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강용희
사랑하는 동생 명희야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전화가 편해지면서 우리는 편지라는 단어 조차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구나..
네 자식 진오가 아기를 낳았다고? 축하한다. 명희야. 손자를 많이 기다렸었지? 나도 은근히 기다려졌었는데! 진오가 효도했네. 순산했지? 딸인가? 아들인가? 아무렴 어때. 건강하게 잘 자라면 됐지.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고마우신 분이시다. 우리의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 할머니 적의 믿음과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진상이네 딸들은 얼마나 예쁘게들 많이 컷을까. 모두들 보고 싶고 궁금하구나.
네가 미국에서 산지 어언 30여년, 이번 4월 말이나 5월에 나온다던 계획은 어찌 되었어?
요사이 한국에 뉴스가 너무 살벌하지?
우리들도 맘은 못놔. 어떨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안감에 몸서리를 친다. 대동아 전쟁을 겪고 6.25를 겪은 우리는 전쟁의 공포를 지금도 떨칠 수가 없단다.
1950년 6.25가 나던 해 11월 11일 네가 5살 내가 17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는 내 무릎에 앉은 네 손을 잡으며 이 어린 것을 놓고 어찌 눈을 감을까? 하시며 숨을 몰아쉬셨지. 엄마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넌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나의 목을 끌어안았단다.
어머니는 임종을 지키는 우리 5남매를 바라보시며 형제들끼리 우애있게 살며 예수 잘 믿으란 유언의 말씀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멀고 먼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난 12월 26일 우리는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마차 하나 빌려서 아버님은 겨울만 나면 돌아올 수 있을거라며 쌀 4가마, 김장 1통, 고추장, 된장, 이불이며 필수품을 챙겨 어하도라는 섬을 향하여 무턱대고 떠났다.
배에서 만난 아버님의 지인을 통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모든 섬들이 피란민으로 포화상태라며 방을 얻을 수가 없을테니 헛고생 말고 당신네 네 식구가 방하나 빌려 지내는 처지라면 우선 우리 집에라도 같이 지내야지 어쩌겠냐며 안심을 시키신다.
하는 수없이 그 아저씨 말씀대로 염치 불구하고 그 방에 끼어 들었다. 그댁 식구 4식구, 우리 4식구, 8식구가 6자 방이나 될까 그런 적은 방에서 서로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지.
우린 어렵고 미안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어. 그런데 어느날 밤, 명희 네가 몸이 불편한지 잠을 못 자고 칭얼대는거야. 나는 얼른 들쳐업고 밖으로 나와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자장가를 불러주며 달래서 재웠다. 그날 밤은 그 시린 하늘에 유난히도 별이 총총하였단다.
얼마나 어머니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던지! 명희야 너는 나보다 더 슬펐었니? 우린 그렇게 그 밤을 지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하도 아이들인데 우리 학교로 전학 온 박광월하고 노정희라는 아이들이 찾아와 놀러가자기에 우리 명희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실컷 쏴다니며 사진도 찍고 놀고 들어왔었다. 그런데 그 밤에 네가 열이 나고 기침을 하고 심상치가 않았다. 안집 어른들이 보시더니 홍역이란다.
그 겨울은 유난히도 힘들게 홍역들을 앓았었지. 자고 나면 집집마다 어린이들이 죽어나갔어.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우리 영희는 잘도 참고 이겨내어 홍역을 무사히 치렀단다.
그로부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 끝에 전라도를 거쳐 인천에 와서 안착하였다.
네가 8살이 되니 학교엘 가야했다. 마침 큰 오빠가 김포에 양곡 무살리국민학교에 복직되어 나가게 되어 너를 당신이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가셨지.
너는 예쁘게 잘도 자라 못하는 게 없이 뭐든지 우수하였단다. 학과공부며 운동 예능 무엇하나 빠지지 않고 잘해서 큰 오빠가 늘 자랑스러워하셨지!
중학교까지 김포서 나오고 고등학교는 인천여고로 작은 오빠가 권해서 시험을 치루었는데 성적이 아주 좋았대.. 상위권에 합격하였다며 얼마나 대견해 하고 기뻐했었는 지 모른단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작은 오빠의 정성으로 무사히 마치고 바로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대학은 네 힘으로 마쳤지. 그러는 동안 난 너에게 해준 것이 너무도 없구나.
명희야 무심하고 무능한 이 언니를 우리 명희는 너무도 좋아했건만 우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아야 되니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그립구나.
그러나 지금은 다 옛이야기이고 요새는 많이 행복하지?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손녀들의 재롱 맘껏 즐기며 살고 있겠지. 생각할수록 너무너무 감사할 뿐이야. 이제 너의 부부 건강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제부턴 또 다른 새 인생을 시작하는거야. 언니는 80세 나이를 잊었나봐 아직은 마음이 청춘이다.
명희야, 너도 이제 노년을 한국에 나와 살아보지 않을래? 우리 땅 많이 있잖니?
농가주택 하나씩 지어놓고 감나무 대추나무, 우리 몸에 좋다는 블루베리, 뽕나무, 도라지, 부추 등 온갖 것을 가꾸며 우리 노후를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나는 요새 많은 꿈을 꾼다. 혼자 시골로 갈 엄두를 못내어서 그렇지 같이 할 사람만 있다면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그중에서 너의 부부와 같이 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꿈같지 않니? 생각만 해도 너무 좋구나.
거기다가 우리 닭도 키우고 삽살개도 키우고 여러 동물들도 키우자. 염소를 키워야 젖을 짜 먹겠다 그치?
그러면 미국에 있는 용택이도 따라 들어올 것이고 정복이, 정순이, 광수, 윤수, 우리 일가가 에덴동산을 이루는 거야. 너무너무 꿈 같지 않니?
그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멀리 한국에서 펜을 놓는다.
2013년 4월 21일
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