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4절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육신적으로 사는 사람은
곧 인간적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살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겁니다(빌3:18)
그러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은 자로서 그 영광의 상속자로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담을 지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익혀 죽었다가 다시 산 자로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경건의 연습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 곧 육체가 욕심을 내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매 순간 육체의 소욕은 성령과 맞서게(against) 됩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내 영혼을 소성시켜’의 그 소성은 바로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대적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또 육체를 거슬립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할까 하지말까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밀물썰물에 의한 진펄과 개펄입니다.
성령체험을 한 초창기엔 사람이 이전 보다 오히려 견고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트러블이 일어납니다. 이런 스캔들(스칸달리조)이 싫어서 성령체험을
꺼리는 사람도 있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만난 어떤 단체의 전도자가 전혀 영적인
기색이 없는 얼굴로 회개에 대해 도전적으로 묻기에 이를 지적했더니 한참 후에
교회에 갔다 와서는 영의 기운이 비치는 얼굴로 돌아오므로 그들 단체의 장점과
모자람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니 다소곳이 듣고 차분해 지는 걸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의 소욕이 그 얼굴에 드러나는 것과 성령의 기운은 서로 다릅니다.
육신의 소욕과 영의 소욕으로 마음속에서 송사와 변명이 일어나 옥신각신 싸웁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밖에 있는 성경의
말씀과 안에 있는 성령의 뜻과 내 생각이 공명을 이루어 언행이 명료해져 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남을 기다려 주고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좇는 조건으로 율법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만약 자유를 얻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그 자유를 얻은 영적기능이 제한받습니다.
왼 손을 쓰면 왼손잡이가 되고 오른 손을 쓰면 오른손잡이가 되듯이
율법의 종이었다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어 성령을
좇아 살 자격을 얻었으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는 복으로
승격이 됩니다(롬8:14)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는 것과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야 하고 말씀하신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은 구원의 과정 속에서 보너스와 같은 복입니다.
19-21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게(현저히) 다 드러났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산상수훈의 8복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이룰 수가 없는 인격의 열매들입니다.
8복을 이루려면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심령의 천국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다음부터
한 단계씩 나아가서 드디어 세상의 소금 맛이 되고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함도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한 세례로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 안에
그의 영과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자격지심과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어 굳게 서서 그 자리에서 정착한 후에야 비로소 가동이 되는 겁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바울의 노파심입니다. 이렇게 되는 방법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자로서 정욕과 탐심이 죽었음을 믿고
시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성령을 좇아 행하고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실직하거나 실패한 사업가는 육체는 죽었는데 정욕과 탐심이 그대로입니다.
정(情)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정으로 남의 짐을 질 수도
있고, 정으로 남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정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좇지 않으면 정이 죽으면 무정한 사람이 되고 욕심이
죽으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때부터 주님께 피동되는 법을 터득합니다.
드디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선언하게 됩니다. 주님이 정하면 정하고 주님이 동하면 동하는 사람이 됩니다.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십자가의 사건이후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익힌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건너지
못하고 아니 건너지 않고 성령을 구하니 그들에게 내적인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외적인 성령의 역사 곧 표적이나 은사만 나타날 뿐입니다. 곧 에피(on) 성령입니다.
따라서 이적과 기사는 따르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는 걸 지겹도록 보고 있는 중입니다.
신앙의 진보는 처음에는 십자가 주변을 뱅뱅 돌다가 점점 하나님의 뜻이 통하게 됩니다.
2년 정도면 될 광야를 이스라엘이 그 광야에서 38년을 더 도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26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25절 이후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만 누가 최고냐 하는 시험에 빠집니다.
구제, 기도, 금식 등으로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유대인과 같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마6장) 마귀는 우쭐대게 하고 들뜨게 해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성에 진리의 지식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감성에 평강과 기쁨을 주셔서 동의를 받아 의지를 움직여 행동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분열시켜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엉망진창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조급하게 하고 충동질하는 마귀의 짓입니다.
넘어지는 것은 일어난 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는 시험도 유혹도 없습니다. 아니 성령을 좇아 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망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났고, 영생을 얻어 영원한 기업을 향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지고 자빠져서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이 터져도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의 보좌 곧 시온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군대에 가면 배불리 먹여 놓고 편안하게 앉혀 놓고 군가를 부르게 하지 않습니다.
흙구덩이에서 온갖 기합은 다 주고 거의 파김치가 되게 해 놓고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하고 군가를 부르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하면서 온갖 환난과 고난과 역경 속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로서 ‘내 영혼 평안해’ 찬송을 부르고,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하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십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