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인歸人이 되어 주실라요'
(박노해)
그 청년이 그 소녀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그러더란다
많은 길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귀인歸人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나 품고 살다가
마침내 그대를 만났소
나의 귀인歸人이 되어 주실라요?
그 말 한마디에 휘청하고 보니
그의 품에 안겨 있더란다
그 작고 가난한 청년이
온 심정과 영혼을 담아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데
부잣집 막내 딸도 그 가슴 떨림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그 남자랑 잘 살았냐고
행복했더냐고 참아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쁘다고
30대의 그녀에게 다섯 아이와 빚과
연좌제만 남겨 주고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래도 말이다
니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날까지
어린 나한테 존댓말을 썼단다
함께 있을 땐 같이 책을 읽고 논의했고
때로 잘 차려입고 같이 길을 걷고
좋은 것 찾으면 같이 웃고 경탄하고
같이 성당을 나가고 나라 위에 기도했제
그리 불운하고 어려운 날이 많았어도
늘 당당하고 겸손하고 결기가 있었지
뜻이 높은 청년에게 가혹한 시대라서
고생과 위협과 고난은 끝이 없었지만
세상을 품은 눈물로 생생했었제
귀한 뜻을 품고
곧고 선한 길을 가며
참 말을 하고 올바로 살고
누구나 귀하게 대하는
네 아버지가 귀인歸人이었제
귀인歸人은 서로를 고귀高貴하게 만들제
그래서 늘 고맙고 미안하고
무너지지 않는 걸음으로 꼿꼿이 살았다네
‘나의 귀인歸人이 되어 주실라요’
나는 오직 그 말 한마디에만
한번 무너졌으니까 말이다
너무 짧아 찬란했고 그리웁고
이렇게 길게 생에 내내
나를 울리는 고귀한 사람이었다네
난 너무 짧게 귀인歸人을 모시고 살았다네
나의 귀인이 되어 주실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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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 시詩
'나의 귀인歸人이 되어 주실라요'(박노해)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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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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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노해 시인의 부모님 아버님과 어머님을 축복합니다.
나의 부모님도 나름 그렇게 한 세상을 사셨기에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