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은 부끄럽다고 했다
식민시대, 비교적 넉넉한 육첩방에 기거하고 있어서 부끄럽고,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이름으로 공부하고 있어서 부끄럽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시가 쉽게 쓰여져서, 이 와중에 시를 쓰겠다고 앉아 있어서, 시인은 부끄럽다고 했다(“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거라고 스승(정지용)의 입을 빌어 위로해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부끄러움이 쉬이 가시지는 않는다. 시 쓰는 마알간 청년의 부끄러움에 물든 나의 부끄러움도 그렇다. 지난 해 〈암살〉과 〈베테랑〉이 그랬듯, 2016년 한국영화는 여전히 미안하고(〈귀향〉), 화나고(〈검사외전〉〈내부자들〉), 이제는 부끄럽다(〈동주〉).
시와 산문, 예술과 혁명
1935년 북간도의 용정. 교회학교를 공산당 인민학교로 내어주느냐의 문제로 마을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송몽규(박정민)는 별 도움 안되는 신앙보다야 전세계 인민이 평등한 게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반면, 윤동주(강하늘)는 이국땅에서 이만큼 살아온 것이 신앙의 힘 아니겠냐고 되묻는다. 만주 북간도의 한인들이 모여 사는 명동촌에서 삼 개월 차로 태어나 일본의 감옥에서 한 달 차로 생을 마감한 두 사촌형제의 이야기는 이처럼 둘의 ‘다름’과 긴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신앙과 이념의 갈등은 곧 시와 산문의 갈등이 되었다. 시를 쓰는 윤동주는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해 아직 시인이 되지 못했지만, 산문을 쓰는 송몽규는 일찍이 신춘문예에 꽁트가 당선되는 행운을 얻는다.
몽규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시보다 산문이 유용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세상을 바꿀 힘이 없어서 문학으로 숨는 일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동주는 몽규에게 이념을 위해 가치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는 비겁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이제 문제는 시와 산문의 차원이 아니라 시와 혁명, 즉 예술과 혁명이다.
한동안 몽규가 앞서는 것처럼 보였다. 용정에서 동주가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필사하고 있을 때 몽규는 일찍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일본 유학시절에도 동주가 일본여성 쿠미(최희서)의 도움을 받아 첫 시집을 출간하려고 애쓰는 동안 몽규는 교토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규합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주가 릿교대를 그만두고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편입해 몽규 곁으로 오면서 둘의 관계는 서서히 변화를 맞는다. 시(동주)가 혁명(몽규)에게 요청한다. 이제는 너 하는 일에 나도 끼워 달라고. 비밀집회 중에 순사들이 잡으러 와 동지들이 모두 끌려가고 자신도 쫓기며 혁명이 위기에 몰렸을 때, 이번에는 혁명(몽규)이 창 아래서 시(동주)를 올려다보며 두렵고도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한다. 나의 동행이 되어달라고.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같은 얼굴
시와 혁명을 바라보는 영화 〈동주〉의 시각은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취조실 장면에서 비로소 분명해진다. 교토에서 며칠 간격으로 동주와 몽규가 체포된 이후, 후쿠오카의 형무소에 함께 갇혀 있으면서도 둘은 같은 공간에 다시 마주앉지 못했다. 그런데 압제자인 일본순사(김인우)는 어느 순간 그 둘을 한 자리에서 하나의 얼굴로 만난다. 그가 판결문에 서명하라고 동주를 다그치는 장면에서 동주의 얼굴은 몽규 얼굴로 오버랩되고 곧 둘이 번갈아가며 진술한다. 몽규는 독립운동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회한과 자책으로 서류에 서명했지만, 동주는 매번 앞장서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서명을 거부했다. 그 순간 순사의 눈에는 시도 혁명도, 모두 ‘저항’이고 스스로 선택한 희생이었다.
그런데 그 날, 무엇이 동주로 하여금 교토의 몽규를 찾아오게 했을까? 그것은 우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피해 자퇴하고, 연희전문에서 창씨개명과 조선어교육 철폐가 강행되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기독교학교였던 릿교대도 군국주의에 물들어 더 이상 징집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동주는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밀려온 부끄러움. 김응교 선생에 따르면 “쉽게 쓰여진 시”는 윤동주가 교토로 옮겨오기 전, 릿교대에서 쓴 마지막 시 다섯 편 중 하나였다(《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문학동네, 2016). 더 이상 도피할 상상적 공간마저도 찾을 수 없는 어느 부끄러운 날엔, 시가 혁명이 되고 혁명이 시를 찾는다.
이야기가 역사가 되다
그리하여 ‘시와 혁명’을 말하는 영화 〈동주〉를 나는 최근 한국영화와 역사기록에 관한 작은 알레고리로 읽는다. 좀처럼 영화가 ‘그냥 영화’일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과 분노의 시대이면서,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자는 외침이 곧 혁명인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고, 〈동주〉는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통해 증언한다.
〈동주〉가 저예산의 담백한 흑백영화인 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왕의 남자〉와 〈사도〉를 만든 천하의 이준익 감독 작품이니, 중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로케이션과 스타 파워를 동원하여 〈동주〉를 〈암살〉 이상의 스펙터클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테지만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윤동주의 일생이 한편의 시라면 서사시보다는 단아한 서정시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총총한 별이 있어 타향살이 까만 밤이 그래도 살 만한 것처럼, “별 헤는 밤”이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동안 이여진(신윤주)과 윤동주의 실루엣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건 전경의 어둠과 후경의 빛(가로등)이 흑백으로 찐하게 만나기 때문이다.
재현을 절제하고 밀실에서의 취조장면으로 독립운동의 주요정보를 전달한 〈동주〉의 서술방식은 한편 형별을 위한 일제의 판결문이 오히려 독립운동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던 일제강점기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내는 효과를 낳았다. ‘이야기’와 ‘역사’가 프랑스어에서는 같은 단어(histoire)이듯, 흑백영상으로 쓴 윤동주의 이야기는 그렇게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역사의 빈틈을 또 하나 메워주었다. 다만 한편의 시같고 오롯한 한 권의 시화집같은 영화의 아름다움을 기어코 산문으로 줄줄이 풀어쓰며 재미없게 만들어버린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최근 전직 고위공무원(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야당에 입당하면서 자신을 ‘손목 잘린 이병헌’과 동일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내부자들>의 깡패 안상구를 염두에 둔 발언임을 최소한 700만 명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부자들>에 이어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까지 순항중이어서 두 버전의 <내부자들>은 19금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바라보게 되었다. 감독 확장판을 초판 직후 개봉한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재개봉한 감독판이 2백만을 돌파한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이야말로 손목을 잘렸다고 생각하며 저마다 배신의 시대를 살고 있어서가 아닐까.
‘내부’를 향한 그들의 욕망
보수일간지 <조국일보>의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는 신정당의 유력 대선주자 장필우(이경영)를 여의도에 입성시키고 그에게 미래자동차 오현수 회장(김홍파)을 스폰서로 소개한 인물이다. 이강희의 측근이었던 건달 안상구(이병헌)가 미래차와 장필우의 비리관계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면서 장필우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가 위기를 맞는데, 이는 특수부 출신 검사 우장훈(조승우)이 안상구를 도운 결과였다. 안상구와 우장훈의 행위를 개인적인 복수라고 말하든지 사회 정의라 칭하든지, 그들을 움직이게 한 힘은 양심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배신에 대한 분노이고, 그들이 중심에서 배제된 존재들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안상구는 이강희를 ‘형님’으로 모셨으나 사업체를 여럿 거느린 대표님에서 졸지에 외팔이 삼류 건달로 전락했다. “개 주제에 주인의 밥을 넘보았기” 때문이다. 이강희가 미래차에 연루되어 있는 줄 모른 채 미래자동차 비자금 파일을 그에게 넘기면서 안상구는 이제 자신이 이강희의 써클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강희의 책상 맞은편에 서 있던 안상구는 곧 화면에서 밀려나고 유리창에 비친 그의 옆모습이 실물을 대신한다. 안상구는 반사 이미지로만 ‘내부’에 있을 수 있었고, 그것은 ‘허상’이라는 점에서 실제였다.
안상구보다는 형편이 나아보이는 우장훈도 성공의 문턱에서 매번 좌절을 경험했던 인물이다. 우장훈은 경찰 출신 검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유능했지만 경찰대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기를 쓰고 공부해서 검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족보’가 없어서, 실력과 충성도를 인정받고도 대검 중수부까지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에게 ‘정의’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기회를 얻는 것이면서, 중심부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이를테면 안상구와 우장훈은 각기 장강명 소설 《댓글부대》에 나오는 팀-알렙의 세 청년 같고 그들을 취재한 임상진 기자 같은 인물들이다.
절단된 손목, 빼앗긴 칼과 펜
흥행을 고려한 대중영화로서 <내부자들> 초판은 그들의 욕망에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을 빼앗긴 안상구는 칼 대신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보다 더 머리 좋고 사회적 이미지와 권력도 갖춘 검사와 힘을 모아 이강희로부터 ‘펜’을 빼앗고 장필우를 파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단, 안상구도 우장훈도 애초에 원했던 중심부 진출은 포기해야 했다. 영화 초판본이 강 건너 여의도를 바라보며 뼈있는 농담을 던지는 둘의 모습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당분간은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한 잔” 하며 마음을 추스르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거기서 안상구의 남은 왼손으로 다시 칼을 갈아 올지도.
대중의 지지를 확인한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은 그보다는 더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쪽을 택했다. 제목 그대로,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며 영화가 내놓은 결말은 여전히 건재한 이강희의 오른팔이다. 안상구가 의수로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겨우 클럽 화장실에서 손님들에게 ‘삥을 뜯는’ 일이었던 반면, 이강희는 감옥 속에서도 온갖 특권을 누리며 의수에 담배를 끼워물고 있다. 다른 쪽으로는 권력을 향한 줄(유선전화기)을 단단히 붙든 채 말이다. 그의 마지막 대사와 이미지는 현실에서 중요한 건 펜의 힘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낸 권력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상구야. 저들은 괴물이야. 물리고 뜯길수록 더 괴물이 되어가지”라고 말하던 이강희(‘언론’의 다른 이름)는 어쩌면 잘린 손목 덕에 드디어 ‘저들’과 같은 완벽한 괴물로 변태했다.
내부자의 자격: 반드시 “서로 구린 놈”일 것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의 결말이 보인 반전과 별개로, 정·경·관(정치·경제·관료)의 유착과 언론의 타락을 폭로하는 요사이 한국영화들 틈에서도 <내부자들>에 고유했던 충격과 좌절은 내겐 뜻밖의 장면에서 찾아왔다. <제보자>(2014)는 양심선언을 하는 한 사람의 ‘제보자’로 족했지만, <내부자들>은 내부자‘들’이어야 했다. 오현수 미래차 회장은 장필우를 갈아치우고 다른 의원을 대선후보로 밀자는 이강희의 제안에 반대하며 말한다. “서로 구린 놈끼리 가야 하는 거야.” 우장훈 또한 그들에게 자신의 비열함을 증명하고서야 저들의 패거리에 낄 수 있었다.
오현수 회장의 위 대사와 별장 성접대 장면은 그리하여 여성에게 유독 높은 ‘유리천장’과 ‘밀실정치’ 같은 현실의 개념어들을 단번에 깨우치게 만드는 열쇠가 된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구릴 수 없다면, 더 적나라하게는 그들과 함께 발가벗고 일어서서 술잔을 넘어뜨릴 수 없거나 그 자리를 견딜 수 없거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불편함을 야기하므로 실력 또는 ‘노오력’과 상관없이 초대받을 수조차도 없다면, 내부자가 되어 정의를 논할 기회조차도 박탈당하는 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두 버전의 <내부자들>‘들’은 감히 사람노릇하려는 짐승들은 물론 괴물들을 불편하게 하는 ‘정상인’도 제거 혹은 배제의 대상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폭로하되, 대상 이미지의 부재를 통해서 이미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하면, 과연 조응천 정도는 돼야 ‘나 손목 잘렸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려 여성 예비정치인들이 모인 공식석상에서 “여자는 똑똑한 척하면 밉상이다, 조금 모자라 보여야 한다”고 했다던 김을동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발언이 심지어 경험에서 나온 고언(苦言)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