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 사띠가 젤 안되는게 분노(dosa)예요. 정말 분노가 순식간에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그 분노의 內面을 보았는데 그 내면에는 아주 자존감 낮은(Low) 제가 있더라구요. 제법무아, 제행무상 등 이런 건 글로는 알겠는데, 이 자존감 낮은 제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그것이 세세생생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겠는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분노를 사띠가 잡아주질 못한다는 거여요. 아, 물론 뭐 그 또한 사띠의 힘으로 가야된다는 것도 알겠지만, 사띠로 잡을 수 없는 것이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잡아볼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스님) 그러니까 더 봐야만 됩니다. 아직도 苦(dukkha)의 맛을 덜 본 겁니다. dukkha에 대해 더 많이많이 봐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까 (사띠로) 잡을 수 없다고 그랬잖습니까? 잡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잡아서 볼 수 있는 게 이 수행법입니다. 그게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 것 같으면 잡아서 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사야도께서는 <아는 마음을 알 것 같으면 대상은 함께 들어 있다. 보는 마음을 볼 것 같으면 아는 마음이 같이 들어 있다. 보는 마음을 잡을 수 있으면 가장 좋은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아는 마음을 알 것 같으면 그 분노를 꽉 잡아서 볼 수 있습니다. 가둬놓고 볼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대상들이 그 안에 가두어져 있게 될 것 같으면 사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지켜볼 수가 있습니다. 아직 이러한 이치(원리)를 모를 뿐입니다.
수행자) 가둬놓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스님) 잡아서 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까 다른 수행자의 인터뷰 법문을 해줄 때, 낚시로 잡아 올린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를 어디에 담아둔다고 했죠? 자그마한 어망(그물망)안에 집어넣는다고 했습니다. 그 어망이 마치 ‘아는 마음’ 같은 거라고..
물고기들은 어망 안에 가두어지게 되잖습니까? 아는 마음 안에 집어넣어 잡아서 보는 것이 됩니다. 그때 이미 벌써 그 안에 담겨있는 물고기는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이치)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 못보니까 우선 그냥 놔두고..
그렇게 잡아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는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수행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 사실들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머리나 책으로 공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풀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머리에서부터 가슴으로 내려와서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스님)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원래 가슴이 시원한 건데?
수행자) 그러니까요.
스님) 원래 사띠는 대상을 아는 마음 안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너무 시원합니다. 스님은 날마다 그걸 보고 있는데요? 마치 막힌 하수구가 시원하게 쏴~악 뚫리는 것처럼 그렇게 내려가는 걸 매일 같이 봅니다.
까마귀 소리 한번 알 때마다 그렇게 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게 보입니다. 그렇게 잘 보이는데 그걸 왜 못봅니까? 사띠가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사띠가 없으면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 저승사자한테 잡혀 먹히는 거지.
그리고 아까 (질) 낮은 자존감이 ‘나’라고 했죠? 그럼 (질) 높은 자존감은 뭐죠? 질 높은 자존감이든, 낮은 자존감이든 그게 왜 필요하죠? 정말로 필요한 건가요? 우선 그것부터 자신에게 스스로 한번 물어봐 보십시오.
분노를 보니까 이런 질 낮은 ‘나’라는 자존감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것이 올라오거나 보일 때 “이게 진짜 필요한가?” 스스로 물어보면서 고찰해 보십시오.
그게 필요합니까? 정말로? 법의 세계에서는 그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법계가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이게 지금 필요한가? 물어봐 보십시오. 필요했기 때문에, 필요로 해서 그걸 갖다가 써먹기 때문에 분노가 더 생기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겁니다.
수행자) 그럼 왜 필요로 하는가요?
스님) 지금 왜 필요한가 묻는 것 자체가 또한 자존감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나’라는 것이 그걸 필요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떨어트려놓고, 떨어져서, 거리(분리)를 두고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필요한가?” 되물어주는 것이 떨어트리고 거리를 두고 보는 일입니다. 떨어졌다 하면 벌써 이미 사띠의 대상이거나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수행을 해왔는지 모르겠으나 떨어져서 보고, 지켜보는 수행을 해야만이 뭐가 일어나든지 다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몰입 집중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서 대상으로 볼 수도 알지도 못합니다. 잡아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런 자존감, '나'라고 하는 것들이 계속 괴롭힐 겁니다. 자존감이라는 것도 실은 그저 ‘마음’이지 않든가요? 그런데 그것이 ‘나’라는 행세(유아견)를 하는 겁니다. ‘나’가 있을 것 같으면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가 없으면(자아상실) 죽는 줄 압니다. ‘나’가 없으면 더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낄텐데 말이죠.
그래서 수행도 하면서 이런 법문을 많이 들어 둬야 됩니다. 물론 직접 알아차림으로서 체험을 하게 되면 더욱더 좋겠지만 법문이라도 많이 들어둬야 됩니다. 이렇게 들어두는 것이 聞/思慧죠. 문사수가 어디 따로 있는게 아니라 수행 인터뷰(점검) 때 들어 들었던 것을 실제 프랙티스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걸 聞/思/修慧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죠?
분노가 일어나든지, 자존감이 일어나든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되물어 주십시오. 지금 이게 필요한가? 그리고 나서 그런 대상들의 꼬리가 어떤지도 한번 봐보십시오. 어떻게 되는지, 아직 남아 있는지, 사라졌는지. 그 힘이 약해졌는지, 더 거세지는지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알아차림이나 보는 힘을 길러내지? 되물어주면서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를 보다 더 충실하게 피드백 해주면 됩니다. 달리 힘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진행시키면 될 뿐입니다.
알아차림의 가속도를 좀 빼 주어야 노팅이 순조롭고, 순일하고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잡아볼 수 있는 힘을 길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3.13 17:39
첫댓글 도사에서 괴로우니 사띠한다는 것에서도,
그 사띠의 용도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면 더욱 좋습니다.~^^*
가르침에 두손모읍니다
사두ㅡ사두ㅡ사두
_()_
법문을 언제 글로 다 옮겼는지요. 아난다 존자라도 현신했는지요. 사두 사두 사두
ㅎㅎㅎ~ 글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