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4 설교문
탁종
신앙고백
찬송 아무 것도 모르니 주여 가르치소서
대표기도
성경말씀 유다서1:5~10
찬양
설교 무지가 죄
광고 새신자, 자원봉사자 장학금, 우수사원 포상금,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행사(11일)
찬송 533 내 맘에 주여 소망 되소서
축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고통 받고 있는~
저는 갈치를 좋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염 집사님과 꽃 게장집도 잘 갑니다.
참 맛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여러분들과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저는 어제 한 잠을 못자고 뜬 눈으로 지샜습니다.
요즘 국민의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라가 힘이 없거나 무력하여
국민을 지켜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어린 학생들 생명까지
시퍼른 바닷물 속에 빠트려
갈치들과 꽃게들이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먹고 있습니다.
꽃게와 갈치는 사람 살을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의 손가락을 잘라 먹는답니다.
참 웃지 못 할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 한 생명이라도 살아 돌아 올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시 강해지기로 했습니다.
제가 못나면
제가 무능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계신 우리 모두가 상처를 받고
아프고 슬퍼지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는 허물도 많습니다.
그리고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저를 주님의 종으로 삼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매일 새벽이면 성경을 펼쳐 읽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저는 과거 50년보다 오늘 하루가 더 행복하다고.
그렇지만 요즘은 살아온 50년보다
오늘 하루가 더 괴롭습니다.
그래서 왼 밤을 지새며 괴로워합니다.
기업을 이끌어 가고 지키는 일이
그리 녹녹치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여기에서 100명이 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더 강해져야겠다는 것입니다.
박근해 대통령을 국민 모두가 다 좋아서
대통령이 되었겠습니까?
저 역시도 그리 좋아하는 대통령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이 잘 되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결국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불쌍한 국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성도 여러분들이 다 좋아 안을 지라도
훼방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제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5절입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도셨으며
7절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도다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절,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유다서는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짧은 장이기도 합니다.
유다서에 수록되어 있는 단어수가 총 456개입니다.
그렇지만 본문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믿는 자들의 자유에 대한 그릇된 이해,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방종으로 삼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체를 더럽히고(8절)
자기 욕구대로 살아가고(16절)
그리고 천사장 미가엘처럼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어물정한 처신은
곧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라는 것입니다.(9,10절)
9절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이집트에서 그의 백성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이집트인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장 미가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의 시신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세의 무덤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시신을 두고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감히 하나님을 모독함에도
호되게 질책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모든 판결을 맡기면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9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천사장 미가엘처럼 너무나 소신도 없는 처신을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찾아와서 네 아비가 ‘이렇더라’
흉을 보기라도 한다면 천사장 미가엘처럼 비겁하게
당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적대자들의 태도는 천사장 미가엘과는 극히 다릅니다.
10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적대자들,
마귀들보다 확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주님을 모독하면
베드로처럼 비겁하게 슬그머니 빠져 나가고
의심하고
함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인지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모인 성도 여러분!
그리고 목사님!
저는 담임목사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처럼 비겁하기도 합니다.
가롯 유다처럼 돈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도마처럼 의혹도 많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담임목사입니다.
누군가 다가와
저를 모독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사장 미가엘의 처신에 비춰 봤을 때
단호하게 꾸짖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9절)
이러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을 기대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운한 이야기지만
저와 함께 한지 벌써 2년이 되어 가는대도
우리 한 원장은 저를 믿지 못하고
뒤에서 무슨 짓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1년동안은 무임으로 헌신하겠다고 한
이형진 목사도 그러지 않습니까?
참 슬프고
괴롭습니다.
제가 이 큰 일을 이루어 가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지치지 않겠습니까?
성서적이지는 못하지만
죽고 싶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차라리 되먹지 못한 마귀들처럼 만이라도 못할 바에야
잠잠했으면 좋을듯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10절)
차라리 이렇게 알지 못하면
훼방이나 하지 말라고 큰소리라도 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짐승도 은혜를 안다는데
짐승만도 못한 행동에 미가엘처럼 외람죄에 걸려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알지 못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우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존재를 감추려고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깊은 바다 속에 숨을까?
깊은 산 속에 숨을까?
이렇게 망설이다가
사람이 가장 발견하기 힘든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을수록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나는 자연인이다.’
TV프로를 가끔 봅니다.
그럴때마다
깊은 산 속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척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주님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성경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도셨으며
7절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내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처지만을 불평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저버리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믿음을 한순간에 저버리고 이탈행위를 하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금요일 광주 교육을 갔습니다.
서울에서 오신 강사께서 가장 좋은 요양원은
시설이 크고 편안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강사 본인이 노년이 되어
정말 가고 싶은 요양원이 한 군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훌륭한 시설보다는 운영자의 마인드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우리 요양원으로 오세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여러분들도 노년이 되면
우리 요양원으로 오고 싶도록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8장 22절에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형제들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해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 짓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어디 용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생을 통해 못된 짓을 했을지라도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까지나 용서받을 객체 아니겠습니까?
비겁하고
옹졸하기만 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일은
일곱 번도 아니고 한 번인들 제대로 용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한 자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존재를 인정만 하면
수 만 번이라도
용서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