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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煌本 六祖壇經 – 性徹 註釋』
松溪 小註 (1)
松溪 朴 喜 鎔
1. 2021. 2. 10.
제1편 壇經指針 단경지침
3. 唯傳頓法 유전돈법
請大師의 不立은 如何오 大師言하되 自性은 無非無亂無痴하야 念念般若觀照하야 常離法相하니 有何可立고 自性頓修하니 立有漸이라 此所以不立이니라 [敦煌本 338]
[송계무학 주석] 삼현과 십성을 뛰어넘는다는 불립문자 禪의 경지를 감히 알지 못하는 일개 寒士로서 돈황본 육조단경 한 구절을 베껴 세상에 펴는 것도 한 개 조약돌 같은 공덕이 아니겠는가.
육조혜능은 홀어미를 모시며 사는 나무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어느 시 문득 금강경을 듣고 한 소식 깨친 다음에 검은머리 이고 홍인대사를 찾아가 여덟 달 동안 방아찧기 등 잡일을 하며 틈틈이 깨친 바를 질의응답을 한 끝에 오조홍인으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의발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소문이 나면, 수십 년 공부한 승려들이 떼로 몰려와 의발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후 정식으로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용맹정진하며 크게 남종선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혜능, 그만한 근기를 가진 분들이야 돈오돈수, 한 순간에 깨치고 닦아버리지만, 나와 같은 둔재는 점오점수, 한 평생토록 모래알 한개 정도로 깨치고 깨쳐 쌓고 쌓노라면 개미굴 하나 정도는 이루지 못할 것인가!
그리하여 삼현 십성은 감히 따지 못할 하늘 복숭아처럼 높고도 귀하신 분들이지만, 그들의 그늘 아래에서 안빈낙도하는 한 필부로 편안하게 살다 갈 수 있지 않으랴.
세상엔 천재가 있다. 그러나 범재들이 더 많다. 천재들은 세상의 기둥이지만 범재들은 모래, 흙, 자갈, 나무, 못, 등 등 온갖 재료가 되어 기둥과 기둥을 이어서 한 채의 집, 세상이 되도록 한다.
오늘 날의 불교는 교종은 미미하고 선종은 도도하다. 그리하여 웬만한 절마다 선방이 있어 많은 선객들이 참선 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용수, 마명, 무착, 세친, 적천, 법칭, 달마, 유마 등 기라성 같은 승려들이 불법을 세웠다.
그들의 깨달음이 들어있는 곳이 불경이다. 그러니 어찌 불경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종 역시 불법의 큰 맥이 아닐 수 있겠는가.
불립문자 선의 경지는 돈오돈수도 있지만 점오점수도 있다. 또한 돈오점수도 있고 점오돈수도 있다.
그러므로 불립문자란 말을 감히 함부로 써선 안 된다. 禪이 나태의 위장이나 보호가 되어선 안 되고, 하안거 동안거가 혹서와 혹한을 피하는 무위도식이어선 안 된다.
禪을 이루어서 무엇 하려는가. 내 마음의 위안만족인가, 내가 도통한 고승이라는 자만인가, 종정이나 조실이 되는 통로인가.
원효의 끝은 저자거리에서 민중들과 섞여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일상이었다. 유마거사는 시장에 장사꾼이었다. 효봉의 끝은 머리 기르고 저 북쪽 끄트머리 삼수에서 여자와 함께 서당훈장으로 살다 갔다.
수만 권의 불경을 읽는다고 도를 깨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가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어렴풋이 안다.
고승들이 불립문자를 말한 뜻은 문자에만 얽매인 좁은 마음에서 자맥질하지 말란 뜻이지, 불경 공부를 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혜능이 돈오돈수 할 수 있었던 바탕은 이미 금강경을 들어 깊이 느낀 상태에서, 읽지는 못하지만 귀로 들은 홍인스님의 법어를 방아 찧기 등 고된 잡일을 하면서도 그 뜻을 속으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혜능의 돈오돈수는 한 순간이었지만, 층층 켜켜로 쌓인 물이 한 순간에 둑을 터뜨리듯이 온갖 일을 하면서 오래 동안 쌓은 점오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교이고 마음은 선이라 한다. 말씀과 마음이 어찌 다를 것인가. 그러므로 교는 선에 이르는 길이요 선은 교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한국불교가 구태의연의 허물을 벗고 싱싱한 새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마음과 말씀의 합치, 교와 선의 조화이다.
특히 불법에 뿌리를 둔 각종 종파들은 불경을 자의로 해석하여 차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불법의 근본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응용에 차이를 두어야 할 것이다.
불법은 광대무변하다. 불경은 석가모니 한 사랑의 공덕이 아니라 대하장강에 모여드는 수많은 지류처럼 용수와 마명 등 수많은 선지식들의 공덕이 쌓인 지혜의 서고이다.
또한 석가모니 역시 많은 부처 중의 하나이다. 그보다 앞서 여러 부처들이 있었고, 미륵불은 몇 겁 후에 현현한다고 한다.
즉 불법은 찰흙과 같아서 관심을 갖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형상을 짓도록 한다. 그중에서도 공덕이 높은 이들은 다양한 모양의 부처를 마음의 바탕 위에 짓는다.
수많은 선지식들이 저마다의 부처를 지었다. 19세기에 강증산과 박중빈이가 지은 부처의 세계가 특별하지만, 그것도 불법의 큰 틀 안에서 지어져야 할 것이다.
불법은 우주를 관통한다. 불법은 우주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분하지 않고 일체로 한다. 장차 보편적 지식과 지혜가 극에 달한 인류 정신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禪의 외피를 입은 불법이 아니겠는가.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卽知佛也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敦煌本 318]
[송계 소주] 말인즉슨 맞는 말이고 뜻인즉슨 좋은 뜻이지만 필부인생에게는 가마득히 높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 한 덩이다. 오로지 이 한 화두만 짊어지고 평생을 토굴 속에서 암반 위에서 용맹정진 하는 사람들도 다 이르지 못하는 경지를 어찌 하향저자의 필부가 이루리요.
생활전선에서 허덕이며 바삐 사느라 비록 그 경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이 있음을 눈으로 슬쩍 한 번 보는 것도 공덕 아니랴.
4. 無念爲宗 무념위종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敦 295]
[松溪舞鶴譯] 한살이 도중인 생물은, 그 중에서도 지각과 의식을 갖는 인간에게 ‘念相住’는 필수 요소이다. 지각과 의식이 없는 생물들은 즉흥적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육조혜능의 말씀은 ‘념상주’를 넘어 서라는 뜻이다. ‘념상주’에 얽매여 사는 종이지 말고 념상주를 제어하는 주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無의 터널, 묘각무념의 알음알이에서 헤매지 말고 용맹정진 통과하여 다음에 오는 밝은 세상을 보란 말씀이다.
世人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無者無何事 念者念何物 無者離二相諸塵勞 眞如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起念 雖即見聞覺知 不染萬境而常自在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 [敦 297]
[송계무학역] 무념무상은 인간생물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다. 물론 죽으면 절로 무념무상, 즉 아무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귀신은 살아있는 자의 유념유상에 뜨는 허상이다.
유마거사는 머리 깎고 산 중에 든 사람이 아니고 세속에서 부자로 산 생활인이다. 그러니 만경, 온갖 견문각지가 흉중에 스며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후세에 북방대승불교의 상징적 인물로 대접을 받는다. 평생 산중 절에서 견문각지를 닫고 부처님 말씀과 뜻을 좇으며 산 중들보다 공덕이 더 높았다.
그러므로 오는 생각 가는 생각 등 등 인간사 얽히고설키는 세상살이의 모든 사연이 도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다. 단, 흐린 연못물에 고이 피는 연꽃처럼 제일의인 진여정심 하나만큼은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서.
과거와 현대의 불교의 형식적 외양. 얼마나 휘황찬란한가. 하지만 그 속에 과연 몇 근의 진여정념이 있을 까는 의문이다.
당시대에 불교가 비만해지자 뜻있는 승려들이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고행을 하며 禪불교를 일으켰다. 얼마나 장한가.
百丈叢林은 百丈懷海(720~814)가 律宗사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만든 최초의 禪宗사원이었다. 양자강 부근의 백장산 오지에 들어 부, 권력, 명예 등 세속적 가치관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 수행 정진하는 공동체 집단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승려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이 나고, 한 세대쯤 지나자 왕후장상들과 부자들이 슬슬 찾아왔다. 드디어 황제가 찾아와 법문을 듣고 절을 잘 지어주고는 고승들을 스승으로 모셔갔다. 하여튼 간에 권귀들과 부자들은 청정불법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금방 망쳐버린다.
선불교의 발전 모습 역시 교불교와 같이 화려웅장하였다. 통일신라 말 받아들인 선불교가 이후 한반도 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에 모든 승려들은 스스로 선승이라고 행세한다. 노보살들로부터 시주를 거하게 받아 불사를 크게 일으키기를 최고의 공덕으로 한다.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着 莫起誑妄 卽自是眞如性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
[송계무학역].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127쪽 <불교> 항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싯다르타 고타마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중국의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 수많은 정신적 철학적 천재들의 탄생을 보았던 그 범상치 않은 시기에 인도에서 생을 누렸다.'
이 시대를 지혜의 시대라 한다. 인간이 진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1만 년 전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축적된 지적 에너지가 지구적으로 분출한 시대다.
그 지혜의 시대가 25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지혜의 시대의 후광이 사그라질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부터는 상향일까 하향일까. 즉 발전할까 퇴전할까.
그런데 명색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2500년 전 사람들, 고대인들보다 지적으로 퇴전해서야 되겠는가. 과학문명은 그때보다 월등히 발전했다. 그러나 그 과학문명 때문에 인류의 멸망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현대인은 과학문명의 발전에 걸맞게 정신문명도 발전시킬 것이다. 거기에 일익을 보태기 위해 68세의 나는 독서를 하고 글을 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글이다.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요법적인 것이었다.'
나도 예전에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순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대한 관심만이 능사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문호 지음 《생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책을 보니, 인체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 CHONPS 등 주요 원소들과 기타 다양한 원소들의 조합이라고 하며, DNA와 RNA 역시 그것들의 조합이라고 한다. 그 원소들이 생명의 정보를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란 말이다. CHONPS가 자체적으로 생명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이리저리 요리조리 다양다채롭고 심오기묘한 조합을 함으로써 생명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렇다면 ‘조합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게 중심 문제가 된다. 앞서 읽은 《뉴 코스모스》에 보면 CHONPS는 우주공간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별의 발전에 따른 핵융합과 초신성의 폭발에 의해 그것들이 생산되어 우주로 흩뿌려진다고 한다. 그것들이 뭉쳐서 행성 지구가 되었고, 그것들이 조합하여 생명의 시초인 원핵세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생명은 우주의 축소판이다. 즉 간단히 말해 생명은 우주의 정수다. CHONPS 등 원소들이 우주에서 만들어지고, 행성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 시스템이 있다. 존재한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고등생명체인 인간들이 노력하고 있다. 즉 우주의 원리, 우주의 신비의 중심에 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시스템을 '이 세계의 기운,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뭉뚱그려서 '신'이라고 했다.
이제 그 신이 실체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실체를 드러내는 방법이 과학문명의 발달이다. 신이라고 쓰인 포장지를 걷고 내용물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 고대인들은 신의 내용물을 보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주술을 걸었다. 종교의 장엄한 형식으로 신성하게 신을 맞으려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과학의 눈으로 신을 맞이해야 한다. 신은 멀리 따로 있지 않고 나에 가장 가까이 있다. 아니 내가 바로 신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신비가 집적된 실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 몸속에 들어 생명현상을 계속하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 등이 우주에서 왔다. 그들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나를 이루고 나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우주의 원리는 신이다. 신이 내 몸속에 살아있다. 그러니 나,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한가. 이 몸의 동력인 정신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돈황본 육조단경 한 말씀을 옮기다가 사설이 길어졌다. 카프라가 128쪽에서 어찌 말할지 몰라도 일단 여기까지 논해 본다.
끝에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요법적인 것이었다.'라 한다. 글쎄 카프라가 얼마나 석학이고 불교 연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섣부른 단언이 아닐까?
'견성', '겁', '연기', '인연법', '인과응보', '성주괴공', '수미산' 등은 참 무서운 말이다.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 등 현대과학의 성과와 맞물리는 말들이다. 특히 세포생물학, 입자물리학, 우주물리학 등 최첨단 과학 학설과 일맥상통 한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우주론, 이기론, 인성론, 수양론 등도 현대과학과 일맥상통 한다. 인류역사 어느 시대에나 최고급의 지성들은 생각이 비슷하다.
무학려의 오늘을 불교 생각으로 보낸다. 오늘은 참 즐거운 날. 오후에 영주시청에 민원 답변을 들으러 갔다가 신문 한 거 뚱쳐 왔다. 붓글씨 쓰기가 일락인데 한 닷새 쓸 거 마련했다. 부자다 부자! 학이시습지불역열호!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敦 318]
[松溪舞鶴譯] '무념법'만 통달하면 되는데, 성철의 말이 지루하여 본문만 나타내려 하다가 [성철역]을 올린 까닭은 성철의 말씀이 과하지 않은가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앞서 논했지만, 육조혜능이 단경을 남긴 까닭은 그의 육신이 사라지면 더이상 법손들이 그의 佛性을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자로 남겼다. 법손들은 이 단경을 읽으며 육조혜능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점수이다. 앞에서 "법손들은 이 철칙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어긋난다면 육조의 법손이 아니다"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뒤의 "점수사상은 지해라고 옛 조사들이 극력 배제한 것이니"까지는 순하게 읽히지만 이어지는 "육조의 후손인 우리는 삿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해야 한다"는 지나치지 아니한가?
성철은 하택과 규봉의 점수사상을 '삿된 길', 즉 邪道로 규정했다. 이것은 조선조 때 성리학의 각 파들이 자기들의 것은 正道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邪道라고 매도한 것과 같은 맥이다.나는 육조의 후손이 아니므로 '삿된 길'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지만, 후손들에게는 성철의 말씀이 지엄하리라.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길은 한 길뿐만이 아니라 여러 길이다. 돈오가 좋은 등산로이지만 점수도 불도에 이르는 한 방편이다. 모든 생물의 근기가 다르듯이 사람도 각각 근기가 다르다. 자기 근기에 알맞은 길을 걸어가면 된다.
돈오는 감성이고 점수는 이성이다. 인간은 양성을 겸한다. 돈오할 수 있는 근기는 대단하다. 그러나 오만은 부처님의 마음이 아니다.
오늘 읽은 책에서 '신경조절물질은 아미노산에서 생성된다. 신경조절물질인 도파민, 노르에피네피린, 에피네피린이 분비되어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도파민은 운동, 학습, 중독에 관여하는 신경 작용을 조절하는 물질로, 아미노산 티로신이 변형되어 새성된다. 결국 인간의 감정과 기억도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원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정서와 기억은 신경 조절 분자의 작용이다'라는 글이 있다. 약물 중독, 약물 치료, 신경가스, 마약 등을 보면 이 말이 맞다.
즉 인간은 물질의 소산이다. 몸은 당연하고, 감정과 생각 등의 정신 작용도 물질의 소산이다. 이 우주와 지구가 물질이다. 정신 순수주의자들은 정신을 지고지순의 여기지만, 사실은 정신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의 소산이다.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실상이 드러난다.
유물론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는가? 아니다, 현대과학이 이만큼 정신의 본질에까지 왔다.
그럼 마음은 여러 원자들의 이합집산이란 말인가? 지성조차도.
해인사 산문에 들면 거대한 성철사리탑이 있다. 누더기 승복과는 간격이 너무 크지 아니한가? 그 옆 혜암의 부도도 거대하다. 47년 전 겨울 태백산각화사 눈 내리는 신작로에서 뵌 모습과 낯설었다.
생각하는 인간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가 난무하면서 만들어내는 有念과 無念 사이를 바삐 오간다.
5. 정혜체일(定慧體一)
ㅡ정과 혜는 한 몸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定慧別 定慧體一不二 即定是慧體 卽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時 慧在定 此義 卽是定慧等 (敦 293)
[松溪舞鶴譯] 정은 몸이요 혜는 정신이다. 그중에서도 정은 맑은 몸이요 혜는 밝은 정신이다. 몸의 상태는 탁 혼 청이 있으며 정신의 상태 역시 그러하다.
일상을 살며 사람의 몸은 수시로 상태를 달리한다. 정신 역시 그러하다. 그 중에서도 몸이 맑고 가벼우면 정신 역시 밝고 가볍다. 즉 몸의 상태가 정신을 결정한다. 즉 현실이 이상을 결정한다. 즉 근본을 보면 물질이 정신을 결정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신은 물질의 투영이다"라 말한다. 맞는 말에 가깝기는 하나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단순한 주종관계로 단정하였을 뿐, 물질과 정신이 내포하는 본질적인 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樹欲靜而風不止, '호수 물은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불어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말처럼 인간의 정신은 계속해서 밝고 가벼운 상태이고자 하나 주위 환경과 여건이 정신을 혼탁하게, 요동치게 만든다.
그러하나 태풍이 불어도 꿈쩍하지 않는 거수와 거암처럼 수행단련을 깊이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철의 단언은 고요한 절간 선방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세속에서 일상을 사는 필부들에겐 정혜 수행점차가 더 필요하다.
定慧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卽有二體 無兩般 此定慧 亦復如是 [돈 295]
[松溪舞鶴譯] 성철의 논조가 순화되었다. 이전에는 "점수점오는 邪道다!"라 일갈해버리더니, 오늘은 "정혜쌍수는 육조의 정-혜는 아니다." 정도로 점잖게 분별한다.
그런데 성철은 등과 빛이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했지만, 그 비유는 등과 빛이 인과 관계는 되지만 일체라는 의미를 논증하기에는 미흡하다.
등은 등이고 빛은 빛이다. 등이 없으면 빛이 없다. 즉 정이 없으면 혜가 없다는 말이 된다. 즉 신체가 없으면 정신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죽은 자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신체와 정신을 함께 갖는다. 그러므로 신체와 정신을 함께 수련하면 佛地에 이를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돈수돈오의 六祖禪은 靜寂山中의 것이요 점수점오 정혜쌍수의 화엄교는 生活世俗의 것이다.
용수 마명 무착 세친 적천 법칭 달마 의상 원효 등 고승들이 대승을 일으킨 까닭이 무엇인가.
小乘은 자기 혼자만이 타고 가는 작은 수레이다. 그러나 大乘은 고승이 마부가 되든지 말이 되든지 간에 많은 사람을 태워서 가는 큰 수레이다.
정과 혜를 함께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선불교와 성리학이 발생한 시대는 다르지만 동류의 시대성을 가진다. 교불교와 유학이 늙어서 고리타분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가 난세였기 때문이다. 시대가 혼란스러워지자 지식인들 중에서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위안을 얻고자하는 사조가 생겼고, 그에 추종하는 문도들이 늘어나 발전하면서 민중들이 따라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즉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혼자 조용히 정신적 탐구의 세계에 탐닉한 것들이 선불교와 성리학이다.
불교에 유심한 사람들은 소승보다 대승을 더 높이 친다. 소승은 동남아에 주로 분포하고 대승은 동북아에 주류다.
그런데 중생 위안과 구제라는 부처님 본연심을 어느 쪽에서 더 잘 구현하고 있는가. 동북아에서 우리나라가 대승불교 일색인데, 과연 대승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 대형불사와 대형불전이 대승의 정신인가? 오도송을 읊으며 암굴에서 척! 나오면 고승인가?
대승을 해도 마부인 승려는 고승이다. 말인 승려는 원효처럼 오래 기억된다.
그러나 동남아 소승불교를 보면 온 절이 세속에 있어 주민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불공을 드린다. 절이 마을의 모든 사람을 싣는다. 소승이 아니라 거승, 커다란 수레이다.
오늘날에는 소승과 대승 개념이 바뀌었다.
물론 조선불교가 산중불교가 된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유학자들의 배불훼불정책이다. 이제 민주시대가 되었으니 한국불교는 산중불교 태를 벗어야 할 것이다.
[松溪舞鶴譯] 불교계 각 산문별 분포를 잘 모르나,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선맥을 잇는 조계종이 주류라고 한다. 그러니 점수점오의 교맥을 잇는 종은 없거나 있어도 비주류인 것 같다.
조계종도 참선 일변도가 아니라 불경 참구도 하지 않겠는가? 염화시중이니 교외별전이니 불립문자니 하는 최상의 경지를 걷는 승려들도 있겠지만, 중생들에게만 각유차별근기가 아니므로 많은 승려들이 최상의 경지에 오르기조차 버거우니 불경 공부도 한 방편일 것이다.
오매일여에 이른 대혜선사도 스승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으니, 오매일여의 경지도 차등이 있음이다.
'계속해서 언구를 의심한다'란 말은 이중성을 갖는다. 언구, 즉 화두는 오도하면 즉각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용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점수점오라고도 할 수 있다.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 동정일여도 안 된"이라 일갈하는 성철의 음성이 매섭다.
오도하신 고승이라고 남들이 아무리 칭송해도, 오도의 경지는 스스로 인식할 따름이다.
重華叢林 하나 開山하고 싶다.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等 意中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因本無生 雙修是正 [徳, 宗 337]
[송계무학역] 성철스님의 말씀에 무어 더 보태거나 뺄 게 없이 모두 적절하다. 내가 감히 안빈낙도하는 하향의 처사로서 한 마디 보탠다면, 정혜쌍수하고 적조쌍류를 추구하는 까닭은 통철오도하여 의중청정, 맑고 밝은 마음을 갖고자 함이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의 평화'이다.
내 마음의 평화를 얻어 나를 알고, 그 빛이 넘쳐흘러 사바중생에게까지 비치도록 하고자 함이 구법하는 승려들의 궁극 목표일 것이다.
그러한 궁극 목표는 승려들만이 갖는 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갖고, 세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나만이 그러한 궁극 목표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아집과 편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 크게 문제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만이 궁극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세상 인간사에는 '마음의 평화'를 초월하는 다양한 현상들이 수시로 변화하고 있다. 인간은 무리동무로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마음의 평화'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미래사회의 지자들은 단순하게 '마음의 평화'만을 목표로 하는 소승적 존재가 아니라 그 너머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승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6. 무생서방(無生西方)
ㅡ남이 없는 서방 극락
迷人念佛 往生彼 悟者自淨其心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淨 [돈, 대, 흥, 덕, 종 323]
[송계무학역] 성철역이 사뭇 오만하다. 물론 혜능이 미인,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하였으므로 문도된 입장으로서는 직역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혜능이 ‘迷人’이란 말 말고 다른 말을 썼으면 어떨까. 혜능이 미인이라 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근기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실 혜능은 일자무식으로 절집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의식주를 해결했다. 행자나 승려 출신이 아니다. 남들 보기에 혜능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 절의 승려들이 보기엔 정말 하찮은 불목하니였다.
그러나 혜능은 그 마음속에 크고 든든한 근기를 갖고 있었다. 홍인대사의 설법을 귀 동양하다보니 그 근기가 터져 성장하였다.
'미인'은 지능과 감정이 영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남보다 우수한 지능과 감정을 가졌으나 그것을 이기적인 데만 사용하거나 사회적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근기'는 지능과 감정이 평범하거나 좀 떨어지는 사람이다. 승려들처럼 예리하고 강렬한 지능과 감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은 자기를 위하나 다른 사람과 사회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소근기'들은 불법에 대한 관심과 믿음을 항상 마음에 지닌다. 그러므로 불법의 깊은 경지에까지는 감히 넘보지 못해도 염불을 하면서 다만 산기슭 정도에라도 갈 수 있다.
서방정토는 불국토다. 기독교의 천당처럼 선사들이 대중의 불심을 돈독히 하기 위해 만든 방편이다. 방편은 방편일 뿐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불법에 근접토록 하기 위해선 방편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서방정토 그리고 염불이 성철과 같은 '대근기'에게야 하찮은 방편으로 보이겠지만, 훨훨 날아 금방 불법에 들겠지만, 중생에게는 불법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겠는가.
心但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 往生難到
[송계무학역] 서방정토는 하나의 방편이다. 마찬가지로 염불도 하나의 방편이다. 또한 대업왕생도 미망에서 헤매는 중생들로 하여금 심기일전하여 악업을 씻고 선업을 쌓으란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니 성철처럼 환주장엄이니 실지정토가 아니니 하며 다툴 일이 아니다.
至極한 空을 보는 불교 교리인데 무슨 귀신이 있어 서방정토로 간단 말인가. 至空極空을 통찰한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인생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본질에 든다. 그리하여 마음과 우주를 합일시켜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애오욕을 통과한다.
지공극공에 노니는 이는 이미 공을 사랑하기 때문에 허무조차도 사랑한다. 그래서 소득을 바라지 않고 살아 숨쉬는 이 시간을 즐긴다. 酒色雜技로 즐기는 게 아니라 淸淨佛心을 즐긴다.
7. 불오염수(不汚染修)
ㅡ물듦이 없는 닦음
♧ 師曰 什麽物 恁麽來 曰說似一物 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덕. 종 359]
◇ 송계무학역 : 點覺, 線覺, 面覺, 圓覺, 球覺, 色覺, 質覺, 量覺, 重覺, 味覺, 香覺, 動覺, 精覺, 生覺, 死覺.
'覺' 字 하나로 꿰어지는 이것은 무엇이뇨?
8. 불보리인(佛菩提因)
ㅡ부처님 깨달음의 씨앗
♧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 自有眞 有眞 卽是成佛因 [돈 386]
[송계무학역] 돈황본과 다른 각 본의 차이는 혜능과 다른 승려들의 차이다. 신중과 심중의 차이는 몸과 마음의 차이, 육체와 정신의 차이이며 나아가서는 물질과 정신의 차이까지 확산될 수 있다. 또한 이론과 실제, 지식과 실천의 차이에까지 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
혜능은 불학무식하여 문자로 도통한 것이 아니라 절일을 하며 들은 오조홍인의 법문을 마음에 되새김질하여 도통하였다. 그러니 실천 위주의, 즉 몸 위주의 진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승려들은 불경 공부를 통해 득도하였으므로 마음 위주의 진을 생각하였다.
앞에서 불오염의 수증은 불지인 원증 후의 원수라고 하여 착의끽반, 소지분향 등을 지칭하였다고 했다. 또한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는 마음이 없고, 모양 없는 빛 속에서 항상 자재하다고 하였듯이 혜능은 마음보다 몸의 진실 됨을 중요시했다. 물론 혜능이 마음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니다. 단지 허상일 뿐인 마음에 집착해 도를 닦는 것보다 생명의 주체인 몸을 단정히 함으로써, 즉 몸이 존재하는 일상을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살아있는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심중자견진에 집착하다보면 허상을 붙들고 하루 종일 씨름하게 된다. 그것보다는 하루를 사는 몸을 진실 되게 처신하다보면, 즉 신중자유진하다보면 도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는 뜻이다.
심중자견진은 난해하지만 신중자유진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릇이 흔들리면 물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그릇을 그대로 두고 물을 고요하게 할 수 없다. 그릇을 고요하게 하면 물은 저절로 고요해진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많은 공부와 노력을 하기 보다는 먼저 몸을, 즉 일상생활을 반듯하고 고요하게, 즉 진실 되게 하면 마음은 저절로 반듯하고 고요하게 된다는 법문이다.
돈황본은 혜능식 진여법이고 다른 각 본은 다른 고승들의 진여법이다. 성불하는 씨앗은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담겨있는 몸이 먼저 진실해야 한다. 백번 알고 말하는 것보다 한번 실천하는 것이 소중하다.
성철이 어렵게 말하지만 사실은 같은 법문으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백 마디 법문이 아무리 화려해도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재미로 말하고 재미로 듣는다면 한갓 말의 유희일 따름이다. 그것보다는 따뜻한 인사 하나가 살아있는 법문이다.
제2편
敦煌本壇經 編譯 돈황본단경 편역
南宗敦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
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一卷
兼受無相戒弘法弟子法海集記
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일권
겸수무상계홍법제자법해집기
육조 혜능대사가 소주 대범사 강당에서 베푸신 법단경 겸하여 무상계를 받은 홍법제자 법해가 모아 기록함
* 앞에서는'慧能'이고 여기서부터는 '惠能'이다. 법호가 바뀌어서일까 법해가 집기 할 적에 誤字해서일까 성철이 원고를 쓸 때 오자일까 이 책 편집자가 오자일까?
지혜 慧와 은혜 惠는 상통인가?
1. 序言
惠能大師 於大梵寺講堂中 昇高座說摩訶般若波羅蜜法 授無相戒 其時座下 僧尼道俗一萬餘人 韶州刺史韋璩 及諸官僚三十餘人 儒士餘人 同請大師說摩訶般若波羅蜜法 刺史遂遂令門人僧法海集記流行後代 與學道者 承此宗旨 遞相傳授 有所依約 以爲禀承 說此壇經
2. 尋師 심사
能大師言 善知識 淨心 念摩訶般若波羅蜜法 大師不語 自淨心神 良久乃言 善知識 靜聽 惠能慈父 本官 范陽 左降遷流嶺南新州百姓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 孤遺 移來南海 艱辛貧乏 於市賣柴 忽有一客 買柴 遂領惠能 至於官店 客將柴去 惠能 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 讀金剛經 惠能 一聞 心明便悟 乃問客曰 從何處來 持此經典 客 答曰 我於
蘄州黃梅縣東馮茂山 禮拜五祖弘忍和尙 見今在彼 門人 有千餘衆 我於彼聽見大師勸道俗 但持金剛經一卷 即得見性 直了成佛 惠能 聞說 宿業有緣 便即辭親 往黃梅馮茂山 禮拜五祖弘忍和尙
♤ 송계무학 주
‘빙무산’의 ‘빙’ 자가 한자 판에 안 떠 옥편을 보니 풍, 팽, 분이다. 그래서 '빙무산'을 검색하니 '풍무산'이라고도 한다.
육조단경 모임의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혜능이 오조홍인에게서 가사(달마의 가사라고 알려진)를 받아 새벽에 도망치듯 떠나자 홍인의 수제자인 신수가 혜명을 시켜 쫓도록 했다. 붙잡힌 혜능이 일갈은 했지만, 가사를 뺏긴 것 같다.
혜능이 조정으로부터 6조로 공인 받은 것은 혜능 사후 80년 뒤란다. 그것도 제자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란다.
중들 세계에도 질투와 시기가 있다. 원효도 다 쓴 대승기신론 원고를 분황사에서 도둑 당해버렸다. 급히 대략의 소를 써서 설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육조를 서로 다퉈야 하는가. 홍인이 가사를 주고는 왜 새벽에 보내는가. 혜능을 인가했음을 그냥 공표하면 됐을 텐데, 뭔가 말 못할 내막이 있었는가? 몇 대 조 반열에 들어 대대로 존숭 받아야 하는가. 꼭 조정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가. 세속에만 사람 도둑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산중 절에도 중 도둑놈도 있구나.
물질세계나 정신세계나 인간들의 세계는 본질이 같다. 부귀공명을 다투는 아수라.
갑자기 심한 구역질이 난다. 혜능, 저승에서 한 말씀 해보시게.
불교는 본래부터 귀족성이다. 석가모니가 왕자였고 득도 후에도 자기 왕국을 기반으로 하여 포교에 성공했다. 왕자 출신이란 후광효과가 컸을 것이다. 이후 동북아에 전파된 불교는 결국 귀족불교, 왕실불교화 하면서 국고로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현대에도 많은 절이 세위지고, 고즈녁했던 옛 절은 거금시주로 웅장하게 중창되고 있다. 성철과 혜암은 누더기와 소박한 미소를 남겼지만 그들의 부도는 종정답게 해인사 입구에 웅장하고, 무소유 법정은 실상사 일천억 시주와 함께 이름이 남았다. 산중에서 홀로 견성득도 진여를 본 스님이 있다면, 그를 가만히 놔둘까 조실로 종정으로 모실까.
내가 ‘돈황본육조단경’을 읽고 올리는 까닭은 혜능이 비천한 출신으로 돈오 견성득도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견성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혜능의 설법도 견성하라 뜬구름 잡기다. 혹여나 나의 작업이 혜능 우상화에 재료가 될까 자히 염려스럽다. 무릇 눈을 멀리 지평선 너머에 두는 자라면, 석가든 혜능이든 맹목으로 추종하지 말고, 그들을 격파해야 할 것이다.
3. 명게(命偈)
五祖忍於一日 喚門人盡來 門人集訖
五祖曰 吾向汝說 世人 生死事大 汝等門人 終日供養 只求福田 不求出離生死苦海 汝等自性 迷 福門 何可救汝 汝惣且歸房自看 有智惠者 自取本性般若之知
各作一偈呈吾 吾看汝偈 若悟大意者 付汝衣法 禀爲六代 火急急
♧ 송계무학 주 : 절 근황이, 오조 홍인대사가 "종일공양 지구복전" 이라고 일갈 한 걸 보니 문인들, 즉 그 절에 모여 있는 중들이 공부를 소홀히 하는 모양이다. 그러하길레 스승이 "화급급"이라고 닦달하지 않았겠는가. 신수가 상좌승이니 의발은 상좌승이 당연히 이어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홍인대사의 생각 차원은 그들과 달랐다.
중이 복전을 구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제자들이 얼마나 나태했기에 스승이 그런 말을 했겠는가.
세속인들이 생각하기엔, 절에는 생사를 초월한 스님들이 용맹정진하는 곳이다. 세속인들이 바친 시주로 지어 올린 공양을 하는 까닭은 정신의 그릇인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최소한의 공양으로 육신을 유지하며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오로지 불법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절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불법을 궁구하겠다는 의지가 굳은 중들도 있지만, 그저 그렇게 어찌하다가 중이 된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불법궁구는 멀리하고 공양과 복전만 바라는 사람은 껍데기는 중이지만 알맹이는 속물이다. 즉 밥벌레다.
견성오도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그 수준을 측정해낼 잣대가 없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예수가 몇 마리 고기와 몇 개의 떡을 뻥튀기해서 수많은 사람을 먹인다든지, 공중부양과 축지술 등 등 이적을 보이지 않는 이상엔 오도를 짚을 방법이 없다.
홍인대사는 "생사고해"를 말한다. 생은 축복이지만 사는 불행이다.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견성오도하여 윤회의 업보를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일종의 자기위안, 자기만족이다.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현대물리학과 분자생물학 그리고 우주천문학을 독파하는 데 있다.
견성오도는 낮은 수준의 정신적 자기합리화의 결과이다. 그렇지만 공허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일종의 정신적 아노미 상태의 연속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성과를 독파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와 수용은 공허의 완전한 청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이 축복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고, 사가 생을 즐기고 난 다음 차례로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임을 터득할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현재가, 오늘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가!
門人 得處分 却來各至自房 遞相謂言 我等 不須呈心用意作偈 將呈和尙 神秀上座 是敎授師 秀上座得法後 自可依止 請不用作 諸人息心 盡不敢呈偈 時大師堂前 有三間房廊 於此廊下 供養 欲畵楞伽變 并畵五祖大師 傳授衣法 流行後代 爲記 畵人盧珍看壁了 明日 下手
♤ 松溪舞鶴 註
얘기가 재미있어진다. 문인들이 참 게으르다. 스승이 게송을 지어오너라 하면 "예!" 하고 순종하여 녹슨 머리를 끙끙 돌려 게송을 지을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편하게 누워서는 골치 아프게 게송을 짓기 보단 신수 상좌를 내세워 모면하려는 꾀를 부리고 있다. 신수가 육조가 되면, 문인들은 그를 위해 게송 안 짓기 동맹을 한 공으로 앞길이 편안하다. 본사에서 간부 중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말사 주지로 임명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가끔 법회를 열어 극락과 지옥을 들먹이기만 해도 신도들이 바리바리 재물을 들고 싣고 온다.
홍인대사도 그렇다. 문도들이 지은 게송을 보고 큰 뜻을 깨친 자에게 의발을 전하겠다고 하면, 상좌로서 스승을 떠받드는 데 전심전력한 신수는 어떡하는가. 의발을 받지 못하면 개망신에다가 이 절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문도들은 신수 상좌의 입장도 생각하고 자기들 편리도 도모하는 꾀를 낸 것이다. 게송을 지어 바친 자는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발은 절밥 순으로 전할 순 없는 것, 홍인대사는 의발 전수의 금도를 지켰다.
육조가 된 혜능도 그렇다. 수많은 대중들과 고관들을 모아놓고 하는 법회에서 구태여 과거사를 끄집어내어 공개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자기가 오조홍인으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정통성 천명 겸 자랑을 할 순 있지만 신수 상좌 쪽 중들로서는 매우 부끄럽고 아픈 상처를 중인환시리에 들쑤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혜능의 입에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혜능이 홍인의 의발을 전수받은 데에 대한 반발과 불만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불학무식 문자도 모르는, 절에 들어온 지 여덟 달 밖에 안 된, 아직 수계도 안 한, 방아 찧는 젊은 불목하니를 누가 육조로 인정하겠는가. 의발을 품고 도망하는 혜능, 그를 뒤쫓는 신수의 문도들. 그리하여 당대에는 혜능이 육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80년 후에야 혜능의 법손에 의해 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육조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즉 80년 동안 불교 교단에 엄청난 갈등과 싸움이 있었다는 말이다. 결국 혜능이 용맹한 제자들 덕분에 승리했지만, 이러한 갈등과 싸움의 단초를 제공한 자는 오조홍인이다.
그리하여 오조홍인의 의도대로 선불교에 흡입된 나태와 편견이 걷히고 견성오도를 향해 용맹정진 하는 절풍이 확립되었는가?
홍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수로부터 여전히 스승 대접을 받았을까 푸대접 받았을까. 하여튼 간에 신수만 망쳤다.
5. 정게 呈偈
게송을 바침
惠能偈曰 혜능게왈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無臺 명경역무대
佛性常淸淨 불성상청정
何處有塵埃 하처유진애
又偈曰 우게왈
心是菩提樹 심시보리수
身爲明鏡臺 신위명경대
明鏡本淸淨 명경본청정
何處染塵埃 하처염진애
♧ 송계무학 주
<우게왈>, 후편은 없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전편은 상급으로 견성오도에 든 자들에게 읽히고, 후편은 그 아래 등급에 머무는 자들에게 읽힌다.
툭 틔어 시원하다. 오물조물 미망에 헤매거나 견성에 닿을 듯 말 듯 자맥질하는 경계를 일거에 깨뜨린다. 역시 홍인이 의발을 전할 만하다.
마음은 본래 갓 만들어진 거울처럼 밝다. 그러나 거울이 오래면 먼지가 앉고 때가 끼듯이 마음도 오래면 더러워진다.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므로 나이를 먹으면서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꼬질꼬질 때가 낀 거울이 제구실을 못하듯이 마음이 너무 더러우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울을 가끔 청소하듯이 마음도 가끔 청소해야 한다.
'신위명경대'란 말이 재미있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몸을 하찮게 여긴다. 음식도 살아있기 위하여 겨우 먹는 것으로 친다. 그러나 혜능은 몸은 마음을 받치는 대라고 말한다. 거울이 아무리 밝아도 받침대가 없으면 제구실을 못한다. 마찬가지로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하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먼저 알맞은 음식과 운동으로 몸을 건강하게 한다.
이것을 사회에 적용하면 마음과 몸의 건강을 함께 갖취야만 건실한 인간이요 사회인이라는 원리가 된다.
또한 몸으로 살아온 자기에 대한 변호이자 입만 살아 논리만 나불대는 학승들에 대한 일갈이라고 할 수 있다. 봐라,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보는데 무슨 학력이 필요하냐, 학력은 밥 벌어먹고 출세하는 데나 필요하지 인간과 인생의 근본을 아는 데는 별로이지 아니하냐.
혜능은 일자무식이다. 이 게송도 글을 아는 중에게 부탁해서 벽에 쓰도록 했다. 또한 이 게송을 짓게 된 단초와 기반은 신수의 게송이다. 신수가 먼저 벽에 써놓은 게송을 듣고는 자기의 깨달음을 그 위에 보탰다. 즉 신수는 혜능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신수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莫使有塵埃 막사유진애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혜능과 비교하면 언어학자와 문필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인의 수제자로 교수사인 신수의 경지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신수의 게송은 혜능으로 하여금 견성오도의 막을 뚫는 송곳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은 문답법이다. 질문하는 자의 핵심을 통찰하고 논리의 허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혜능 역시 신수의 경지를 간파하고 재빨리 숟가락을 얹었다. 의발, 밥그릇을 졸지에 빼앗긴 신수가 얼마나 분했을까? 그래서 의발을 빼앗으러 문도를 보내고, 80년 동안 대를 이어 끝까지 혜능의 육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유식이 철철 넘치는 신수는 손가락을 보았지만 일자무식 방아꾼 혜능은 달을 보았다.
혜능은 40 자로 할 말 다했는데 나는 1000 자가 넘게 수다스럽다.
그런데, 홍인 혜능 신수 셋의 모습이 내 눈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이 안 좋아서일까? 오만일까?
견성오도에도 등급이 있으니, 중하급은 상급에 머리 숙이며 공손해야 하는 것은 세속에서 빈자가 부자에게, 백성이 왕과 귀족에게, 국민이 권력자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순종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을까?
오조니 육조니 칠조니 다투며 위세부리는 것부터 잘못이다. 견성오도의 경지가 깊고 넓을수록 더 겸허하다. 얕고 작을수록 찰랑댄다. 석가모니도 이승에서 팔십 년 살다가 한 줌 재가 되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세속에선 가장 비싼 물질의 힘과 가장 센 몸의 힘이 왕좌를 차지하고, 사변계에선 가장 센 정신의 힘이 왕좌를 차지해서 행세한다.
오조로 행세한 홍인의 잘못이 크다. 혜능이 견성을 했음을 알았으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중인환시리에 의발을 넘겼으면 신수인들 속상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면 무탈할 일을, 심야에 혜능 혼자만 불러 가만히 의발을 넘겨주고, 더하여 소란스러울 테니 새벽에 이 절을 남모르게 빠져 나가거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그 바람에 수십 년 동안 수제자로 교수사로 홍인을 스승으로 모시며 고생한 신수만 선불교사에 흑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혜능만 일방적으로 높이 칠 게 못된다.
7. 정혜 定慧
惠能大師喚言
善知識 菩提般若之智 世人 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
示導見性 善知識 遇悟卽成智
♧ 송계무학 小註
여기서 중심어는 '迷'다. 이것만 없으면 사람마다 '本自有之'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부처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迷'를 없애기 위해 혜능은 대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대선지식이 희귀하니 지도 받아 견성하기가 어렵다. 대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는다 해도 대중들마다 근기가 다르니 견성에 이르는 각자는 더욱 희귀하다. 또한 대선지식이라 해도 대중들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들이 존경하거나 숭배하는 대상을 무조건 추종하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의문이 있어도 묻지 못하게 되며, 결국 맹목적 순종자가 된다.
반면에 지도해 주는 대선지식 없이 독공하는 사람은 문자를 사색하다가 침식을 잊는 理障에 빠지기 쉬우니, 무릇 한 세상 살면서 識者되기 어렵고, 善知識 되기 더욱 어렵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갈수록 지식과 정보가 확장되기 때문에 꼭 인간 대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독서와 사색을 통해 보편적 대선지식을 만날 기회가 많다. 중요한 점은, 반드시 대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아야만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지혜를 터득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부단히 내공을 쌓아나가려는 실천의지이다.
'迷'와 '悟' 사이.
그 사이는 善과 惡일까 白과 黑일까. 한 가지로 보이는 햇빛도 프리즘을 통하면 빨주노초파남보이고, 그 외에는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엑스선 등이 있으니, 미와 오를 별도의 두 개로 볼 순 없지 않겠는가.
미와 오 사이는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무지개에 백과 흑, 회 등 무채색은 없으니, 미와 오는 유채색의 양변이다.
무채색은 선악의 세계이지만 유채색은 共樂의 세계다. 그러므로 혜능이 말하는 미와 오의 사이는 선과 악이 아니라 공존공락하는 생물의 세계다. 만약 혜능이 미를 악으로 보고 오를 선으로 보았다면 그것은 단견이다. 또한 혜능의 말을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오역이다. 혜능은 모든 사람이 본래 견성의 씨앗을 품고 있으니 그것을 싹 틔워 잘 가꾸기를 권면하고 있다.
'遇悟卽成智'에서 悟, 깨달음은 지혜라는 목표에 이르는 길이다. 지혜란 인간생물의 한계를 인정하며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승화시켜 고요하고 아름다운 경지를 여는 것이다. 세상이치를 환히 아는 지혜를 얻어 절대자유의 시공에서 유유자적함이 오의 목표이다. 그리하여 生老病死와 榮枯盛衰의 輪轉에 자기를 싣는다. 지구도 윤전하고 태양도 윤전한다. 은하도 윤전하고 우주도 윤전한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인간도 윤전한다.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時 定在惠
卽定之時 惠在定 善知識 此義 卽是定惠等
學道之人 作意 莫言先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設善
心不善 惠定不等 心口俱善 內外一種
定惠卽等 自悟修行 不在口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不斷勝負 却生法我 不離四相
* 송계무학 小註
혜능이 말한 '四相'이 무엇인가. 네버검색 원불교사전에 보면,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四有爲相으로 生相, 住相, 異相, 滅相), (우주의 成住壞空), (生老病死) 등 네 가지가 있다.
四相을 말하는 혜능 법문의 요점은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 오도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과 다투며 하는 게 아니다'이다.
정과 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비유할 수 없는 한 몸이다. 쉽게 말해 정은 몸이요 혜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혜는 마음 중에서도 보편적인 마음이 아니라 고도로 승화된 경지의 정신이다. 즉 마음도 종류가 다양해서 각 부분 마음마다 등급이 다르고 무게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다. 그것들을 감각, 의식, 본능, 감정, 감성, 이성, 신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혜능이 말하는 정은 단순히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미에서 입을 말하지만, 생물적인 몸이라기보다는 혜를 담고 있는 그릇, 틀을 말한다. 혜능은 정을 그릇으로 보지만 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미 몸은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도 소중하고 몸도 소중하기 때문에 몸의 실재를 인정하고 몸의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는 궤변으로 빠지지 않는다. 혜가 출발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이 단아해야 혜도 단아하다. 근원이 구정물이면 강은 백년하청이다. 그래서 혜는 정이 바로 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정은 혜를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모든 마음이 혜를 담을 순 없다. 마음 중에서도 고도로 승화된 마음만이 혜를 담을 수 있다. 즉 고도로 승화된 마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곧 혜다. 마음을 원석이라 하면, 갈고 닦은 마음은 준보석, 극도로 정련된 마음은 보석, 즉 혜가 되겠다.
혜능이 말하는 정과 혜는 성리학의 이와 기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 성리학에서의 이기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만물의 근본으로, 기는 물질의 알갱이고 이는 기를 운용하는 이치이다. 그러나 정과 혜는 물질 차원을 초월한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그것을 승려들에게 적용하여 단순하게 말한다면, 정은 좌선으로, 혜는 오도로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현재의 내 수준 생각이다. 더 공부하고, 여러 현자들의 말씀을 듣고 생각의 수준을 향상하면 정과 혜에 대한 이해와 체득이 더 깊어질 것이다.
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臥 常行直心 是 淨名經 云 直心 是道場 直心 是淨土 莫心行謟曲 口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心 非佛弟子 但行直心 於一切法 無有執著 名一行三昧 迷人 著法相 執一行三昧 直心 坐不動 除妄不起心 卽是一行三昧 若如是 此法 同無情 却是障道因緣 道須通流 何以却滯 心不住在 卽通流 住卽被縛 若坐不動 是 維摩詰 不合呵舍利弗 宴坐林中 善知識 又見有人 敎人坐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 不悟 便執成顚 卽有數百般 如此敎道者 故知大錯
♧ 송계무학 국역
* 일행삼매, 한 행위에 깊이 집중함이란, 행하고 서고 앉고 눕는 모든 때에 늘 곧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정명경에 이르기를 곧은 마음이 바로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바로 정토라 하였다. 마음에 의심하거나 행위에 굽히면서도 입으로는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을 행하지 않으면 불제자가 아니니라. 오로지 곧은 마음을 행하여 일체 법에 집착함이 없어야 일행삼매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의 모습에 달라붙고 일행삼매만 붙잡고서, 곧은 마음은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념을 제거하여 마음에서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곧 일행삼매라 한다. 만약 이와 같으면 이 법은 무정과 같으며 도리어 이것은 도에 장애가 되는 인연이니라.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나니 머무른즉슨 얽매이게 된다. 만약에 앉아 움직이지 않음이 맞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앉아 편안히 쉬는 모습을 유마힐이 꾸짖음은 온당치 못하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맑음을 보고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며 이에 따라 공부를 하도록 하는 어떤 사람이 있음을 본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가르침이 잘못됨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그것만 지켜 (마침내) 잘못됨이 수백 가지가 있으니(도도 못 이루고 헛 공사만 잔뜩 한 경우의 수도인들), 이와 같이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그릇됨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송계무학 소주
일행삼매는 직심이다. 이 직심은 하루 스물네 시간 계속해서 곧은 마음, 즉 도를 구하겠다는 일편단심, 견성오도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상근기 이상의 구도자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하근기 이하 중생들에게는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이 된다.
여기에서 혜능이 강조하는 핵심은 직심통류이다. 곧은 마음은 시원하게 통하여 흐른다. 그런데 통류하는 직심은 머무르거나 고이면 썩는다. 그래서 유마힐이 사리불을 꾸짖음을 예로 들면서 불기좌선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기좌선은 신수가 일으킨 북종선의 핵심 사상이다. 즉 혜능은 라이벌인 신수의 좌선불기 수행론을 자기가 일으킨 남종선의 상행직심 통류론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홍인대사 하에서도 혜능과 신수 두 승려는 치열한 라이벌이었고, 분리 이후에도 남북 선종단을 양분하며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수도 직심을 가르치지 심도곡행을 가르치진 않았다. 단지 신수는 명상과 좌선을 중심했고, 혜능은 자기 출신답게 통류로 대변되는 활선, 즉 생활선, 즉 살아있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근본으로 한 선불교를 중시했다. 물론 신수도 활선을 무시하지 않았고, 혜능 역시 좌선을 무시하지 않았다. 유마힐은 시장바닥에서 푸주간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사리불과 동시대인이 아니지만 숲속에서 조용히 사색하는 사리불과 대비되는 생활하는 부처로 자주 인용된다.
혜능은 주즉피박, 머무르면 구속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머무른다고 반드시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생업에 골몰하는 생활인은 조용히 앉아 생각할 시간이 없다. 직장인 담배꾼들은 담배 한 개피 피우는 것도 상사 눈치 보며 시간에 쫓게 뻑뻑 빨아 당긴다. 누가 있어 일을 하면서, 고기를 썰면서 도를 생각할 것인가.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일상인들은 좌선이든 행선이든 그림 속 미녀요 병풍 속 꽃일 뿐이다. 그러나 수도가 일상인 승려들은 다르다. 좌선이든 행선이든 業禪이든 골라서 할 수 있다. 나무 하면서도 구도할 수 있고 밥 하면서도 구도할 수 있다. 또 주기적으로 좌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혜능이 두부 모 자르듯이 가른 좌부동제망불기와 일체시중상행직심은 별개가 아니라 구도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혜능이 자기 남종선의 수행법만 설법하면 됐지 구태여 남의 북종선 수행법을 들먹이며 비판할 필요는 없었다. 신수가 정좌 간심간정 부동불기, 분잡스럽게 나대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맑은 마음을 보라고 가르치는 게 틀리지 않다. 혜능 같은 상지야 생이지지 돈오견성 단박에 깨치지만, 수많은 중하지들은 교이지지 점수점오 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판도 끝에 가서 교인과 미인 모두 고지대착, 크게 잘못되었다고 일갈해버렸으니, 신수의 법은 무정법이며 도의 장애 인연이라 단정해버렸으니, 전해들은 신수와 그의 제자들은 얼마나 섭섭을 넘어 분했을까. 하여튼 간에 젊은 혜능이 한밤중에 오조홍인의 의발을 받고 기고만장 오만스러웠는 모양이다. 요즘 가방 끈 길이 자랑하며 으스대는 자들과 통류하는가? 그러나 견성오도가 깊을수록 더욱 하심해야 하고, 가방 끈 길수록 잘라 남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막론하고 상지들의 귀여운 오만스러움에, 소주를 달면서도 눈에 선해 빙긋 웃음이 나온다.
善知識 定惠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卽有二 體無兩般 此定惠法 亦復如是
선지식 정혜 유여하등 여등광 유등즉유광 무등즉무광 등시광지체 광시등지체 명즉유이 체무양반 차정혜법 역부여시
[중화총림 소주]
이 법문을 처음 읽고, 국역에서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가 '등과 그 불빛과 같으니라'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등불'은 불이 붙어 빛나고 있는 등을 말하고, '등'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기구를 말한다. 정은 등이고 혜는 불빛이니 '등불과 빛'이란 비유보다는 '등과 불빛'이란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 생각해 보니, 후자는 정과 혜를 양분하여 별개로 봄을 알았다. 혜능 법문의 요지는 정과 혜가 한 몸이라 했다. 그러므로 죽어있는 등 이 아니라 살아있는 등, 즉 불이 붙어 빛나고 있는 현재 상태의 '등불'이 곧 정과 혜가 한 몸인 경지가 된다. 빛 따로 등 따로는 정혜가 아니다. 정이 있어야 혜가 빛나고 혜가 있어야 정이 존재가 드러난다.
내가 아직 혜능 법문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혜능이 정을 체로 보고 혜를 용으로 본다고 앞에서 말한 바를 根點으로 본다면, 정을 불빛의 체인 등으로 보고 혜를 그 작용인 불빛으로 비유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등은 '죽어있는 체'이지만 불 붙어 빛나는 등불은 '살아있는 체'이다. 그러므로 '등'보다는 '등불'이다. 혜능의 비유가 정혜일여의 핵심을 살짝 비켜간 게 아닌가 싶다.
8. 무념 無念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卽漸契 悟人頓修 識自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 不悟卽長劫輪廻
♧ 중화총림 소주
계합이란 '부신이 꼭 들어맞듯 사물이나 현상이 꼭 들어맞다'이다. 즉 둔하고 미혹한 하근기들은 배우고 익히는 중에 서서히 오도에 겨우 근접할 수 있으나, 영리하고 밝은 상근기는 어느 한순간에 팍 완전히 도를 깨친다고 혜능은 말한다. 뱁새 백 걸음이 황새 한 걸음보다 못하단 말이다. 법문의 핵심은 점계와 돈수가 아니라 '식자견본성'이다. 점계는 자기본성을 가까이 두고도 등하불명인 상태가 계속됨이고, 돈수는 자기본성의 불빛을 단박에 찾아냄이다.
그러면 똑같은 구도자인데도 왜 점계인과 돈수인으로 구분되는가. 혜능은 그 차이로 이와 둔, 미와 명으로 설명한다. 그 차이는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에서도 나타난다. 생리도 같고 가정환경과 사회교육을 같이 받아도 오도 여부에서는 차이가 난다. 돈수오도는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시대가 계속된다면 구도자들 모두가 돈수인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대에나 점계인은 절대다수이고 돈수인은 극소수였다. 이런 걸 보면 남보다 앞서는 오도인들은 천부적으로 우수한 사고력을 타고났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혜능이 계속해서 돈수오도 식자견본성을 설법해댈 수밖에 없다. 법회가 한 번 열릴 때마다 돈수자가 여럿이 나온다면 구태여 혜능이 같은 법문을 테이프처럼 반복할 이유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윤회'란 육신의 윤회가 아니라 생각의 윤회, 계합할 듯 할 듯 하면서도 돈오확철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정신적 상태의 반복을 말한다. 나사를 박아 넣으려고 계속해서 드라이버질을 해댄다. 그런데 나사의 금이 넘어서 계속해서 헛 돌고 있다.
불오,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말하기 쉬워 마음에 때가 끼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속세를 끊고 산문에 든 승려들은 모두가 마음의 거울이 맑다. 스승이 마음의 때를 씻어라씻어라 가르치시지만, 사실 씻어도씻어도 맑은 거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돈수오도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돈수오도가 생화가 아니라 조화일 수가 있다. 선이란 게 시렁 위에 고이 모셔놓은 신주단지인가 아니면 행인들이 냇물을 건느게 하는 다리인가. 다리는 흔하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못된다. 신주단지가 되어야 가치와 품격이 높아 만승의 존경을 받는다. 흔하면 가치가 없다. 귀해야 가치가 높다. 고승이 저자거리에 살면 가치가 없지만 깊은 산중에 살면 소문이 천리를 간다.
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何名無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 爲本
[중화총림 소주]
무념 무상 무주, 3무 모두 좋은 말이다. 그러나 법신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승려들에게는 좋은 말이나, 일상을 살아가는 중생에게는 그냥 듣기 좋은 말이다. 하루하루 생업에 종사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중생들은 하루 종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색성향미촉이 있는 만상을 만났다 헤어진다. 만상 중에 순간마다 만나는 한 상에 생각과 행위가 오래 머문다. 그러므로 중생의 삶은 유념 유상 유주의 연속이다.
혜능이 중생들의 일상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서도 무념 무상 무주를 법문하는 까닭은 중생들로 하여금 유념 유상 유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란 뜻이다. 또한 중생은 유념 유상 유주에 적당하게 물 들어도 되나, 구도자들, 승려들은 그것들을 초월하여 맑고 가벼운 인간의 본성을 찾으란 말이다. 중생의 일상을 벗어나 오로지 견성오도만을 목표로 하는 승려에게 유념 유상 유주는 불필요하다.
혜능이 법문을 듣는 청중이 승려들이 아니라 중생들이었다면 념과 상과 주에 대한 방편을 달리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척불론을 쓰고, 배불을 조선의 정책 기조로 한 이유는 불교가 허적하여 백성들에게 해롭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허적관은 승려들에게 주는 교육용이었다. 허적관을 궁구하여 본질을 찾도록 함이 목표였다. 불교가 어디 ‘백성들에게 인생과 세상이 본래 허적하니 부지런히 일 할 필요가 없소이다’ 라고 가르쳤는가?
정도전의 얕은 불교관이 결국 배불정책을 만들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유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당하자 도망하거나 숨기 바빴다. 그러나 승려들은 떨쳐 일어나 수천의 승병이 되어 왜적에 맞서 싸웠다. 정도전과 조선은 불교에 큰 빚을 졌다.
중생은 유념에서 무념으로, 유상에서 무상으로, 유주에서 무주로 자유로이 왕래해도 되나, 승려는 유념에서 무념으로, 유상에서 무상으로, 유주에서 무주로 휙 건너가야 한다. 한 번 가면 절대로 돌아와선 안 된다.
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以無相爲體 於一切境相 不染 名爲無念 於自念上離境 不於法上念生 莫百物不思 念盡除却 一念 斷 卽別處受生 學道者 用心 莫不息法意 自錯 尙可 更勸他人 迷不自見 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 卽緣迷人 於境上 有念 念上 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
♧ 중화총림 소주
*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 국역은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이다.
요점은 '相, 겉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속 모양을 보라'는 말이다. '離'는 '떠나다, 여의다'이므로 '상을 떠난다, 버린다'로 해석하기 쉽다. 그런데 앞에 '外'가 있어서 '겉모양에 머물지 말고 속 모양을 보라'가 된다. 이것은 뒤에 오는 '莫百物不思 念盡除却'과 같은 의미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일어나는 일들의 겉모양만 보면 스치고 지나가면 금방 잊어버리는 일회성이 된다. 그러나 속 모양까지 들여다보면 더 깊은 의미를 알게 되어 오래 기억되는 다회성이 된다. 사람을 만나서 무의미한 대화를 아무리 오래해도 헤어지면 금세 잊는다. 그러나 정중한 태도로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는 비록 몇 마디일지라도 상호 간에 진하게 기억된다.
일회성으로 스쳐지나가는 '相'은 아무리 많더라도 혼탁하다. 그러나 형식과 허례를 떠나 본질을 보는 '相'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다.
* 於一切境上 不染 名爲無念 : 국역은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나니'로서 '無念'의 뜻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나 사회에나 세상에나 모든 곳에 경계가 있다. 경계가 있음으로써 본질과 소유에 구분이 생긴다. 그럼 사람의 마음에는 어떤 경계들이 세워져 있는가. 우선 식욕, 성욕, 수면욕, 건강욕, 장수욕, 등 생리적 경계가 있다. 이어서 소유욕,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 사회적 경계가 있다.
이러한 경계는 인간 모두가 갖는 공통의 경계다. 그러면서도 경계의 확장과 충돌에 의해 사회적 다툼이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다툼은 타인과의 경계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경계에서도 발생한다.
그럼 '無念'이란 무엇인가. 무념은 경계의 부정이 아니라 경계의 초월이다. 경계를 인정하되 경계의 금단을 넘어 자유롭게 소통, 유통하는 정신이다. 즉 어느 한 두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경계 전체를 조감하는 마음의 여유이다. 무념이란, 눈앞에 놓인 상에 집착하지 않고, 상의 본질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다.
* 於自念上離境 不於法上念生 : 무념이란 또한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국역이 좀 어렵다. 이것을 '자기 생각의 경계를 떠나 법의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하라'로 일단 순치해 보자. 그래도 난해하다. 여기서 '自'와 '法'은 대립어로서 '自'는 '自我'이고 '法'은 '他我'로 볼 수 있다. ‘자기 생각의 경계를 떠나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생각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자기 경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좋으나 함부로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하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말고 일단은 자기생각을 중요시하라는 말일 수도 있다. 무념이란 무조건 생각을 하지 않거나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생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비교하여 탐구하는 경지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어진다.
* 莫百物不思 念盡除却 : 성철은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로 읽고 있다. 생각을 하지 말라 또는 생각을 버리라가 아니라 百物, 格物致知 차원에서 수많은 생각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최종 목표 '념진제각'이다. 수많은 생각을 계속하되 갈피를 잡고, 하나하나 분석, 비판, 종합, 통찰의 과정을 거쳐 끝내는 정확한 생각 하나만을 남기란 말이다. 골치 아프다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무지에 빠지고,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면 헝클어진 생각의 미로에서 출구를 잃는다. 그러므로 무념이란 처음부터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수많은 생각을 끌어안고서 순서대로 사유하며 생각들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여러 가지 본질과 의미들 중에서 가벼운 것들은 물에 흘러가고 무거운 것 몇 개만 마음에 가라앉는다.
* 一念 斷 卽別處受生 :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로 읽는다. 쉬운 말이지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생각 하나가 끝나면 이어서 다른 생각이 생긴다'이고, 둘째는 의역하여 '생각이 정확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번뇌가 생긴다'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본 동력이다.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어린이나 노인, 정신지체자나 정신이상자는 특별한 보호 대상이다. 인간은 하루에 6천 번 정도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고 한다. 잠 잘 때도 꿈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멀리하거나 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을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생각도 단련이 필요하다. 해롭거나 혼잡스러운 생각이 일어나면 빨리 벗어나고, 좋은 경치나 물건, 일을 함으로써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록 단련해야 한다. 성인군자라고 해서 잡념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단지 일어나는 즉시 벗어날 따름이다. 성인군자도 먹고 싸고 눈다. 단지 그러한 생리현상을 조심스럽게 처리할 따름이다. 무념이란 생각의 단절이 아니라 순화이다.
* 學道者 用心 莫不息法意 自錯 尙可 更勸他人 迷不自見 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 :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느니, 그러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로 성철이 읽고 있는데 매우 난해한 부분이다.
뜻을 요약하면, 도를 탐구할 때 지나치게 파고들지 말고,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가끔 쉬면서 하라, 자기 생각이 모두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일으키는 생각이 모두 맞다면 구태여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맞는 생각도 있지만 틀리거나 부족한 생각일 경우도 많다. 그것은 내가 못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주 겪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맞든 틀리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귄하거나 강요하지 마라. 자기 생각은 자기가 속에 품고 굴리면서 틀린 생각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맞는 생각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부 미혹한 사랑들은 자기 생각이 틀리거나 미흡한 줄 모르고 불법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비방한다. 그래서 무념, 생각을 안으로 굴려 옥석을 가리되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을 종지로 삼는 바이다.
그러니 아무쪼록 옳으니 그르니 밖에다 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떠들지 말고 내 마음 속에서 생각을 이리저리 요리조리 굴리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조용히 시시비비를 구분할 일이다. 무념은 여울물처럼 시끄럽지 않고 깊은 강물처럼 조용하다.
有念은 소란하고 無念은 정숙하다. 사이비종교일수록 소란스럽다. 거창하게 자랑하고 광고를 해대며 더 많은 신도를 유인하려고 광분한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조용하고 묵직하다. 자랑하지 않고 광고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뜻있는 이들이 저절로 모인다.
* 卽緣迷人 於境上 有念 念上 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 :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로 읽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와 경계를 훌쩍 훌쩍 뛰어넘어 생각 전체를 통찰하지 못하고 한 가지 자기 생각에만 골똘히 집착한다. 좁고 작은 생각의 방울 속에 갇혀서 계속 맴돈다. 그 맴돎이 오래 묵으면 단단히 굳어서 마치 보석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큰 보석을 얻은 기쁨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 감격이 자기 경계 안에만 있으면 되는데 자기 경계를 억지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경계를 침범한다. 도통을 했다고 자만하면서 자기 생각을 계속 보탠다. 고집이 굳어 돌이 된 것을 보석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에게 더 이상 생각의 여지가 없다. 하느님이 강림하여 고집이라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이미 하느님의 동생이나 아들, 계승자, 상제이기 때문에 이전 하느님은 이미 효력이 없다.
원래 공자, 석가, 예수, 노자, 장자 등 성인들은 깊은 강물처럼 조용한 성품이었다. 그런데 사후에 굉장히 시끄러운 신으로 모셔지고 말았다. 큰 나무 그늘 아래 숱한 중생들이 모여 들 듯이 훌륭한 인물 한 사람 그늘이 수백 수천 년 간다. 아무쪼록 혜능의 법문따나 후예들은 무념의 경지를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 '無念' 章 한 문단에서 오래 동안 횡설수설했다. 내가 원체 배움이 짧고 생각이 얕다 보니, 혜능 법문의 이 대목에서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법문을 한 두 문장씩 나누어서 세세히 분석해 보았다. 한자 법문도 난해하지만, 성철의 국역도 하근기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법문은 비유와 비약 등 속세의 화법과는 방법이 다르다. 한자 한 자 한 자가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다.
내 생각과 주석이 혜능 법문 본지에 많이 어긋남을 잘 안다. 혹여 이 글을 읽은 이가 있다면, 혜능 법문의 본지를 시원하게 체득할 수 있도록 몇 수 가르침을 주시길 합장 드린다.
9. 坐禪 좌선 (1)
善知識 此法門中 坐禪 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不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忘如幻故 無所看也 若言看淨 人性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淨 不見自性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看者 却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自本性 却被淨縛 若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 性不動 迷人 自身 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 看心看淨 却是障道因緣
* 송계 소주
좌선은 불언부동, 말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조용히 앉아 마음을 관찰하여 맑고 깨끗한 상태가 항상이도록 하는 수행방법이다. 좌선 할 때는 마음이 깨끗하지만, 풀고 일어나면 다시 마음이 혼탁해지는 것은 아직 좌선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능은 좌선이란 마음과 깨끗함에 집착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죄선수행자는 심정에만 집착하느라고 정작 마음의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노자 도덕경 첫 말씀인 '도가도비상도'와 같은 맥락이다.
혜능은 인성본정, 사람의 본성은 깨끗하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심원시망, 마음은 원래 허망하다고 한다. 즉 본성과 마음을 달리 본다. 이것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론, 심론과 궤를 같이 한다. 성은 천부적인 절대가치이고 심은 후천적인 상대가치이다. 심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구름 아래라면, 성은 구름 위이다. 구름 위는 사시사철 맑고 푸른 하늘이다. 구름 아래 심의 세계는 변화무쌍하다. 나타났다가는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허망하다. 그러나 구름 위 성의 하늘은 ‘일년삼백육십오일’ 그냥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
혜능은 좌선을 할 때 구름 아래에서 헤매지 말고 구름을 뚫고 치솟으라고 말한다. 구름 아래 세상이 아무리 맑고 화창하다고 해도 한 때 뿐이다. 곧 구름이 생기고 풍우가 닥친다. 그러므로 구름 아래에 계속 머무는 것은 집착이 된다.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영원히 깨끗한 하늘을 보지 못하고 몸은 좌선에 있으나 입은 요동하는, 괜히 마음이 어떻니저떻니 이리저리 요리조리 굴리고 두드리고 던지는 것은 구름을 뚫지 못하는 장애가 된다. 좌선의 목표는 마음을 깨끗이 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상을 파헤쳐서 성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희로애락애오욕은 인간이 생물이기 때문에 갖는 필연이다. 이것들은 악이 아니다. 그렇다고 선도 아니다. 악과 선의 경계에서 부유하고 있다. 일상에서는 알맞게 현현하여 보편적 선을 유지하지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악이 된다.
성리학과 불교학의 한 극단에서는 희로애락애오욕을 부정하거나 사상시키지만, 살아 숨쉬며 현실을 사는 인간은 희로애락애오, 구름 아래 마음의 경지에서 부단히 부침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덜컥 숨 끊어지면 희로애락애오욕을 덜컥 벗는다.
팔자 좋은 사람은 좌선을 자주 할 수 있지만 하루하루 먹이를 위해 고달프게 일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좌선을 하고 싶어도 시간과 장소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처해 있는 이 시간과 장소에서 몸은 서서 일하나 마음은 조용히 앉아서 좌선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것을 일러서 行禪 또는 勞禪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앉아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事禪, 독서삼매에 든 이들은 讀禪이 되겠다. 禪이란 게 무어 별다로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살아가는 현장 현실 어디나 禪이 있다. 다만 禪의 속성이 일단은 조용하고 깨끗함이므로 일을 하든 책을 읽든 노동을 하든 등산을 하든 운전을 하든 번잡스런 망상에 휩쓸리지 않고 반듯하고 적실한 생각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집중함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하느라 골몰하는데 팔자 좋게 앉아서 좌선하는 분들은, 이 좋은 좌선 팔자가 누구들의 덕분인지 안다면, 나는 높은 정신의 경지에 거닌다는 잠재적 오만을 털고, 매일매일 하심하며 더욱 겸허한 태도를 갖고 용맹정진 해야 한다.
今記汝 是此法門中 何名坐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 內見本性不亂 爲禪 何名爲禪定 外離相曰禪 內不亂曰定 外若有相 內性不亂 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 卽定 外離相 卽禪 內不亂 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維摩經 云 卽時豁然 還得本心 菩薩戒 云 本源自性 淸淨 善知識 見自性自淨 自修自作 自性法身 自行 佛行 自作自成 佛道
금기여 시차법문중 하명좌선 차법문중 일체무애 외어실체경계상 념불기위좌 내견본성불란 위선 하명위선정 외리상왈선 내불란왈정 외약유상 내성불란 본자정자정 지연경촉 촉즉란 리상불란 즉정 외리상 즉선 내불란 즉정 외선내정 고명선정 유마경 운 즉시활연 환득본심 보살계 운 본원자성 청정 선지식 견자성자정 자수자작 자성법신 자행불행 자작자성 불도
♤ 송계 소주
‘외유상 내성불란’ 하되 ‘지연경촉 촉즉정’, 즉 ‘有相不亂’의 경지는 없을까. 그러나 혜능은 단호히 불가, 그래서 외리상 즉선 내불란 즉정을 설법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불법만을 생각하는 불승들은 용맹정진 하여 '외리상 내불란'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못 오른다면 그 스님은 食蟲이다.
세상에 사는 속인은 '외리상'을 할 수가 없다. 하루 종일 '지연경촉'하니 '촉즉란'이 당연하다. 그래서 혜능은 유마경과 보살계를 인용하여 중생들을 위무한다. '즉시활연 환득본심'이란 세상에서(세속이 아니라)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인간 본연의 선량한 성품을 잃지 말고 마음을 넓게 쓰라고 가르침이다. 또한 '자수자작 자성법신 자행불행 자작자성 불도'란 일상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선량한 성품을 간직하며 꾸준히 스스로 인격이 발전하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이다.
혜능의 법문은 기존의 수많은 고승들과는 결을 조금 달리한다. 중생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스며있다. 그것은 혜능 그 자신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뜻을 세워 일어섰기 때문이리라.
불교의 좋은 점은 신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정신을 갈고닦아 고귀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경지는 어느 정도의 근기를 가진 이들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선량하기는 하나 단순하다. 그래서 중하근기를 가진 이들에게는 부처의 지도와 인도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들 하근기인들을 불법으로 인도하는 승려들이 안내자 역할보다는 지도자 역할에 재미를 느끼고 거대한 사조직, 즉 종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부류들은, 옳은 승려라면 공부하느라 초췌해야 할 몰골인데도 기름기 줄줄 흐르는 비만한 몸집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간에도 허름한 토굴이나 움막에서 불법의 정도를 걸으며 용맹정진하는 승려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때문에 불법 불맥이 2500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10.三身 삼신
善知識 惣須自體 以受無相戒 一時 逐惠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於自色身 歸依淸淨法身佛 於自色身 歸依千百億化身佛 於自色身 歸依當來圓滿報身佛 已上三唱 色身 是舍宅 不可言歸 向者三身 在自法性 世人盡有 爲迷不見 外覓三身如來 不見自色身中三性佛 善知識 聽 與善知識說 令善知識 於自色身 見自法性 有三身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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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身 : 부처의 몸을 세 가지 종류로
표현한 교리.
* 法身 : 진리를 인격화한 진리불. 법의
집적. 대승불교시대가 되자 우주에 충만해 있는 법(眞理)을 인격화 하고, 진리의 體現者로서의 이상적인 불신을 법신이라 하였다. 이는 수행의 결과로서 실현되는 불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하는 이불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은 이 법신불에 근거한 것이다. 이 개념의 대표가 비로자나불이다.
* 報身 : 보살이 바라밀의 수행과 서원이 완성되고, 그 과보로서 얻어진 완전 원만한 이상적인 부처이다. 아미타불 약사여래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 化身 : 교화의 대상에 따라 일시적으로 적절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불신. 보신처럼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완전 원만한 이상적인 불신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특정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는 부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 송계 소주
* 혜능 설법의 키워드는 色身이다. 색깔 있는 몸, 즉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몸을 근거로 하여 삼신사상을 설파한다. 설법의 핵심은 삼신인 법신 보신 화신이 멀리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색신, 즉 우리 인간의 내면에 정신에 이미 들어있다고 말한다. 다만 인간생물은 미혹하기 때문에 내재하고 있는 삼신을 모르고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삼신이 내재함을 자각할 수 있을까. 물론 혜능은 승려들은 용맹정진을, 속세인들은 수양을 꾸준히 하여 삼신을 발견하기를 말한다. 내재하는 삼신은 남이 가르쳐주거나 끄집어내어 주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삼신 중에서 법신은 현대과학에 말하는 우주의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이다. 암흑에너지는 顯現하는 모든 에너지와 원자들의 출처이다. 법신과 암흑에너지의 동일성을 보면, 2500년 전 불교 고승들은 물질적 검증이 아닌 정신 검증으로 우주의 본질을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보신은 우주의 근본을 생각하는 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의미한다. 우주의 소산인 인간은 고향인 우주를 향하여 회귀한다. 정신력이 미흡하고 수명이 짧아서 많은 인간들이 반에 반도 못가고 사라진다. 그리하여 색신은 본래의 근원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영지들은 태어난 고향 냇물 최상류를 찾아 오르는 은어처럼 본래의 근원에까지 겨우 도달한다. 그들이 본 근원의 모습이 구전되다가 언어로 기로된 것이 불경이다.
많은 선지식들과 영웅호걸들이 자기가 화신이라는 생각과 믿음을 갖고 살았다. 이것은 불교 뿐 만이 아니라 각 종교와 철학계, 사상계에도 해당한다. 그 결과가 각 분야마다 펼쳐진 수천수만의 종파와 학파들이다.
그렇지만 과연 수많은 자칭 화신불들이 자기가 색신임을 알고, 핵심 근거인 법신의 경지를 체득했을까?
불교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근거에 의거하여 인간 색신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자각을 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인간생물의 조건과 한계를 합리적으로 고려한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생김새가 각기 다르듯이 인간의 생각과 욕망이 각기 다르다. 즉 근기가 다르다. 불교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목표로 2500년 동안 존재해오고 있는데,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중생들의 모습과 상태는 과연 어떠한가. 앞으로 수천수만 년이 지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부처가 되어 있을까?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고, 그 논리가 2000여 년 흘렀지만 과거나 현재나 세계 곳곳에서 흉악범죄가 빈발하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법신 보신 화신 성선설,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색신을 가진 인간생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혹 속에 자맥질하고 있다. 자맥질의 윤회에서 탈출하는 밧줄의 하나는 원자론과 우주론이다. 불경과 철학 서적 등도 좋지만 현대과학의 최첨단 정수인 원자론과 우주론을 통찰하면 법신의 경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0. 三身 (2)
此三身佛 從性上生 何名淸淨法身佛 善知識 世人 性 本自淨 萬法 在自性 思量一切惡事 卽行於惡 思量一切善事 便修於善行 知如始一切法 盡在自性 自性 常淸淨 日月常明 只爲雲覆蓋 上明下暗 不能了見日月星辰 忽遇慧風 吹散 卷盡雲霧 萬像森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 智如月 智惠常明 於外著境 妄念浮雲 蓋覆 自性 不能明 故遇善知識 開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 皆見 一切法 自在性 名爲淸淨法身 自歸依者除不善行 是名歸依
♧ 송계 소주
혜능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성선설을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맑고 깨끗하다. 즉 선하다. 그러나 구름이 덮이면 해와 달을 볼 수 없듯이 본성에 먼지와 때가 끼면 본성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한다. 다른 선현들은 인간의 본성. 즉 마음이 거울과 같이 깨끗하다고 한다. 그러나 거울에 먼지나 때가 끼면 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혜능의 구름 비유는 단순하다. 거울 비유 역시 단순하다. 그런데 거울 비유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복잡해진다. 거울 면이 고를 경우와 요철이 있을 경우가 있다. 거울 면이 고르면 상이 정확하다. 그러나 거울 면이 고르지 못하면 상이 왜곡된다. 또 거울이 깨어지면 상을 볼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처음부터 반듯하고 고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면이 고르지 못하거나 깨진 거울처럼 태어날 때부터 본성이 고르지 못하거나 깨어진 사람들이 있음을 인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본래는 반듯하고 고른 본성을 갖고 태어났으나 성장하면서 환경과 자극의 영향을 받아 고르지 못하게 되거나 깨진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세인성본자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혜능은 좀 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깊게 하여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은 '성본자정'이다.
본성을 알고 실체에 접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각'이다. 자기의 본성이 청정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잘 간직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자기의 본성이 조금 또는 많이 왜곡되었음을 인식한 사람은 그 본성을 똑바르게 수정하기 위하여 노력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자각'이다. 이것은 혜능이 말하는 '자귀의자제불선행'의 요체이다.
사색, 명상, 좌선, 행선, 독선 등은 '자각'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다. 이러한 방편들을 포괄한 분야가 철학과 사상 그리고 종교이다. 종교는 여러 방편 중에서 가장 무겁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뇌로 사유를 하면서도 몸으로는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체강동물이다. 또한 평생 동안 번식의 쾌락을 위해 이성을 탐하는 정욕의 동물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숙이에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유한생명체이다.
그러나 비 인류 동물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래서 내재된 죽음의 공포가 없이 죽을 순간이면 그냥 죽는다. 그래서 그들에겐 종교가 없다.
인간에게만 존재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가 작용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종교가 있다.
존재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위무하는 데는 종교가 특효약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종교로 집중한다. 종교 중에서도 복잡하고 난해한 교리보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교리가 있는 종교를 선호한다.
혜능이 말하는 법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다. 그렇다면 혜능은 과연 존재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스스로 해방하였을까? 석가모니도?
설법은 이와 같이 하지만 마음은 이와 같지 못하였을 것이다. 단지 지행합일이라고, 비로소 인식했으니 확실하게 자각하기 위해 엄청난 내면의 단련을 거치고 있을 것이다.
10. 三身 (3)
何名爲千百億化身佛 不思量 性卽空寂 思量 卽是自化 思量惡法 化爲地獄 思量善法 化爲天堂 毒害 化爲畜生 慈悲 化爲菩薩 智惠 化爲上界 愚痴 化爲下方 自性 變化甚多 迷人 自不知見 一念善 智惠卽生 此名自性化身
♤ 송계 소주
화신이란, 보신처럼 시방세계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완전 원만한 이상적인 불신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특정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는 부처의 개념이다. 이 화신의 객체일 수도 있지만 주체,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가 타력 종교이기도 하지만 자력 종교이기도 하다.
혜능은 생각을 통해 선악을 분별할 것을 말한다. 그 분별에서, 선과 지혜가 악과 우치보다 더 좋음을 지옥, 천당, 축생, 보살, 상계, 하방의 편법을 써서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실제가 아니라 교훈용 편법이다. 그렇지만 대중에게는 사실감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살아서는 지혜를 갖춘 보살이 되어 상계에서 살고, 죽어서는 천당에 가기 위해 부지런히 불법을 배우며 선업을 쌓는다.
혜능의 이 설법은 대중용이다. 설법 자체가 높은 도의 경지에 오른 이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과정이다. 동급의 도를 갖춘 도반 사이에는 설법이 아니라 염화시중의 미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따라 배우며 선업을 닦아 새로운 모습의 화신이 되면 세상은 극락정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옥'과 '천당'은 기독교의 용어가 아닌가? 불교에서는 '연옥'과 '극락'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가? 1400년 전 혜능이 '지옥'과 '천당'이란 말을 사용했는가? <돈황본육조단경> 원본에 있는 말인가 성철이 편집하면서 쓴 말인가.
화신불 개념과 돈오돈수 개념은 상반된다. 성철은 이 돈황본 육조단경을 역하면서 돈오돈수만이 선교의 핵심이라고 누차에 걸쳐 말한다. 점수점오는 선교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혜능이 말하는 화신은 사량, 선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보살 지혜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즉 생각의 변화를 통해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생각의 변화가 계속되는 것은 점수요, 그 변화가 높은 단계에 이른 것이 점오다. 즉 화신 개념은 점수점오와 흐름이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성철은 점수점오를 극력 거부하고 오로지 돈수돈오만이 정법이라고 말한다. 혜능 역시 돈수돈오가 아니라 8년 동안 절일을 하며 불법을 공부했다. 그러니 점수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활연대오가 다른 중들보다 일찍 찾아왔기에 육조가 되었다. 혜능의 자각 활연대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친 내공 수련의 결과이다.
혜능 자신이 화신 변화의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속세인 누구나 정법의 등불을 밝히겠다는 각오만 가진다면, 생각의 상향 변화를 통하여 화신불이 될 수 있다.
10. 三身 (4)
何名圓滿報身佛 一燈 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 莫思向前 常思於後 常後念善 名爲報身 一念惡報 却千年善止 一念善報 却千年惡滅 無始已來 後念善 名爲報身 從法身思量 卽是化身 念念善 卽是報身 自悟自修 卽名歸依也 皮肉 是色身 是舍宅 不在歸依也 但悟三身 卽識大意
♤ 송계 소주
* 報身이란, 보살과 바라밀의 수행과 서원이 완성되고, 그 과보로서 얻어진 완전 원만한 이상적인 부처를 이름하며, 그러한 부처로서는 아미타불 약사여래,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이 있다.
* 善은 지금 현재의 善으로 완성되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善을 이루어가는 미래완성형이다. 띄엄띄엄 생각하고 행하는 點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하는 線이다.
혜능은 법문이라는 틀이기 때문에 보신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중생이 善을 생각하고 행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끝에서 '피육시색신시사택 부재귀의야'라 하며 피육은 한시적 귀의요 정신은 영원한 귀의임을 밝힌다.
인간은 피육을 갖춘 존재다. 피육을 버리면 귀신이 된다. 인류 역사상 귀신을 보았느니 느꼈느니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모든 사람들의 느끼고 인정할 만큼 일반적, 보편적이지는 않다. 인간의 세계에 귀신이 있으며 작용한다면, 같은 피육의 존재인 수많은 동물들의 세계에도 귀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귀신 경험담 중에 말이나 소, 호랑이 여우 등의 귀신을 보거나 느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생각과 느낌은 인간이 피육일 때에만 갖는다. 죽으면 생각과 느낌이 전혀 없다.
도와 진리는 피육의 존재가 갖는다. 혜능이 피육은 색신이며 집일뿐이기 때문에 온전히 귀의할 곳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귀의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생기는 곳이 피육이다.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닦는 주체가 바로 나의 피육이다. 그리하여 '여정유리내함보월'하여 '구경극칙'의 지혜와 환희를 터득하고 느끼는 곳이 나의 피육이다.
* 불교의 구경인 '원교불상'에서 깨달음의 완전한 모습을 '圓'으로 나타낸다. 圓은 각과 모서리가 없이 두루 온 곳에 통한다. 지혜든 덕이든 선이든 미추호오를 초월하여 시방세계 모두를 포용하는 절대 경지다. 이것이 아마 박중빈이가 '圓相'을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원상은 평면이다. 그보다는 珠가, 단순히 입체인 공 球보다는, 존재와 생명의 의미가 더 짙은 구슬 珠가 '원교불상'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상징할 것이다. 圓相은 시방세계이지만 珠相은 색성향미촉까지 포함하는 十九方世界를 상징한다.
* 우주는 큰 구슬이고 지구는 작은 구슬이다. 우주의 물질과 정기가 응축한 존재가 생명체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본원인 우주를 인식할 줄 안다. 삼신, 법신 화신 보신이란 곧 나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삼신을 의식하고 인식하고 탐구할 수 있다. 우주의 정기가 취합된 '나'가 자오자수를 계속하여 마침내 식심견성의 경지에 오르면 다행이겠지만, 사실 그만한 큰 근기를 가진 인간은 극소수이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중근기나 하근기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별 수 있는가. 중하근기로 태어났으니 분수를 알고 내 몫대로 살아가는 수밖엔. 그렇지만, 내가 생시에 이루지 못했더라도, 인간은 대를 잇는 사회적 동물이니 후손 인류들의 보편지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어 훗날 언젠가 모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식심견성하여 부처가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고 생긴 대로 편안하게 피육을 잘 간수 하며 한 세상 살아가자.
11. 四願 사원
今旣自歸依三身佛已 與善知識 發四弘大願 善知識 一時 逐惠能道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邊誓願斷 法門無邊誓願學 無上佛道誓願成 三唱 善知識 衆生無邊誓願度 不是惠能 度善知識 心中衆生 各於自身 自性自度 何名自性自度 自色身中 邪見煩惱 愚癡迷妄 自有本覺性 將正見度 旣悟正見 般若之智 除却愚癡迷妄 衆生 各各自度 邪來正度 迷來悟度 愚來智度 惡來善度 煩惱來菩提度 如是度者 是名眞度 煩惱無邊誓願斷 自心 除虛妄 法門無邊誓願學 學無上正法 無上佛道誓願成 常下心行 恭敬一切 遠離迷執 覺知生般若 除却迷妄 卽自悟佛道成 行誓願力
♤ 송계 소주
* 인생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칠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늘 궁금하다. 겉으로 보이는 인생과 인간의 모습은 시절에 따라 변화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인생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들끓고 있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생물이라면, 대소장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품고 있는 의문이다. 이것을 혜능은 '심중중생 각어자신 자성자오'라고 말한다.
혜능은 ‘사미우악번’에 대한 대응으로 ‘정각혜선보리’를 말한다. 말인즉슨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매우 어렵다. 대응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세상에 ‘사미우악번’이 전혀 없는 절대순수인이 존재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사미우악번’을 갖고 있다. 단지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마음의 거름망이 튼실한 사람은 ‘사미우악번’을 잘 통제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나, 거름망이 허술한 사람은 수시로 ‘사미우악번’을 표출한다. 혜능의 법문을 들으려고 모인 승려들과 관리들은 일반백성들보다 정신적 수준이 높다. 그런데도 혜능이 법문에서 직접 ‘사미우악번’을 언급함을 보면, ‘사미우악번’이 색신의 인간 모두가 공통으로 갖는 굴레임이 분명하다.
삿된 생각이 엄습하면 빨리 떨쳐내야 한다. '바름으로 제도'는 하기 좋고 듣기 좋은 포괄적 개념이다. 그보다는 좋은 경치를 생각한다든지 좋은 글귀를 생각한다든지 하며 빨리 삿된 생각의 장면을 보내버려야 한다.
미혹함이 엄습하면 냉정한 마음으로 이해득실을 계산해야 한다. '깨침으로 제도' 역시 포괄적이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오면 빨리 더 좋은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기 때문에 좋은 방도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좋은 친구와 선배, 선생이 필요하다. 하심 하여 자기가 처한 상태를 이실직고 하여 도움과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악함 역시 이해득실을 계산해봐야 한다. 악을 행했을 때와 선을 행했을 때, 어느 쪽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인간은 생각을 하므로 이 생각 저 생각 번뇌가 계속 된다. 번뇌 속에 깊숙이 들어가 본질을 간파하며 단순화해야 한다.
하심, 마음을 낮추면 본질을 볼 수 있다. 거만한 마음은 높이 부는 바람과 같아 한 번 휙 불어 지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산들바람은 낮게낮게 고루 돌아다니며 불어 세상의 온 데를 볼 수 있다.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진실과 본질에 관심하여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하심'은 기본이다.
‘중생무변도 번뇌무변단 법문무변학 무상불도성’, 참 좋은 서원들이다. 이 서원들은 꼭히 불법승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만인의 소유다. 더하여 한 점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만물만생의 소유다. 공락중생이다.
12. 懺悔 참회
今旣發四弘誓願訖 與善知識 無相懺悔 滅三世罪障 大師言 善知識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愚迷染 從前惡行 一時永斷 自性 若除 卽是懺悔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愚癡染 除却從前矯誑心 永斷名爲自性懺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疸妬染 除却從前疾妬心 自性 若除 卽是懺 已上三唱 善知識 何名懺悔 懺者 終身不作 悔者 知於前非 惡業 恒不離心 諸佛前 口說無益 我此法門中 永斷不作 名爲懺悔
♤ 송계 소주
용맹정진하여 반성과 명상을 통해 이룬 견성까지는 상지상근기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의 참회를 거치고 거친다. 그러나 '질투심'만은 석가모니 부처라 할지라도 근절하기 어렵다. 그래서 혜능이 '념념불피달투염 제각종전질투심'을 강조하였다.
사회 각 분야의 정상을 다투는 사람들은 타인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이 감춘 은밀한 질투심을 갖고 있다. 질투심이라 하면 좀 나쁜 이미지이지만, 좋게 보면 그것이 자기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깊은 산속에서 독거하는 고승도 자기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도의 경지에 더 깊이 들어간 고승이 있으면 묘한 질투심을 품는다. 고승들의 질투심 사례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볼 수 있다. 원효가 공들여 쓴 <대승기신론>을 분황사 어느 승려가 감추었다. 아마 주지였을 것인데, 왕실사찰인 분황사의 주지면 당시 신라의 제일고승이다. 그런 고승도 원효의 도력을 질투하여 원고를 감추었다. 다행히 급히 쓴 <대승기신론소>가 남아 천년 후 후학들에게 읽히고 있다.
학문이나 종교 등 정신 작업에 종사하며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석학 소리와 태두라는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나 도반들이 겉으로는 동지이지만 속으로는 경쟁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어떤 업적을 이루거나 유명해지면 은근한 질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질투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보통의 인물은 그 질투심에 얽매이지만, 훌륭한 인물은 그 질투심을 자기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
혜능이 질투심 참회를 강조한 까닭은 아마 신수 때문일 것이다. 신수가 내뿜는 질투심의 여파가 혜능 사후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혜능 사후에 제자가 겨우 혜능이 홍인을 이은 육조임을 공인 받았다고 한다. 원효 고사와 신수 고사 등을 보면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공부가 깊고 견성도통을 이룬 고승대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제어하거나 근절하기가 불가했음을 알 수 있다. 생물인 인간의 두뇌에 계속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각과 생각들, 그리고 ‘희로애락애오욕’으로 대표되는 온갖 감정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13. 三歸 삼귀
今旣懺悔已 與善知識 授無相三歸依戒 大師言 善知識 歸依覺兩足尊 歸依正離欲尊 歸依淨衆中尊 從今已後 稱佛爲師 更不歸依餘邪迷外道 願自性三寶 慈悲證明 善知識 惠能 勸善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
♧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三歸依 삼귀의>
* 정의 :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의례. 佛 法 僧 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의식.
* 내용 : 三歸禮, 三歸戒라고도 한다. 삼귀의는 불교의 어떤 의식에서나 필수적으로 가장 먼저 행해진다.
'歸依佛兩足尊'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며, 대원(大願)과 修行, 福德과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歸依法離欲尊'은 불법이 일체의 허망 됨과 욕심은 떠난 청정한 법이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歸依僧衆中尊'은 僧이 일체의 대중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므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신라의 원효는 그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삼귀의를 더욱 강조하여 '歸命三寶'로 이름을 붙이고 이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 고려 말기의 나옹은 '自心三寶'에 귀의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옹은 귀의를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나옹은 항상 분명히 깨달아서 虛明靈妙하고 天然 그 자체로서 조그마한 조작도 없는 것을 '自心佛寶', 탐애를 아주 떠나서 잡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을 '自心法寶',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한 생각도 생기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고 홀로 드러나 당당한 것을 '自心僧寶9'라고 정의하였다.
삼귀의례가 귀의의 대상을 외부에다 둔 他力信仰의 성격을 가진 것인 데 대하여, 나옹의 자심삼보는 자기의 마음을 삼보로 삼아 스스로 깨우쳐 간다는 自力信仰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兩足尊>
부처님을 이름. 兩足은 두 가지 일이 족한 것이니,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의 둘을 다 다 만족하게 갖추고 계시므로 이를 갖춘 가장 높으신 분이란 말. 또 부처님은 두 발(兩足)을 가진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이란 뜻. 兩足仙, 二足尊이라고도 함.
♤ 松溪 小註
佛,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가 완전한 분이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시란 '귀의불양족존'은 불교 승려들과 신자라면 의당하게 여긴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다. 아무리 불교 교리가 심오하다고 해도, 아무리 반 또는 비 불교적이라고 해도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석가모니도 수행 도중에는 독각승이었지만 득도한 후부터는 많은 제자들과 신도들이 따르게 되면서 부지불식간에 교단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교단이 형성되자 체계와 질서가 필요했다. 이후 수백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한 지역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전파된 불교는 더욱 견고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승려들도 상중하 위계질서를 확립하게 되었다.
화두 중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가 있다. 그런데 화두로는 성립하지만 실제 현실 불교 교단에서는 금기일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되기 전 싯다르타 시절은 철저한 독각행이었다. 그렇지만 왕자 출신 승려라는 후광과 득도의 경지가 높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석가모니로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신도들을 가르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석가모니는 자기가 열반한 이후에 신이 되어 숭상 받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석가모니가 잠시 현세에 내려와 불교 교단의 모습을 본다면, 내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가사 입은 도적들이 날 팔아먹으며 호의호식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두 번째 '귀의법이욕존'은 인간으로서의 물질욕구를 완전히 벗어나 무색무취의 경지를 걷는 것은 불법뿐이라는 대단한 자부이자 자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법 말고도 수많은 종교와 사상, 학문이 있어 인간으로 하여금 지나친 물질욕구에 집착하지 말고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한 생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준다.
세 번째 '귀의승중중존'은 불교의 승려라면 당연히 갖는 자부다. 그러한 자부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다. 불교 신자라면 승려를 존중하고 잘 모심이 의당하다. 승려들은 신도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부가 지나쳐 자만심으로 가득하여 신도들을 하대해선 안 된다. 하루 의식주가 신도들로부터 나왔음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여 용맹정진 해야 한다. 그런데 승려답지 못하면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바글바글 한 게 문제다.
나옹이 '자심삼보'를 강조한 까닭은 불교가 지나치게 신도, 중생구원 쪽으로 흘러 종교성만 강조됨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는 원래 자력종교이다. 신도들이야 승려들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복덕을 누리며 수명을 길게 함을 목표로 하여 불교를 믿지만, 승려들은 연각의 태도로 불교 본연의 정신을 불태우며 옹맹정진 해야 한다.
종교의 양면성, 독각과 설법은 숙명이다. 도통한 스님이 있다는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온 골에 중생들이 운집한다. 득도한 자로서 그런 중생들을 어찌 외면할 것인가. 친견을 하고 설법을 하다보면 종파가 형성되고 발전하여 교단이 된다. 이것을 일러서 중생구제라는 미명으로 분식하지만, 득도하고 독각을 이으며 조용히 음미할 시간이 없다. 그러다보면 득도가 녹슬어 흐물흐물해진다.
13. 三歸 삼귀 (2)
自心 歸依覺 邪迷不生 少欲知足 離財離色 名兩足尊 自心 歸正 念念無邪故 卽無愛著 以無愛著 名離欲尊 自心 歸淨 一切塵勞妄念 雖在自性 自性 不染著 名衆中尊 凡夫 不解 從日至日 受三歸依戒 若言歸佛 佛在何處 若不見佛 卽無所歸 卽無所歸 言却是妄 善知識 各自觀察 莫錯用意 經中 只卽言自歸依佛 不言歸他佛 自性 不歸 無所歸處
♧ 인터넷 강연 자료
* 네이버열린연단 ㅡ 문화정전ㅡ 동아시아문명의 정전 ㅡ 8강 육조단경. 인경스님 강연
* 네이버열린연단 ㅡ 패러다임 ㅡ 주제/철학, 사상 ㅡ 1강 혜능, 동아시아 불교의 탄생.
* 네이버열린연단 ㅡ 교양서20 ㅡ 02.동양사상 ㅡ 전등록. 김호귀 박사 강연
♤ 송계 소주
'사미불생 소욕지족 념념무사 즉무애착 자성불염착' 까지는 수신론, 수행론이다. 이 수신 수행은 어느 종교에서나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종교치고 악을 가르치는 데는 없다.
후반부는 '자귀의불'을 말한다. 그런데 앞의 '각자관찰 막착용의'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귀타불'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은 '자기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혜능은 '각자관찰'이 '그릇되게 마음을 쓰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금지하도록 한다.
혜능의 요지는 '자성귀의'이다. 자성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깨달으라고 한다. 즉 쓸데없는 데에 노력을 허비하지 말고 자성을 깨닫는 데만 집중하라고 말한다.
'견성오도'는 혜능이 일으킨 선불교의 중심 교지이다. 그런데 이후에 대한 답이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돈오하여 부처가 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돈오하여 세상의 모든 욕망과 아집으로부터 탈출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남은 생을 편하게 살다 죽는 것인가? 아니면 불승들과 세인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깨달은 바를 가르쳐야 하는가. 후자를 '화하중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의 논리이다.
원효는 오도한 후에 불승으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버리고 중생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 앞에는 '대안스님'의 만행이 있었다.
네이버 열린 연단에서 사회자인 교수가 한 말이 오래 남는다. "현대사회에서 선불교가 견성오도를 목표로 삼아 자기완성에 집착하기만 하고, 중생과 사회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한반도에서 선불교가 시작된 때는 신라 말기 혼란한 시대였다. 승려들이 군웅이 할거 하며 패권을 다투는 혼란한 시대에 아무리 유식하고 유덕한 승려라 할지라도 화하중생의 길에 들기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은둔하여 자기만 만족할 수 있는 중국의 선불교가 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역시 척불정책 때문에 중생사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자기만족의 선불교가 승려들의 주무가 될 수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선불교와 정토불교 등은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 견성오도도 중요하고 화화중생도 중요하다. 현대인들의 지식수준은 매우 높다. 그래서 엔간한 불교 교리는 지해하고 있다. 그러나 바쁜 일상생활에 파묻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조용히 관찰할 여유가 없다. 그런 면에서 선불교가 명상법이나 좌선 등으로 현대인이 자아를 사색하는 데에 유효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적 네트워크, 즉 불교 모임 연대를 통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현대불교가 운동하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견성오도에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혜능이 돈오돈수를 말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 긴 시간이 곧 점수점오다. 상근기인 혜능 역시 유년기나 소년기에 견성오도 한 게 아니다.
혜능이나 성철 등 상근기들이 돈오돈수만을 주장하며 점오점수나 돈오점수 등을 아래로 보고 배척하는 것은 지적 오만이다. '견성'에서 무엇을 보는가. 본성에 덕지덕지 붙은 탐진치를 씻어내고 해맑은 본성을 보존함이 아닌가. 그 '해맑은 본성' 속에 '오만'이 들어 있는가?
진짜 '견성오도'는 물과 같다. 온데 스며들면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 오만이 스며있는 견성오도는 집착의 결과이다. 하루 종일, 장좌불와 십수 년 면벽좌선이 거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고승열전 소개문에 "토굴에서 십년 장좌불와하고..." 등은 미사여구일 수도 있다. 무엇을 얻었는가? 심중에서 뭉클뭉클 일어나는 욕망의 뿌리를 캐냈는가? 인간과 지구 그리고 우주의 원리를 보았는가?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견성오도 했다' 자부하며 대접받기를 바라고, 중근기와 하근기를 하대하고 무시하는 자는 가짜다.
14. 性空 성공
今旣自歸依三寶 㹅各各至心 與善知識 說摩訶般若波羅蜜法 善知識 雖念 不解 惠能與說 各各聽 摩訶般若波羅蜜者 西國梵語 唐言 大智惠彼岸到 此法 須行 不在口念 口念不行 如幻如化 修行者 法身 與佛 等也 何名摩訶 摩訶者 是大 心量 廣大 猶如虛空 莫空心坐 即落無記空 虛空 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世人性空 亦復如是
♤ 松溪 小註
* 신수는 性을 쟁반 위의 사과로 생각하고, 혜능은 쟁반과 사과를 포함하는 時空이 성이라고 생각한다. 신수의 사유는 분석적이고, 혜능의 사유는 종합적이다. 그래서 신수는 점수점오를 주장 하고, 혜능은 돈오돈수를 주장한다. 신수의 주장은 논리적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으나, 혜능의 주장은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해와 접근이 곤란하다. 신수의 주장은 하근기부터 상근기까지 누구나 부지런히 단계적 수행을 하면 시차는 있지만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혜능의 주장은 하근기와 중근기는 본래 이루기가 불가하고, 상근기라 할지라도 겨우 극소수 최상근기만 돈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혜능이 말하는 돈오는 법을 승계하는 자만을, 한두 명만을 위한 것이다. 많은 승려들이 돈오를 한다면 법통 승계나 품계 배열 등에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돈오의 인가를 스승으로부터 받아야하기 때문에 스승 된 자라면 돈오를 남발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맹점을 가진다. 아무리 최상근기라 할지라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수행해야만 돈오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나 청년이 돈오했다는 기록과 구전에 없다. 서른 살 이상은 되어야 한다. 서른 살에 돈오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이전 십년은 점수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일단은 '돈수'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돈오'라는 말 역시 성립될 수 없다. '돈오'가 딱 한순간 깨침이라면, 그 한순간을 위해 이미 긴 시간의 '점수'가 있었고, 그 한순간 '돈오'를 위해 화산의 전조활동처럼 비록 짧지만 '점오'의 시간이 깔려 있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니 '돈수돈오'니 '점수점오'니 '점수돈오'니 하며 '頓과 漸', '悟와 修'를 이리저리 요리조리 바꿔 쓰면서 반야지혜를 터득 했니 안 했니 요란스럽게 분별하는 행태 자체가 중근기 이상 되는 자들의 말장난이다.
혜능은 오도송은 신수의 오도송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巧語'을 얹은 것이다. 신수의 깊이가 없었다면 혜능의 뗏목이 뜨지 못했다. 713년 혜능이 죽고도 신수의 북종선이 정통이었다. 그러나 779년경에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가 당 숙종황제에게 거액의 헌금을 바치고서 스승 혜능을 6조로 공인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 글의 원전인 《돈황본 육조단경》은 혜능 생전이나 사망 직후가 아니라 근 두 세대 후에 신회가 편집했다고 한다.
혜능이 말하는 성의 정의는 직관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 인식이다. 천지의 이치에 통달한 성인이나 상근기들의 성은 일월성신이 포함되는 우주 허공과 같다. 그렇다면 성인이나 상근기에 훨씬 떨어지는 대중들의 성 역시 우주 허공과 같을까? 혜능은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있듯이 아직 성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구름은 걷어내듯 마음의 때를 씻어내면, 돈오를 하면 성이 환하게 발현된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음의 때를 조금씩 씻어내는 과정이 '점수'이고, 깨달음의 정상에 차츰차츰 차오르는 모습이 '점오'이다. 탁! '돈오'는 그 점수와 점오가 최정상에 오른 순간이다.
성인들과 상근기들은 천생으로 또는 짧은 시간에 돈오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하 중생들은 한평생을 전심전력해도 돈오는커녕 점수조차 갈팡질팡이다. 그렇다면 성인 상근기 용 돈오법과 중하근기 대중 용 돈오법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돈오법'은 상급들에게 주고, 하급들은 각자의 그릇에 맞는 수행법을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밥그릇에 양푼이 만큼의 양을 집어넣으면 그릇이 깨진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작은 그릇들이 큰 그릇을 탐하다가, 강요당하다가 마침내 깨지고 말았는가!
'守分'이란 말이 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용도가 다르듯 사람은 누구나 몸과 마음의 크기와 깊이가 다르고 활동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미나 꿀벌처럼 획일화할 수 없다. 이 원리는 수행에도 해당한다. 승려든 아니든 사람은 누구나 사유를 하고, 그 사유의 근저에는 인생과 인간의 근본에 대한 의문이 새겨져 있다. 근본에 대한 의문의 동력은 성이다. 그 동력, 즉 성에 대한 깨달음은 각자의 그릇에 담길 만큼이다.
혜능이 말하는 성의 깨달음은 오리무중이다. 귀 밝은 상근기들만 들을 수 있는 은은한 징소리이다. 그러나 세상은 상근기들의 소유가 아니라 만인만물이 공생공영하는 큰 그릇이다.
철학과 사상은 소수 지성인들의 특수 영역이지만 종교는 다수 대중들의 공통 영역이다. 성인들이 자기의 깨달음을 종교성의 모습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특수성보다는 공통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자기 개인의 깨달음이 널리 중생들에게 퍼져 지구 위 온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희망대로 되는 면도 많지만 역행하는 면도 많다. 성인은 극소수이지만 생물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중생은 절대다수이다.
性含萬法 是大 萬法 盡是自性 見一切人及非人 惡之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猶如虛空 名之爲大 此是摩訶行 迷人 口念 智者 心行 又有迷人 空心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 心量 廣大 不行 是小 莫口空說 不修此行 非我弟子
♧ 송계 소주
반야마하행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즉 모든 생물을 대자대비하는 마음이다. 나아가 비생물인 천지자연을 구성하는 만물만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래서 생물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지 않으며 자연환경을 함부로 멸실 훼손하거나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물인 인간의 위치는 어떠하며 생명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우주와 지구를 통관하면 인간은 우주 지구의 소생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의 출처는 우주와 지구이다. 인체의 금속 원소들은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졌고, 수소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별의 생로병사 도중에 만들어졌다. 인체는 공기와 물, 음식물 등 지구의 물질들을 흡입, 소화, 배설하면서 살아간다. 인체기계가 기능을 다해 낡아지면 노인이 되고, 더 이상 작동이 불가하면 죽는다. 죽어도 고장 난 채로 남는 게 아니라 미생물에 의해 인체의 원소들이 낱낱이 분해되어 다시 지구 자연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수명이 유한한 순환개체이다.
그러니 생명의 탄생과 유지를 위해서는 외계의 물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공기와 물 같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물질도 있지만, 영양분을 위해서는 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의 희생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물질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자대비하고 이치에 통달한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음식물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철저한 채식주의자라 할지라도 곡식과 채소, 솔잎과 칡 등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곡식, 채소, 솔잎, 칡 등도 비록 식물이지만 생명체이다.
인간 생물은 선천적으로 지구의 식물과 동물을 먹고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무리 대자대비 하여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그들을 죽여서 음식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살생을 필요에 따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고행기 동안에 싯다르타가 고민한 최대의 문제가 음식일 것이다. 대자대비 한 마음으로 고기는 절대로 안 먹었지만 식물은 약간 먹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먹지 않았으면 아사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숨 쉬는 해골이었다. 삼국유사 왈 비슬산에 도성과 관기는 솔잎과 칡만 먹었다. 그들도 숨 쉬는 해골이었을 것이다.
도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애로는 음식물이다. 싯디르타와 관기, 도성처럼 피골이 상접해도 오로지 도만 닦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것대로 자족이라는 모진 결심을 가진 도인이라면 그들대로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도인들은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 그래서 탁발행을 하거나 시주를 받아 겨우 먹으며 도를 닦는다. 그런데 현대에는 사찰마다 재정이 넉넉해서 탁발하지 않고도 용맹정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잿밥에 빠져 배부른 승들이 있어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하며 불제자 행세를 하는 게 문제이지만.
성이란 한자어의 사전적 의미는 '성품, 마음, 바탕, 색욕'이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성이 '성품, 마음, 바탕'으로 쓰이고, 통속소설에서는 성이 '색욕, 남녀 성교'로 쓰인다. 두 쓰임은 극과 극이다. 성리학자들에게 성의 다른 쓰임은 금기이고, 속인들에게 성의 다른 쓰임은 난해하다.
그런데 성이란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성과 속의 두 가지 뜻을 함께 하도록 했을까.
서양의 프로이드는 리비도론에서 성, 즉 색욕을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라 말했다. 즉 성이, 색욕이 인간 생물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종말에까지 중심이 된다는 말이다. 고상하고 점잖은 사람들은 금기시하겠지만 성, 색욕이 인간과 의식, 생활의 축임은 사실이다.
인간은 부모의 성행위에 근거해서 잉태되었고, 성욕의 해소를 통한 번식 본능 때문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는다. 부부 간에도 계속해서 성적 갈등이 빈발하고, 기혼자들도 배우자 이외의 매력있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잠재되어 있다. 성욕이 가장 왕성할 때가 청춘의 최고기이며, 성욕의 저하는 노화의 시작이다. 성욕의 쇠퇴는 건강한 생물로서의 쇠퇴이며 죽음과 함께 성욕도 죽는다.
성의 다른 의미인 '성품, 마음, 바탕'은 '색욕'과 연결되어 있다. 즉 '건강한 색욕'은 '건강한 성품, 건강한 마음, 건강한 바탕'을 이룬다. 반대로 '불안한 색욕'은 '불안한 성품, 마음, 바탕'을 만든다. 그러므로 소아기 때부터 '건강한 색욕'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 마런 될 수 있도록 부모와 학교, 지역사회의 세심한 배려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혜능이 고상한 법문을 하며 성의 두 가지 의미 중 다른 하나는 닫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상한 면과 범속한 면 두 가지를 공유하는 존재이다. 머리와 가슴으로 도리와 가치를 생각하고 논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육체의 성적 충동에 출렁이기도 한다. 인간은 선과 악, 천당과 지옥을 수시로 오갈 수 있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물이다.
혜능이 추격해온 혜명에게 한 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너는 무엇인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 앞에서 반야지혜란 '사람도 생물도 악도 선도 악인도 선인도 악법도 선법도 모두 다 버리지 않고 물들지 않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곧 성의 두 가지 의미의 상통성을 은근히 강조하는 게 아닐까?
45. 202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