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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6 - 흉노족이 진(晉) 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5호 16국 시대 혼란이 이어지다!
오호 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 301년 ~ 439년)는 삼국시대 이후 한족(漢族)들이 건국한
서진(西晉)이 흉노족등 북방 이민족의 침략과 정복에 쇠퇴하기 시작한후, 다섯 이민족
을 비롯한 16개 국가가 회수(淮水) 일대와 화북을 정복하여 여러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하는데... 가장 먼저 건국한 나라는 301년 전량(前涼: 301 ~ 379) 입니다.
하지만 보통은 흉노족 유연이 304년 한(漢) 나라를 건국한때 부터 선비족 탁발씨 북위(北魏: 386 ~ 534)
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 까지를 가리키는데, 이민족들이 중국으로 대이동하며 한족(漢族) 국가들을
정복해서 여러 국가가 난립하였으니 5호(五胡)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등 북방과
동북방에 사는 다섯 이민족들을 가리키데 갈(羯) 족은 흉노의 일파로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갈족의 석륵(石勒) 이 후조(後趙)를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에서 탁발부(拓跋部), 모용부(慕容部),
독발부, 걸복부가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이민족의
구체적 수를 헤아리는데 별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수 있는데.... 5라는 숫자는 오행설(五行說)
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 ” 이란 말로 해석될 것입니다.
16국이란 말은 북위(北魏) 말엽의 사관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게 사실이니, 위진 남북조 시대
(220~589) 를 구분하면 위진 시대는 220년 ~ 420년 이고 남북조 시대는 439년 ~ 589년 입니다.
오호십육국 시대는 화북을 차지한 이민족 왕조들이 관중과 관동을 차지한 두 패권국의 동서(東西) 대치
상태로 이어지곤 했으니 초기(320년대)에는 흉노족의 전조와 갈족의 후조가 대립했고, 이후(350~
360년대)에는 저족의 전진과 모용선비족의 전연이 대립했으며, 그 다음(380~ 390년대)에는 강족의
후진과 모용선비족 후연이 대립했고 마지막으로 모용선비족의 후연과 탁발선비족의 북위가 대립합니다.
동진(東晉) 또한 수차례 북벌을 시도해 전과를 올렸으니 환온은 성한을 정벌하여 촉한 을 수중에 넣었고
고토회복의 야망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원정으로 화북의 이민족 왕조들을 위협하였고 동진의 불세출
의 명장 유유(劉裕)는 모용선비족의 남연, 강족의 후진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고도였던 장안과 낙양
을 잠시 회복하였을뿐 아니라 이 공로를 바탕으로 동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유송(劉宋) 왕조를 세웁니다.
서진(西晉) 말기에 8명의 진씨 황족에 속하는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인 내란
을 팔왕의 난이라 부르니... 팔왕의 난은 306년에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서진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흉노족 등 북방의 이민족들이 서진으로 대이동을 하면서 중국을 유린하기 시작 합니다.
이때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서진의 쇠퇴를 호기로 삼아 304년 병주(并州 산서성) 를 정복해 한(漢 :
옛날 한나라 공주가 흉노에게 시집 왔으므로?) 나라를 세웠으며 같은해 사천(四川)에서도 이웅
이 자립하여 성한을 건국하였으며 그 3년전인 301년에는 감숙(甘肅) 지방에서도 서진의 양주
자사였던 한족 장궤가 독립적인 정권 전량을 세웠으나 흉노 석륵의 조나라에 굴복해 멸망 합니다.
선비족 탁발부도 중국을 칩입하여 대(代)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이로써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
되었는데... 이 시대에는 이민족들이 화북의 한족(漢族)을 대량으로 학살하였으니 화북에
한족 인구는 대략 80% 가 학살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후 학살을 피해 한족들은 화남으로
도망치거나 또는 저항을 멈추고 굴복하여 이민족 왕조를 섬겨 등용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흉노족 유연(劉淵) 은 갈족 출신의 석륵을 시켜 병주(산서성) 일대를 공략하고 308년 황제
를 칭했으나 310년에 죽고 아들 유화가 이를 계승하였지만....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 유총이 제위를 찬탈했는데, 유총은 311년에 서진의 수도 낙양을 유린하고
한족들을 학살한후 서진의 황제 회제를 붙잡았으니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그후 진(晉)나라는 장안에서 민제가 옹립되었으나 316년에 한나라(흉노) 유총에게 패하여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으며..... 이에 서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가 장감 남쪽의 건업
(남경)으로 도주해 진나라를 재흥시키니 이 나라를 동진(東晋)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후한이 붕괴하고 위, 촉, 오 삼국의 대립에 이어 흉노족에 의해 서진(西晉) 의 붕괴로
이어지는 연이은 혼란은 낙랑군과 대방군에 의해 통치되던 한반도 서북 지역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을 극도로 약화시켰는데.... 그 이전에도 고구려가 이 지역을
틈틈이 공격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몰락했던 때가 바로 오호 십육국시대 였습니다.
중국 왕조에서 태수를 임명해서 보내던 낙랑군은 중국(서진)이 8왕의 난 내란으로 쑥대밭이
되고 304년에 진(晉)나라가 흉노족에게 멸망하자 중국과 연결이 끊어져 끈 떨어진 연
신세로... 태수 조차 임명되지 못하니 고립되고 중국과 무역통로 마저 닫히니 외로운
처지가 되어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요동에서 온 군벌 장통(張統)의 지배를 받습니다.
중국과 단절된 낙랑군은 더 이어갈수 없는 상태에서 314년 10월 고구려 을불리(미천왕) 왕은 낙랑을
침범해 남녀 2천인을 사로잡아 가니 낙랑군이 망하는데, 자치통감에 왕준은 민호 1천여호(5천명)를
이끌고 요동의 선비족 모용씨(摹容氏) 에게 투항하니 모용외는 요서에 낙랑군을 설치해 장통을 태수
로, 왕준을 참군사로 임명하니 전연과 후연을 거쳐 북연까지 낙랑은 요서에서 100여년간 존속 합니다.
진서 지리지에 보면 서기 280년에 낙랑 인구는 3,700호 1만 5천이라고 했는데 30여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며 낙랑군의 전성기인 서기 2년에 인구 40만에 비하면 고구려 공격 이전에 인구가 50분지 1로 줄어든
것인데(50분지 1 ?) 요서에 설치된 낙랑군은 5세기 중엽 북위의 문성문명황후 풍시의 친정어머니는 낙랑
왕씨 이고 왕정과 왕가의 묘비에는 낙랑인 글귀가 보이니 낙랑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낙랑군과 낙랑국은 같은 나라 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나라 일까요? 평양지역
(?) 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게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서기37)조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 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낙랑을 멸망 시켰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同書(동서)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7)조에는“고구려의 왕 撫恤(무휼)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 나라(낙랑국) 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 하였으니 구구려 대무신왕
이 멸망시킨 낙랑은 신라와 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의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後漢)의 光武帝(광무제) 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 청천강) 이남은 동한(東漢)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37년에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멸망시켰는데, 313년 10월에 미천왕
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니 같은 나라가 2번 망하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낙랑국
이 망하고 불과 7년 후인 44년에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을 공격해 빼앗아
다시 낙랑군을 설치한 것으로 기록했지만... 저 두 나라가 다른 나라라면 간단하게
설명이 되니 최리의 낙랑국은 신라와 가까운 함경남도 영흥 지방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산해경의 “海內北經(해내북경)” 에는 “朝鮮(조선)은 列陽(열양) 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하며 열양은 燕國(연국)에 속한다 ” 고 하였고 同書(동서) “海內經(해내경)”
에는“ 東海(동해) 의 안, 北海(북해) 의 귀퉁이에 명칭을 朝鮮(조선) 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
윤내현 교수등 2번째 설은 낙랑군은 고조선과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의 옛 터인 요서지방에 있었고
낙랑군과 연계된 평양의 낙랑국이 망하자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한 광무제가 군대
를 보내 평양을 점령하고 낙랑군을 세웠으며 훗날 남부 지역을 떼어내어 대방군(황해도)을 설치
했다는 것이며 기존의 요서 낙랑군은 신(新)나라 왕망 때 이름이 낙선군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4년 고구려의 한 군현 침공 당시 백제가 대방을 돕는 과정에서 양국은 처음으로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게 되는데 낙랑과 대방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였으니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소수림왕은 저족이 장안에 세운 전진(前秦)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를 불교와 같이 통치이념으로 삼아 국력을 기릅니다.
흉노족 유총 사후에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요가 승리하여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한(漢)에서 조
(趙)로 고쳤는데... 그러나 하북 정벌에 나섰던 석륵이 자립하여 하북·하남·산동을 장악
하여 낙양을 경계로 유요 정권과 화북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었는데, 석륵 또한 국호를
조(趙)라고 하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유요 정권은 전조, 석륵 정권은 후조라고 부릅니다.
328년 유요가 낙양을 탈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대패하여 포로가 된
뒤 살해당하니 전조는 국력이 쇠퇴하여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화북 대부분을 정복한
흉노족(갈족) 후조에서는 333년에 석륵이 죽고 석홍이 즉위했으나 석호가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으니 석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석호는 수도를 베이징에 가까운 업(鄴)으로 옮겼으니 이때 후조의 최전성기였는데
349년에 갈족 석호가 죽자 석륵의 양자 석민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했으니,
갈족 석민은 이후 본래 성인 염씨(冉氏)로 돌아가 염위를 세웠고 (염위는
단명한 왕조라 16국에는 들어가지 못함) 염위는 한족(漢族)들을 대거 학살합니다.
요서(遼西)에 근거지를 둔 선비(鮮卑)족 모용(慕容)씨의 시조 모용외가 333년에 죽으니
3남 모용황은 형제들과의 내란에서 승리한후 337년에 동진에서 주는 벼슬과 비단을
거부하고 황제(前燕)를 칭한후 화북의 강자 후조 및 화남의 강자 동진(東晋) 과
전쟁을 하면서 같은 선비족인 단부와 우문부에 멀리 부여를 공격해 거의 멸망시킵니다.
후조, 동진, 단부 및 우문부에 부여등 이웃한 다섯 나라와 전쟁하면서 모용황의 전연(前燕)이
강성해져서 339년 모용황의 군사가 신성에 이르자, 고국원왕은 두려우니 전연과 싸우는
대신에 맹약을 요청하고는 다음해인 340년에 세자를 연나라에 보내 조회(朝會)하였는
데.... 저런 보람도 없이 전연은 342년에 55,000명의 대군을 조직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옵니다.
이 침공의 의도는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이 전연 황제 모용황에게 올린 발언에서 잘 알수
있는데.... 모용선비는 고구려와 우문선비를 먼저 멸망시켜야 장차 중원(후조 및 동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니, 훗날 후금이 일단 조선 부터 정리(정유재란과 병자호란) 하고서야
중원(명나라) 에 집중한 것 처럼 전연(前燕) 입장에서는 후방의 고구려가 거슬렸던 것 입니다.
342년 당시 전연(前燕)에서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의 평탄한 길과 남쪽의 험한 길, 둘이 있었는데
모용한은 “적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길 것이니 왕은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때에 나아가면 환도(丸都, 국내성)는 족히 취할수
있으며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 몸체가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고국원왕은 모용한의 예상대로 아우 고무의 정예병 50,000명을 북쪽에 그리고 약한
병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도록 하였으니, 모용황은 허를 제대로 찔러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주력 부대 40,000명을 남쪽, 그리고 왕우등 15,000명을 북쪽으로
보내 양동 작전을 펴서 좌장사 한수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
를 베니 고구려군이 무느지는지라 추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고국원왕은 말 한필을 몰고 도망가서는 단웅곡(斷熊谷) 으로 들어갔으며 연나라
장군 모용여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가는데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으니, 모용황은 도주한 고국원왕
을 끝까지 쫓지는 못하고 사신을 보내서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때 한수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은 지킬수 없습니다. 지금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다시 모여들어 무리를 모아 근심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 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는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명을 사로잡으며 궁실에 불을 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갔는데 꼭 100년 전인 242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하자 동천왕이 도주하는지라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해서 옥저땅에 이르렀지만
이번에 모용황은 단신으로 도망쳐버린 고국원왕을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은 것 입니다.
모용황은 왕후 주씨와 왕비를 비롯한 고구려 수도 백성의 거의 전부라고 할수 있는 5만
명의 포로를 잡아 전연으로 끌고가니, 약탈한 물자를 수레에 싣고 포로들을 걸리고
돌아가는지라 그 발걸음이 엄청 느린데도 불구하고 결국 고구려군은 추격하지
못했는데.... 그럼 북쪽 통로에 고구려군이 국내성으로 돌아온게 너무 눚었던 것일까요?
귀환이 늦었던 이유는 적의 병력수를 정확하게 몰랐을 수도 있고, 만약에 적군이 1만
5천 소수라는걸 알았다면 고구려의 예상이 빚나간 것이니 즉각 기마부대 라도
국내성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북쪽을 막으라는 왕명에만
충실했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적군 외에 속임수로 숨어있는 적군이 측면이나 배후
를 습격해 올 수 있다고 여겨 적정을 파악하느라 전투가 너무 길어진 때문으로 봅니다?
수도 환도성(국내성) 이 2번이나 함락되어 불타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노비로 끌려
갔으니 동천왕 이후 최대의 치욕이었는데, 모용선비는 중원을 도모해야 하는데다가
"인구와 병사가 매우 적다" 보니 고구려에 병력을 주둔시킬 여유가 없었으니.....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기 보다는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신하국으로 삼아 후환
을 없애려고 했던 정책에 따라 수도 환도산성과 국내성은 철저하게 파괴 당했습니다.
고국원왕은 2개월 후인 343년 2월에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점을 바치는등 눈물겨운 노력으로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나 어머니는
인질로 남았는데.... 7월에 수도를 평양 동황성 (東黃城 서경 동쪽 목멱산) 으로 옮겨서 거처합니다.
345년 10월에 연나라는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성(南蘇城)을 함락
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는데 심기를 거스릴 수가 없으니 탈환 시도
조차 하지 않았는데.... 전연은 남소성을 공격해 고구려가 어떻게 나오는지
간을 본 것으로..... 고구려는 구원병 조차 보내지 않고 공손하게(?) 대처한 것입니다.
수도 함락 13년 후인 355년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니, 연나라 왕 모용준이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 (營州刺史) 로 삼고 낙랑공(樂浪公) 으로 봉하고는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합니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가 전연이 전진에 망하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아들이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는데, 이 왕자가 세자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 차남 고국양왕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연은 고구려의 성을 침공하는등 이후에도 고구려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나 전진(前秦) 의 공격
으로 손발이 묶이자, 한숨을 돌린 고국원왕은 369년 9월에 군사 2만명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침략해 치양(雉壤)에서 싸웠으나 근구수왕자에게 패했으며... 다음해인 370년에 선비족 모용
씨의 전연(前燕) 은 장안에 세워진 저족 부견의 전진(前秦)의 장군 왕맹(王猛) 에게 멸망합니다.
멸망한 전연의 황족인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망명해 오자 고국원왕은 그대로 묶어 전진(前秦)에
갖다 바치며 수십년 묵은 복수를 조금이나마 하게 되는데, 다음해인 371년 10월에 백제 근초고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오자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니 훗날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 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매었다.” 고 하였으나 이는 과장이며
소수림왕은 전진(前秦)에서 불교등 선진문화를 도입하는데 예로부터 “외교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이라!
《삼국사기》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모두루 묘지명> 에는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정확하게는 14행에 반역이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15행에 염모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염모라는 인물이 반역을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보건데..... 외부의 침입과 더불어 고구려 내부의 혼란도 가속화 된 듯 보여 집니다.
자세한 사료가 없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고국원왕의 부왕인 미천왕이 봉상왕을
몰아낸 쿠데타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었던지, 이때까지도 미천왕의 혈통인 고국원왕
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고구려에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보입니다.
모용선비의 연(燕) 나라 계열 국가들은 오호십육국 초기 타 이민족 보다 한족(漢族)의 문화
를 깊게 받아들인 나라였고, 이 힘을 바탕으로 화북의 패권을 쥘 수 있었으니... 연나라
에 참패함으로써 중국문명의 선진성을 깨달은 고구려는 불교, 율령, 유교 등 중국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녀.... 동북아 각국은 선진 중화문명 수용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342년 고구려를 침공했던 전연(前燕)은 349년 이후 후조(後曹) 멸망의 혼란을 틈타 중국본토
에 진출하여 한족(漢族)들을 정복하였으니 352년에는 후조를 이은 염위를 멸망시켰는
데.... 같은 시기인 351년에 섬서(陝西) 지방 장안에서 저족의 부건이 전진(前秦)을 건국합니다.
화북이 혼란해지자 강남에 재건된 동진(東晋)의 환온은 347년 성한을 멸망시켜 촉(蜀 사천)
지역을 장악하고 북벌을 감행해 전진(前秦)을 공격했으나 패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저족 전진(前秦)의 국력이 증가하니 360년에 화북을 선비족 전연과 동서로 양분하였습니다.
저족인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은 동쪽으로 진격해 370년에 선비족의 전연을 멸망시키고 모용수
등을 흡수해 화북 지방을 통일한후... 10여년이 지난 383년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자칭 100만
이라 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비수(淝水) 에 주둔하니 그 위세가 강동 일대에 진동합니다.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은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 이 되어 동생 사석(謝石), 조카 사현(謝玄)
과 함께 강력하게 방어 작전을 지휘하는데, 사현(謝玄)은 전진(前秦)군이 강에서 물러
서면 상륙할테니 그때 결전을 겨루자니 전진의 부견이 이를 수락해 군대를 물리자 ....
간자들이 전진이 패했다고 소리치니 뒤로 물러서던 전진군은 혼란에 빠져 진짜 도주합니다.
해서 동진(東晋)군이 대승을 하는데 사안은 동생 사석에게 북정(北征)을 지시하니 낙양
(洛陽)과 청주, 연주를 수복했고 사안(謝安)은 양주(揚州)와 형주(荊州)등 15주(州)
군사(軍事) 를 맡았는데... 이를 시기한 왕족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
道子)에게 배척을 당해 외직으로 나가 광릉(廣陵)을 지키다가 병사(病死) 했습니다.
이 비수대전 (淝水大戰)에서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대패해 도주하니 화북일대에서는 저족
의 전진에 속했던 여러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자립해 나라들을 세우는데... 병주에는
대(代 ; 북위(北魏))와 서연이 세워졌으며, 섬서에는 후진과 서진이 생겼고 감숙에는 후량
이 건국되었으며 하북·하남·산동 일대에는 386년에 선비족 모용수의 후연(後燕) 이 건국됩니다.
이들 여러나라 가운데 선비족 모용수의 후연(後燕) 과 강족 요장의 후진(後秦)이 가장
강력했으니... 선비족 모용씨 후연(後燕)은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진은 전진을 멸망
시켜 영토를 확대하였고, 다시 화북을 동서로 양분하였으나 탁발부의 북위와
흉노의 혁련발발이 건국한 하(夏) 나라가 주변 여러나라들을 누르고 강대해 집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은 342년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두번째로 점령된후 선왕의
시신과 왕모 및 왕비가 생포되어 갔는지라 고국원왕은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해
조공하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됐으며 백제와 싸우다가 평양성
에서 전사한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불교등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며 내실을 다집니다.
화북을 통일한 전진이 383년에 동진을 치러 남하했다가 비수대전에서 패해 멸망하니 화북은
서쪽에 북위와 동쪽에 386년에 선비족 모용수가 건국한 후연(後燕)이 대립하는데 395년에
북위의 탁발규가 후연의 변경을 침입하자 5월에 모용수는 모용보와 모용린 등에게 8만 병력
으로 북위를 공격하게 했으며 후발대로 모용덕이 이끄는 보병, 기병 1만 8천명을 더 보냅니다.
9월에 북위의 탁발규가 황하까지 전진하자 모용보가 군사를 정렬시켜 강을 건너려 했다가
폭풍으로 배 수십척이 남쪽 강변에 표류했는데, 북위에서는 갑병 3천여명을 붙잡았다가
석방했으며... 모용보가 중산으로 출발할 무렵에 모용수는 병에 걸렸는데 탁발규는
그 정보를 알아내 붙잡은 사자를 황하에 보내 네 아버지(모용수)가 이미 죽었다면
어찌 돌아가지 않느냐고 말하니 태자 모용요보가 두려워 하고 후연의 병사들도 동요합니다.
탁발규는 탁발건에게 기병 5만을 주어 황하의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탁발준에게 7만을 주어
후연의 군사를 남쪽으로 막게 했는데... 근안이 모용보에게 철수할 것을 권했지만 모용보는
이를 무시하면서 수십일을 대치했으며 이 와중에 모여숭이 모용수가 죽었다고 생각해
반란을 일으켜 모용린을 주군으로 받들려 했다가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일로 모용보와 모용린은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10월 2일에 배를 불태우고 달아났는데
모용보는 당시 황하에 얼음이 아직 얼지 않았기 때문에 북위의 군사가 건너오지
못한다고 생각해 척후병을 두지 않았는데..... 11월 3일에 폭풍이 불어 갑자기 얼음이
합쳐지자 탁발규가 치중은 남겨놓고 정예 기병 2만명을 선발해 황하를 건너 급히 추격합니다.
후연군이 참합피에 도착하니 지담맹이 군사를 보내 북위 군사를 막아야 한다고 했지만 모용보
는 화내면서 거절했는데, 모용덕도 지담맹의 말을 따를 것을 권유해 모용보가 모용린에게
기병 3만명을 거느려 후방에 주둔시켜 비상 사태에 대비하게 했으나 모용린은 기병을
풀어놓고 사냥을 하는등 북위군의 공격을 대비하지 않았으며 모용보가 기병을
파견해 북위의 군사를 염탐하게 했지만 기병은 10여리 간 다음에 안장을 풀고 잠들었습니다.
북위의 군사가 새벽부터 밤까지 두배 빠르게 행군해 9일 해질 무렵에 참합피의 서쪽에 도착
했으며 후연은 참합피 동쪽에 있는 반양산 남쪽의 강변에 군영을 설치했는데 탁발규가
밤에 군사을 분산시켜 병사들은 하무(衔木)를 물고 말에게는 재갈을 물리게 하고 몰래 나아
갔으며 10일에 해가 뜨자 북위 군사는 산 위에 올라가 아래에 있는 후연의 군영에 닿았습니다.
북위 군사들이 공격하자 후연의 군사들은 달아나다가 말에 밟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만명이 되었으며, 탁발준이 병사를 이끌고 후연 병사 4, 5만 명을 사로잡으니 후연 군사는
수천명만 살아남고 모용보는 홀로 말을타고 달아났으며 모용소가 전사하고 모용왜노, 모용도성,
모용윤국등 많은 관리와 장군이 붙잡히고 무기, 갑옷, 식량, 물품을 뺏고 포로를 파묻어 죽입니다.
후연군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중산으로 돌아가며 북위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정동장군
평규를 시켜 기주에서 군사를 징발하려다가 오히려 평규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해야
했으니... 이에 후연의 군주 모용수는 병든 몸인데도 북위로 쳐들어가 초전에 승리하지만
참합피에서 수많은 후연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죽은 이들을 위해 제사
를 지냈는데 군사들이 통곡했고 모용수는 심히 부끄럽고 분해서 피를 토한 후에 사망합니다.
396년 4월에 모용보가 즉위하자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으니 후연군은 농성하며 맞섰으나 모반사건
이 일어났고 더 이상 수도 중산을 유지할수 없었던 모용보는 북쪽인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버려진 중산에서는 모용상(慕容詳)이 황제를 자칭하였으나 곧 북위에 함락되었으며
업을 지키던 모용덕(慕容德)은 398년에 황하 남쪽의 활대(滑臺)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합니다.
한편 용성의 모용보는 398년에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진격하던 도중 군대 내부에서 모반이 일어나
쫓겨났으며 각지를 떠돌다가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蘭汗)에게 살해되니 난한은 창려왕(昌黎王)
을 자칭하며 후연을 다스렸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 3대 군주가 되었는데 종친과 공신들을 숙청하니 여러차례 모반 사건이 일어났으나 진압합니다.
391년(392년?) 5월 고구려왕이 된 광개토대왕은 선왕들이 비축한 국력을 바탕으로 7월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백제 석현성등 10여개 성을 빼았고 10월 바다로 감싸인 관미성을
함락시켰는데, 조선의 유학자 중에는 3년상을 치르며 근신해야 함에도 군사를 일으켰으니
불효라고 말하는데.... 즉위 불과 2개월만에 침략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백제인들을
수없이 죽이고는 여자들은 과부로 자식들은 고아로 만들었다는 것이니 침략자에 전쟁광이라?
하지만 침략당해 징징대는 것 보다는 침략자가 되어 적국 여자들을 취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잡아오는게 자랑스러운 것이라 여겨지는데.... 아들 장수왕은 3년상을 지킨 것 같으니
元年 遣長史高翼入 晉奉表獻赭白馬. 安帝封王高句麗王樂浪郡公. 진(晉) 나라에 표(表)
를 올리고, 붉은무늬가 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장수왕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 으로 봉하였다. 十三年 遣使如魏貢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징기스칸은 “사내로 태어나 가장 기쁜 순간은 이웃나라를 침략해 항복을 받은후 적장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을 가슴에 품은후 치를 떠는 적장을 보는 것이다” 라고 했으니 전쟁의
속성을 잘 표현했는 데.... 선한 전쟁, 정의로운 전쟁이란 없으며 모두가 다 침략전쟁
이고 그 전쟁의 승자가 인류의 역사를 써 왔으며, 패한 나라의 백성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다음해인 393년과 394년에 반격해온 백제의 침공을 격퇴하고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명을 생포했으며, 396년에 다시 백제를 침략해서는 한강
이북의 58개성, 700여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에 진출해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 라는 서약을 받고는 왕의 아우와 대신등 인질을 잡아 개선합니다.
395년(392년?) 9월에는 염수(鹽水)로 진출하여 거란족 8개 부족 중에 하나인 패려(稗麗 비려)를 공격해
3부락과 600~700영을 파괴하고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여명의 백성
들을 되찾고 많은 소, 말, 양떼들을 노획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은 396년 후연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에 책봉되는데 대무신왕, 동천왕, 고국원왕과 소수림왕 책봉 전례를 따른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 서기 392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391년이라고 되어있는데 역사 기록은 당대에 쓴 것이 정확하므로 광개토왕의
즉위 연대가 391년으로 정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은 즉위년은 전대 부왕의 해로 여긴 듯?)
392년(391년?) 광개토대왕의 침략에 대해 백제는 왜(倭)에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내 왜와 동맹을 맺으니
왜군이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하는데, 백제의 후원을 받는 왜군이 김해 금관가야와 안라가야군과
합세해 399년에 신라 수도 서라벌을 포위하자 광개토대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대군을 파견하여
포위망을 풀고 금관가야 종발성(김해) 까지 추격하니 김해 가야는 왜군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구원하고는 402년에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고구려에 인질로
왔던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하니 고구려군은 이후 백여년간 신라 땅에 머물며 영향력
을 행사하니 신라는 속국이 되는데... 2005년 KBS는 역사스페셜에서 문무왕릉비문을
소개하면서 내물과 실성등 김알지의 후손들인 경주 김씨들이 흉노족 이라고 밝혔습니다.
저 문무왕릉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설명이 나오니..... 화관지후의 창성한
터전을 세운 투후(秺候)의 후손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7대를 내려오니
15대조 성한왕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신령스런 산악에서 탄생했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문무왕의 9대손 흥덕왕릉비에도 성한왕의 24세손 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에는 김알지의 아들이 세한(삼국유사는 열한)으로 나오며 투후(秺候)
란 한무제에게서 최초로 김씨 성을 하사받은....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 를 말합니다.
404년에는 백제의 길안내로 서해를 북상해 대방(帶方 황해도) 으로 쳐들어와 (석성을 공격한) 왜군을
대왕이 직접 출병해 물리치니, 포상 8국이 가야를 공격했을 때 신라군의 원조로 무산되자 3년후
골포(창원)·칠포(사천)·고사포(고성) 3포의 군대가 신라땅 갈화성(울산)을 공격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서라벌로 내려보낸후 400년 1월에 후연에 사신을 보내 조공(王遣使
入燕朝貢) 했으나 모용성은 수도등 50%는 북위에 뺏기고 남연마저 떨어져 나갔으니
모용수 때에 비해 국력이 25%에 불과한지라, 북위가 다시 공격해 오기 전에 국력을
만회하기 위해 2월에 모용희를 선봉으로 3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新城) 과 남소성
(南蘇城) 을 함락해서 700여리의 땅을 탈취하고는 고구려인 5천호를 포로로 잡아 끌고갑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병사가 없으니 두 성이 함락당하고 5천호 고구려 백성들이 끌려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김해까지 남정한 군대를 급히 돌아오도록 했으나, 병사들
의 피로도가 극심하니 바로 반격하지는 못하고 휴식을 취한후 402년 방비가 엄중한 두 성
대신에 멀리 북쪽으로 우회해서 후연의 숙군성(宿軍城) 을 불시에 공격하니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못하고 약탈만 하고 철수합니다.
후연에서는 401년에 모반이 일어나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 가 즉위
하였으며, 고구려는 400년 신성과 남소성이 함락된데 대한 반격으로 402년 숙군성
기습에 이어 404년 11월에도 후연을 침략하는데 삼국사기에는“ 冬十一月 出師侵燕”
라고 단 한줄로 간략하게 기록했으니.... 김부식으로서는 참고할 사료가 없었나 봅니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비에 비해 1년이 늦으니 404년의 후연 침략 기사는 광개토대왕비에는 403년
에 해당하지만 비문에는 4년이 늦은 407년(17년 丁未) 조에 보이는데, 407년이라면 401년에 즉위
한 후연 모용희 建始(건시) 1년이고 백제 전지왕 3년으로 정토대상 국가가 어딘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광개토대왕비 3면 5행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사방합전, 참살탕진. 소획개갑일만여영, 군자기계, 불가칭수.
환파사구성, 루성, 우#*성, #성, #####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사구성, 누성, 우#성, #성, ...
407년의 저 출진에 대해 1. 일본의 今西龍 은 倭(왜)로 보았고 2. 三宅米吉 과 박시형에
김석형은 백제로 보았으며 3. 이병도는 가야와 왜로 그리고 4. 김정학은 왜와 백제,
5. 일본의 浜田耕策 은 선 왜, 후 백제로 6. 문정창, 정두희에 천관우는 후연으로 봅니다?
위키백과에서 광개토대왕과 모용희를 검색하면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
해 숙군성(宿軍城) 과 연군(燕郡) 이 고구려에 의해 정복당하자....” 라는 구절이 나오니
광개토대왕이 요동과 요서를 건너뛰어 그 너머 북경을 차지한게 아닌가 하고 말하는데.....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로서는 연군(燕郡) 은 발견할수가 없습니다?
나무위키에서 광개토대왕이나 모용희를 검색하면 “모용희가 사냥을 벌이던 404년에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한 기록이 등장한다. 연군은 본래 지금의 베이징에 있었지만, 이 당시 북경 지방
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항복했으니) 이미 북위(北魏) 의 영역이므로 여기서 연군은 요서
의 대릉하 서쪽, 차오양시 인근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라고 적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 冬十一月 出師侵燕” 라고 단 한줄 뿐이니 사료가 없었다는 것인데 일본의 고사기는
712년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되었으니 동시대라 사료가 있으니 내용이 풍부하지만, 삼국사기
는 1145년에 편찬되었으니 741년이나 지난 후대라... 고구려에 유기와 신집이며 백제에 백제서기
등이 있었지만 나라가 망할때 불에 타서 없어졌으니 1145년에는 주로 중국사서에 의존한 것이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당시 중국의 오랜 예를 본받아서 마땅히 망한 나라의 역사인 가야사,
고구려사, 백제사를 써야했지만..... 저들은 유학자 최치원이 절망해서 가야산으로 들어갔듯
오로지 진골 핏줄인 뼈다귀만 자랑하고 그후 왕족 끼리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싸움, 내란에만 몰두할뿐 망국의 역사서를 쓰지 않았으니 그 직무유기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다음해 405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반격하여 요동성을 침공해 오니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시간을 번지라)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06년 7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대신)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
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나라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07년에 폭군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몸소 상여를 메고 용성(龍城) 밖으로 나간 것을 틈 타서
한족(漢族) 풍발(馮跋)이 성문을 닫고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으니...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죽임을 당했고,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 을
바지 사장인 천왕(북연)에 추대하고 자신은 도독중외제군사, 개부의동삼사, 녹상서사 시중이 됩니다.
408년 3월에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의 정을 베풀자 북연 왕 (모용)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씨로써 성을
삼았다. 모용보가 태자였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양자)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409년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고 413년에 죽으니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 서기 413년 겨울 10월에 죽었다”라고 되어있으나,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서기 412년 10월에 죽고 서기 414년 9월 29일에 산릉으로
옮기고 비를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있으니 김부식이 연대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
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
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었으며...... 이후 영류왕 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는데
590년에 영양왕은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에 고구려왕에 책봉됩니다.
불과 2년만인 409년에 바지사장이었던 고운(모용운)이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실세인 풍발
(馮跋)이 천왕으로 추대되었고 411년에 유연의 욱구려곡률이 사자를 보내 말 3천필을 바치자
낙랑공주를 욱구려곡률의 처로 삼게하는 한편 농사,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면서 요역, 부세 등을
줄이고 수령을 파견할때 정사를 위한 것을 물어 재능을 관찰해 연나라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북연의 풍발은 414년에는 저광의 조언을 받아들여 거란, 고막해 등을 항복시켰고 416년
에 손백인, 질지을발이 개부를 요구했다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여 죽였으며, 무은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죽였고 430년에 병으로
누웠다가 사망하니 동생 풍홍이 즉위하고 시호를 문성황제 (文成皇帝) 라고 했습니다.
436년에는 북위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북연의 수도 화룡성이 위기에 놓이자 고구려에 망명
을 요청하니 고구려는 갈로와 맹광에게 군사를 보내 풍홍을 구해서 요동으로 오고
북연은 북위에게 멸망했으며, 438년에 장수왕이 풍홍을 '용성왕 풍씨 임금(龍城王 馮君)'
이라고 하대하니 황제국의 군주였음에도 연왕도 아니고 용성왕이니 군왕(郡王)급
으로 낮춰 부른 것이라 반발하여 남조 유송에 망명을 청하니 진노한 장수왕은 죽여버립니다.
한족(漢族) 유유는 410년 화남에서 송(宋)을 건국하니 한족들의 송(宋)나라는 선비족 북위와 함께
화북을 양분했지만 송(宋)은 427년 북위에게 패한 뒤 쇠퇴를 거듭하다 431년에 선비족 탁발씨
의 북위에게 화북을 빼앗겼으며, 선비족 북위는 436년에 북연을, 439년에 북량을 멸망시켜
한족들을 학살하고 화북을 통일하니.... 이제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남북조시대가 되어
북방 이민족이 화북을 점령하고, 화남의 유송은 479년에 소도성이 멸하고 제나라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