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심술궂다. 엊그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이 영하권으로 곤두박질 쳤다. 봄을 시샘하듯 또 한번 심술을 부린게다. 그러나 제아무리 심술맞은 동장군도 저만치서 다가오는 봄햇살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기운 잃은 동장군은 채 하루만에 기세 꺾여 슬며시 물러나 앉은 18일 아침, 동향 베란다로 넘어든 햇살이 따사롭다. 두툼한 겨울용 등산재킷은 부담스러울 것 같다. 봄가을용 재킷으로 바꿔 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오늘은 남한산에 올라 남한산성 성곽을 西,北,東,南,西門으로 회귀한다. 산행에 있어 어딜 갈까 깊게 생각치 않는다. 대개 당일 내지는 하루이틀전 정하는 편이다. 남한산성 성곽 일주 역시, 자고 일어나 아침에 결정한 코스다. 나홀로 산행에 익숙해 있다보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느 산으로 갈 것인가, 어디서 몇시에 만날 것인가, 늦어서 허둥대는 일, 늦게 나타나는 일행때문에 우왕좌왕하는 등 일체로 부터 자유롭다는게 나홀로 산행의 특장점이다.
서울에서 남한산성을 오르는 들머리로 대개 송파구 거여,마천동을 택한다.
거여동이나 마천동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광주목에 속했다. 1914년에 이르러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마천리, 거여리라 했다. 1963년에는 다시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마천동, 거여동으로 바뀌었다. 이어 1975년 강남구, 1979년 강동구를 거쳐 1988년에 현재의 송파구 관할이 됐다. 최근 8.31부동산대책이라는 것 때문에 또다시 거여, 마천동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5호선 종점인 마천동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온 시간은 11시 46분. 군부대 담벼락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등산로 초입이다. 어수선하게 들어선 먹거리점와 등산장비점들을 지나면 호국사자寺가 나온다.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는, 사찰이름도 특별해 보이는 이 절은 인근 군부대 장병들의 종교생활을 위한 곳이다. 굳게 잠겨져 있으나 호출버튼만 누르면 경내 근무병사가 나와 안내한다. 개방된 곳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나 등산로 초입을 가로막고 선 커다란 안내판은 좀 부담스럽다. 출입 철문과 함께 전형적인 군용 냄새가 물씬한 안내판이다. 도통 사찰의 이미지와 배치되는 느낌이라 하는 말이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등산로가 갈라진다. 똑바로 곧장 오르면 남한산성 서문에 닿는다. 우측 목계단을 따라 오르면 일장천 약수터를 지나 수어장대를 거쳐 서문으로 향하게 된다. 오른쪽길을 택했다. 일장천 약수터엔 온갖 운동기구들이 가지런하다. 60대쯤은 되어 보이는 등산객이 발목을 철봉에 걸친채 거꾸로 매달려 얼굴빛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허리운동에 여념이 없다. 50대 아주머니들은 둥근 회전원판에 몸을 올린채 좌우로 허리를 연신 비튼다. 모두들 허리에 무진장 공을 들인다. 왜일까?
약수터를 지나 수어장대 밑까지는 매우 가파른 흙길이다. 오전 중이라 햇살이 미처 등산로에 닿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흙탕길 등산화 자욱이 그대로 얼어 굳은 탓에 걷기가 한결 편하다.
서문에 도착해 내려다 보이는 송파구는 흐릿하다. 해는 떳으나 쾌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잔뜩 안개가 낀 것도 아닌, 시야가 어정쩡하다. 대부분 서문에 올라 막걸리 한사발 들이킨 후 하산한다. 나 역시 서문까지는 가끔씩 올라 와 봤으나 성곽일주를 작정한 건 처음이다. 서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른 기준 압장료 1천원을 내야 한다. 남한산성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내 성곽을 따라 돌면 비교적 산행길이 잘 정리되어 있어 수월하다.
성곽 바깥 등산로를 택했다. 성내 보다 바깥이 아무래도 한적할 것 같아서이다.
서문을 보며 좌측길, 즉 북문방향으로 10여분 가면 잘 단장된 연주봉 옹성(460m)을 만나게 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동정을 살피던 곳이란다.
경기도 하남시 일대는 물론 한강 이북도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 여긴데 오늘은 그저 희뿌옇게 드러날 뿐이다. 치욕의 역사가 서린 이곳에서 370여년 전 매서운 삭풍이 휘몰아치는 남한산성을 잠시 떠올려 본다.
1637년 1월, 조선왕 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다. 淸 태종의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태종에게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임금이 적장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당시 삼전도였던 송파 일대가 발아래 내려다 보인다. 지금도 저 밑 어딘가에 굴욕의 삼전도비(청태종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북문으로 향하는 성곽밖 등산로는 대부분 결빙되어 반질거린다. 햇살이 미치질 못하는 담벼락 밑이라 위험천만이다. 앞서가던 일행들이 되돌아 온다. 아이젠 없인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란다. 결국 제대로 한번 나뒹군 다음에서야 배낭을 열어 양발에 아이젠을 채웠다.
이럴줄 미리 알았더라면 성곽안 길을 택했을 터인데... 성곽밖이 한적하다 싶어 내심 좋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파른 빙판길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겨우 북문에 닿았다.
북문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 자주 등장해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다. 그런데 아뿔싸! 길이 없어졌다.
성곽밖 등산로를 통제한다는 내용이 북문 보수공사 안내판에는 나붙어 있다. 북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되돌아 갈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통제목적으로 쳐놓은 철조망을 벌려 틈새를 만들 수 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배낭을 던져 놓고 누운자세로 팔을 뻗쳐 철조망을 들어올리며 통과했다. 논산훈련소 시절 철조망통과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혼자이길 망정이지 이 무슨 우스운 꼬락서니인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서면서 부터 빙판길 사정은 더욱 안좋다. 오가는 사람은 단한명도 없다. 가뿐 숨소리와 서걱서걱 빙판길에 아이젠 꽂히는 소리만 유난히 증폭되어 들린다. 북문을 한참 지나친 후에야 성내로 들어갈 수 있는 첫번째 암문을 만났다. 몸하나 겨우 통과할 정도의 크기인 암문은 남한산성에 모두 17개가 있다. 암문은 성곽에 누각없이 만들어 놓은 통로이다. 성안에서 성밖으로 또는 옹성과 연결되는 통로 구실을 한다. 암문의 내측에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허리를 굽혀 암문으로 기어든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그제서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띤다. 길 사정도 한결 좋다. 발에 채웠던 아이젠도 끌렀다.
동장대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동장대터에서 막걸리와 오뎅국물이 발걸음을 잡아 끈다. 막걸리 두사발의 힘을 빌어 장경사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성곽너머 북동쪽으로 벌봉(480m)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경사는 산성을 축성할 때 공역(工役)을 한 승려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북쪽으로 2km 가량 올라간 곳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한적해서 더욱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남한산성 안에는 본래 9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 등이 복원되어 있다.
동문 옆길엔 일명 사구문이라고도 하는 水門이 있다. 남한산성은 지세는 西高東低라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흘러 나간다. 성안에서 죽으면 시신이 四門을 통과할 수 없어 이 수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다. 또한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땐 이곳으로 비밀리에 출입하기도 했다.
남한산성 진입로를 가로질러 또다시 잰걸음으로 성곽을 따라 오른다. 이곳서 부터는 곳곳에 무너져 내린 산성 잔해가 흉물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군데군데 복원공사 중이라 자재들이 흩어져 나뒹군다.
시내 빌딩은 자고나면 뚝딱 서너층씩 올라가던데 이눔의 성곽보수공사는 해가 바뀌어도 기와장하나 안올라 가니... 그러면서도 허구헌날 남한산성은 민족정기를 일깨워 주는 곳이니 잘 보존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니 원... 지나치는 등산객들의 푸념이 귓전을 스친다.
진행방향을 기준해 왼쪽 저멀리 산봉우리에 통신탑이 우뚝 솟아 있다. 검단산이다.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과 이름이 같아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기도 한다. 성곽아래 초단파매표소를 지나 어느새 남문에 이르렀다.
얼마전까지도 남문은 통과하는 차량들로 늘 번잡했었다. 이제는 인근에 뚫린 터널로 차량들이 통과해 남문으로의 성내 출입이 한결 여유롭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450m)에 세워져 있다.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해 군사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으로 원래 단층으로 축조하고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함께 서장대로 불렸으나 영조27년에 이층누각으로 증축하여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장대이기도 하다.
수어장대를 지나자 이내 서문이 눈앞에 다가선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8km 성곽을 한바퀴 돌아 서문을 빠져 나왔다.
이제 마천동 방면으로 하산이다. 뭔가 서운한듯 두리번거려 본다. 보이질 않는다. 벌써 동이 났을리는 없을텐데... 혼자 궁시렁거리며 발걸음을 내려 딛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바위모퉁이를를 돌자, 서문 터줏대감 막걸리 아저씨께서 불러 세운다. 된장에 양파, 멸치 그리고 막걸리 한사발 출출해진 하산길에 이보다 더 나은 성찬은 없다. 내려놓은 빈잔에 서비스로 부어주는 량이 반잔이다.
"무겁게 지고 올라 오셔서 인심좋게 팍팍 부어 주시면 어떡합니까" "산 이야기, 세상 이야기 공으로 듣는게 얼만데 이 까짓거에 비할 바 아니지요"
인심좋은 막걸리아저씨 덕분에 시동이 걸렸고 그러던 차, 등산로 입구 거여동 공수부대에 여태 현역으로 복무 중인 친구와 접선, 닭똥집에 소주 일잔 더... |