購網目
象胥故事曰。中廟朝譯官李和宗。赴京時。弘文館令購來網目。而禁嚴不敢質諸書肆。禮部宴日。和宗呈文于大堂。仍爲口陳。引不通古今馬牛襟裾之說。反覆論列。言若懸河。大堂大加稱賞。卽題本許貿。
[주01] 網 : 綱
[주02] 網 : 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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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秀魚)
우리가 숭어라고 하는 물고기의 이름이 여럿이다.
수어(秀魚), 숭어(鯔魚, 崇魚), 수어(水魚, 首魚) 등으로 부르지만, 자산어보에서는 치어(鯔魚)라 하였다. 한편, 지역에 따라 고기의 크기 등을 말할 때 모치, 모쟁이, 동어, 댕기리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참숭어와 보리 숭어로 대별할 수가 있다.
바다에서 부화 된 숭어 새끼는 봄이면 어마어마한 무리를 이뤄 민물로 거슬러 올라온다. 이때 숭어는 눈에 하얀 꺼풀이 덮여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해동역사 34권 교빙지(交聘志)의 기록에(729) 2월에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숭어(鯔魚)를 보냈다는 기록과, 세종 11년(1429) 7월 19일에 숭어 440마리를 북경으로, 성종 9년(1478) 8월 13일에 말린 숭어 300마리를 북경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에 숭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모치 또는 모쟁이라 불리는 작은 고기
고전번역서인 대동야승에는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숭어를 주었는데, 먹고 맛이 아주 좋다면서 이 물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통사(通使)가 "수어(秀魚)라는 물고기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자, 중국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비늘 있는 것이 수만 종이거늘 어찌하여 이 고기만 수어(水魚)라 하느냐. 물속에 있는 고기를 모두 수어(水魚)라 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을 하였다.
이는 수(秀)와 수(水)가 발음이 서로 같아 사신이 이를 분별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이에 역관 이화종(李和宗)이 "물고기 중에서 맛이 가장 좋다 하여 수어(秀魚)라고 했다."고 하자 이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실려 있다.
숭어의 맛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겨울 숭어는 달고, 여름 숭어는 맛이 없다. 또한 숭어의 알을 소금에 절인 것을 수란(秀卵)이라 하고 최고로 쳐주었다. 그래서인지 평양에서는 동수어(冬秀魚), 즉 겨울 숭어를 최고로 쳐주었고 정포(正布)를 필로 주고 바꾸기도 하였다고 영행록선집은 기록하고 있으며, 만기요람에서는 숭어 한 마리(尾)에 7斗 혹은 3斗 5升을 주고 산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아쉽다면 무슨 곡식이라고 명시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해남의 정우형(鄭愚衡) 집안의 문서에 1906년 1월 14일 蓮塘에서 宗人 鄭昌錫이 동곡의 五衛將 鄭愚衡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부탁하신 어물을 겨우 산 것이 있는데 件記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 大秀魚 6尾 값은 21냥임이라는 기록이 수집사료해제집 11권에 실려 있다. 그만큼 숭어의 맛이 좋아 비싼 값이었음을 짐작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숭어를 두고 전해 오는 말들이 있다.
겨울 숭어 앉았다가 나간 자리 뻘만 훔쳐 먹어도 달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어도 뛴다.
자신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저보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쓸 때 비유하는 말
숭어 뜀 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광대가 손을 땅에 짚고 거꾸로 뛰어넘는 재주를 일컫는 말.
숭어를 두고 또 다른 말은 제사상에 오를 때는 수어(首魚), 술안주나 밥 반찬으로 오를 때는 숭어(崇魚)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아래의 글은 옥담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숭어(秀魚)
강과 바다 깊은 물속에 사는데 / 沈潜江海外
헤엄치다 사람의 그물에 걸렸네 / 游泳入人漁
맛이 좋다고 예로부터 알려졌으니 / 美品傳來久
그 명성 참으로 헛된 게 아니로세 / 佳名得不虛
솥에 넣고 끓이면 은빛이 진동하고 / 小鼎銀輝動
쟁반에 얹으면 백설처럼 하얗다 / 高盤雪色舒
고량진미 먹는 이에게 먹이지 말라 / 莫餉膏粱客
먹고 남은 찌꺼기로 버릴 테니까 / 宜投飯糗餘
[출처] 숭어 | 작성자 샛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