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SNS에서 보게 되어 펀딩을 한 책. 단편집이라 상당히 기대하며 샀다.
...뭐랄까.
참 많이 부족하다고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솔직히 이 책을 산 이유는 소재였다. 정말로 흥미를 돋굴 만한 소재가 여럿 있었다. 가능성이 흘러넘친다.
그랬는데, 그 가능성을 제대로 썼다고 할 만한 건 거의 없었다.
아마 그 원인의 대부분은 분량이라고 생각한다. 12000원 정가면 절대 싼 가격은 아니다. 게다가 하드커버거나 일러스트가 들어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분량이라도 확보했으면 어땠을까. 좀더 각 이야기에서 복선을 더 깔든, 설명을 통해 개연성을 좀더 부여하든. 한정된 지면 안에 이야기의 전부를 꾸겨넣어야 하면 당연히 이야기는 죽는다. 특히 괴담처럼 "공포"가 주인데 공포를 느끼기 힘든 글자를 매개체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각 이야기를 끝낼 때마다 느끼는 건 공포가 아니라, 아 이건 좀더 살렸으면 하는 안타까움, 그저 그런 이야기를 읽는 것에 시간을 낭비했을 때의 희미한 허무함,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뭐 어쩌라는 거냐라는 빡침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에 버금가는 문제는 필력이다.
나는 모든 작가가 에쿠니 가오리나 김승옥, 박완서처럼 그 문체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구성과 그 형식은 7대 3 정도의 비율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다시 말하면 문체 정도는 좀 평범하거나 떨어지는 편이라도 이야기만 좋으면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다는 것이 내 철칙이다.
그런데 반대로 여기 몇몇 이야기는 문체 '때문에' 몰입은 커녕, 짜증이 밀려올 정도다. 웃기려는 의도 때문에 너무 오바스러워서 전혀 회화가 자연스럽지 않은 경우도 있고, 말의 내용 자체는 평이한데 너무 쿨해보이려 해서 허세에 찌든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진짜 평타만 쳐도 반은 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다음은 각 이야기의 짧은 평가를 하고자 한다. 스포일러는 없지만, 직접 읽어 보면 납득이 될지도 모른다.
1. 참 학생답다. 개인적으로 괴담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재를 썼다. 소재 자체도 내가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걸 전개하는 방법은 더 취향이 아니다.
2. 중앙값.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도,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웹툰으로 나오면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3. 명과 암이 너무나도 대조되어서 눈이 아플 정도. 구성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으나, 그 이외의 것들이 그것을 끌고 내려간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진짜로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거 때문에 펀딩을 한 건데, 이 상태로는 돈이 약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분량이 더 많았으면 조금 나아졌을 것 같기도 하지만...
4. 음...잘 모르겠다. 주변 사물은 정교하게 그려넣었는데 정작 회화의 주제는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는 정물화 같은 소설이다. 조금 더 말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했으면 훨씬 읽기 좋았을지도 모른다.
5. 호러보단 다큐. 하지만 그 사실이 약간 서글플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경우는 4와 달리 너무 겉으로 드러내서 약간 뒷맛이 개운하지 못하다. 필력은 이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엄청 좋다는 아니지만, 읽는 걸 후회할 정도는 아니다.
이쯤에선 괴이한 미스터리를 직접 사서 보세요 독자 여러분! 이라고 해야 될 것 같지만 솔직히 살 거면 펀딩 사이트 말고 대형 서점에서 사길 바란다. 나는 이걸 펀딩 사이트에서 샀는데,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다. 대형 서점에선 무려 무료 배송에 값도 더 싸다. 몇천 원이나 더 내고 받은 건 책갈피 쪼가리와 해커스 어학원의 광고지보다 얇은 "보상"이다. 보상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어차피 메인은 책이니까. 그런데 이 펀딩을 통해서만 이 가격에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해놓고 막상 다른 사이트에서 더 싼 가격에 팔아버리니 허무하다. 이딴 식으로 기만당할 줄은 몰랐다. 나는 앞으로는 적어도 이걸 주최한 출판사한테서 다시 책을 살 생각은 없다. 이걸 위해 열심히 노려한 작가분들이 불쌍할 정도다. 이 책을 산 사람들은 앞으로 몇 년 간은 펀딩을 못 하는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
혹시 그래서 제목이 그렇다면...예상치도 못한 빅픽쳐에 박수는 쳐줄 수 있다. 물론 발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